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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79)화 (279/282)

<279화>

저택 앞에 당도한 벨슈타인 공작가의 마차에 남작은 놀라 자빠졌지만 대귀족의 방문에 응접실로 루시엘과 엘링턴을 들여보냈다.

처음에는 좋게 말했다.

노아는 벨슈타인의 검은 날개 소속이니, 동생을 공작가로 데려가서 후원해 주고 교육도 받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남작은 돈을 뜯어내려고,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제 소중한 딸은 절대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미아가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고개만 내민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루시엘과 동갑인 그녀는 노아처럼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응접실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루시엘의 분노를 더욱 돋궜다.

“하…… 그러니까 지금!”

은빛 눈썹을 찌푸린 루시엘이 어이가 없어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소중한 딸이라면서 늙은 귀족에게 결혼을 시키려고 한다고요?”

“……저, 저기 아가 마님. 제1 작전은 평화롭게 가는 거 아니었어요?”

곁에서 엘링턴이 소곤거렸지만 루시엘은 개의치 않았다.

“제2 작전으로 개시요. 가서 노아 불러오세요. 엘링턴.”

루시엘이 남작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뭐, 뭡니까. 그놈이 여긴 왜.”

“남작께선 신문도 안 보시나요?”

루시엘이 노아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린 제국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남작이 그걸 읽어 내려가더니 인상을 콱 썼다. 그가 내다 버린 노아가 검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기사가 되다니……!

‘게다가 눈앞에 있는 벨슈타인 공자비와는 또 무슨 관계지?’

어쨌거나 돈을 잔뜩 뜯어낼 기회였다. 어쩌면 그 늙은이보다 더.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뒤에서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노아가 검은 날개의 정식 기사 휘장을 달고 들어섰다.

“……노아 오빠!”

“미아, 넌 들어가 있으라니……컥.”

남작이 달려가 미아가 있는 방문을 잠그려 했지만, 그의 목덜미가 노아에게 턱 붙잡혔다.

단숨에 그의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돈이 필요합니까. 지불하죠. 당신 맷값으로.”

“커, 커허윽.”

“미아는 제가 데려갑니다.”

노아가 남작의 멱살을 허공에 들었다가 집어던졌다.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힌 충격 탓에 남작이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머리 위로 짤랑짤랑 동화를 뿌려 주었다.

“정말 노아 오빠가 왔구나. 흑흑, 보고 싶었어!”

그제야 겨우 안심한 미아가 노아에게 폭 안겼다.

“오빠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미아. 어서 여길 나가자.”

검투 대회에 우승까지 하고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어 돌아온 오빠를 보고, 미아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서로를 얼싸안은 남매의 재회를 눈으로 지켜본 루시엘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뒤처리는 깔끔히 해야 하기에 집을 나간 후, 피닉스를 소환했다.

피닉스가 가장 잘하는 게 있다.

바로 활활 태워 버리는 것.

“으, 으아악. 불이야아!”

남작의 비명을 뒤로한 채로 벨슈타인가의 마차는 떠났다.

며칠 후.

공작성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노아를 다시 만났다.

최근 테스트 결과가 좋아서 훈련소에 복귀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노아는, 미아와 살 집을 따로 마련했다.

선한 눈매와 검은색 머리카락. 노아와 미아는 누가 봐도 닮아 있었다.

“노아, 동생을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누구보다 멋진 기사로 성장하고 있어서 기뻐.”

“아직 목표가 더 남아 있지만, 그래도 미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제겐 두 번째 선물입니다.”

“첫 번째 선물은 뭔데?”

“그날 마구간에서 아가 마님을 만난 겁니다. 제 은인이시니까요.”

노아가 무릎을 꿇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있게 눈을 반짝였다. 그는 정식 기사 서임도 받아 이제 어엿한 벨슈타인의 검은 날개 소속이자, 루시엘의 개인 호위 기사였다.

“기사 노아 반, 루시엘 님을 위해 앞으로도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앞날을 응원할게, 쭉 잘 부탁해요. 반 경.”

루시엘의 입가에도 길고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전생보다 더 빛나는 길을 걷게 될 노아의 미래가 훤히 보여서.

동생과 만난 노아를 보고 나니 루시엘도 언니를 만나러 갈 용기가 다시 차올랐다.

시간의 책 앞에 선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눈을 깜빡였다.

서명을 마쳤지만, 아무리 언니와 함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시작점이 무조건, 다시 회귀했던 그날이었다. 이미 언니가 죽은 후, 루시엘이 오르비아 백작에게서 도망치던 그때였다.

‘다시 언니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루시엘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다시 서명란을 살폈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

‘벨슈타인과 엮여질 이번 생의 운명에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던 걸까?’

루시엘은 벨슈타인의 성을 제외하고, 이름만 적어 넣었다. 그래도 책에 변화가 없었다.

루시엘은 답답해서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시간의 책 앞에 혼자 읊조렸다.

“가르쳐 줘. 언니.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의 어떤 페이지로 가야 언니에게 닿을 수 있어?”

* * *

삼 년 후.

싱그러운 초여름, 분홍 장미가 느지막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황성의 데뷔탕트 볼이 열리는 첫날이었지만, 벨슈타인 공작성은 다른 일로 몹시 분주했다.

6월 1일 오전 7시.

다름 아닌 루시엘의 열여덟 생일이자, 8년 전의 결혼 계약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내내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키제프는, 마법 서류를 보관하는 제1 보좌관실의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쿵쿵.

똑똑도 아니고 쿵쿵이라니.

보좌관실에 비치된 간이침대에서 잠이 깬 엘링턴이 울컥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멋대로 들어온 키제프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흔들며 물었다.

“……어딨어?”

“뭐, 뭐를요.”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눈매와 깊어진 이목구비가 살아나 엘링턴마저도 젊은 시절 공작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저렇게 돌격해 오면 누구라도 겁을 먹을 만큼 완연히 성숙해진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결혼 서류 말이야.”

“아, 오늘이 그날이로군요.”

남의 일이라고 태연하게 대꾸하는 엘링턴을 보자, 키제프는 속이 터졌다.

“얼른 내놔. 수정하게.”

“……아니, 소공작님 혼자 하시는 결혼입니까. 왜 새벽부터 행패를 부리십니까.”

“……진짜 이럴 건가? 그거 오늘까지 이혼 조항 안 빼면, 큰일 난다고.”

다급한 얼굴로 금발을 쓸어 넘긴 키제프가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가 다 거기 있었다.

계약 결혼의 연장 및 수정은 딱 하루, 만료일에만 가능했다.

기한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이었고, 같은 상대와의 결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황실의 승인과 몇 년간의 유예 기간이 필요했다.

최근에야 그걸 알게 된 키제프는 망할 제국법이라며, 수십 번도 더 욕했다.

“그러게. 계약서 조항은 잘 보고, 서명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혼 축하드립니다.”

“아오, 진짜.”

엘링턴이 빙긋 웃으며 깐족깐족 놀려 댔다.

“누가 이혼한대. 절대 용납 못 해! 죽어도 안 해.”

키제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죠, 아가 마님 의향은 물어보신 겁니까? 아, 마침 데뷔탕트도 열린다던데. 신랑감을 물색하기에는 아주 따악~ 좋은 시기네요. 그죠?”

“하…….”

“아가 마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영식들이 얼마나 많을지.”

“…….”

철컥. 콰득.

키제프가 보좌관실 문고리를 고장 내고 문짝도 조용히 잡아 뜯었다. 다음은 책상을 부술 생각이었다.

“힉. 장난인데 너무 진심으로 나오시는 거 아닙니까.”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빨리 내놔. 계약 서류.”

“……그거 근데 저한테 없습니다.”

“뭐라고? 그걸 왜 인제 말하는데.”

키제프의 미간이 마구 일그러졌다.

“어제 각하께서 가져가셨습니다. 검토를 좀 해 보시겠다면서.”

“……남의 계약서는 대체 왜.”

그때였다. 부서진 문고리와 문짝 너머로 우뚝 공작이 들어섰다. 싸늘한 붉은 눈이 구르며 제 아들을 담았다.

“누가 남이냐.”

“아, 아버지! 빨리 주세요. 수정하게.”

“……음? 루시엘은 내 딸 하기로 했는데?”

공작이 씩 입가를 말아 올렸다.

“……농담 안 통합니다. 이미 엘링턴이 써먹었습니다.”

얼마 후, 루시엘이 보좌관실로 찾아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빠, 부르셨어요? 여기 계시다고 들어서.”

“이리 와라, 우리 딸. 열여덟 살 생일 축하한다. 성인이 된 것도 축하하고.”

“감사해요, 아빠.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루시엘이 눈을 곱게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삼 년 사이 루시엘은 부쩍 살도 찌고, 키도 커져서 이제 소녀보다는 아가씨 같았다.

더 건강하고 예뻐 보이는 건 물론이고, 새벽녘 내리는 첫눈을 닮은 은발과 투명하고 화사한 피부, 날이 갈수록 고와지는 이목구비에선 눈을 떼기 어렵다.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청초한 수선화 같았다.

이제는 귀여운 눈토끼보다는 예쁜 눈사슴에 어울릴 정도로 곱고 쭉 뻗은 여리한 몸은 푹 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를 보자, 가장 행복해하는 얼굴이 된 키제프가 말했다.

“루시엘, 벌써 일어났어? 생일 축하해.”

“응, 키제프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는데.”

“말도 마세요. 새벽부터 찾아오셔서 아주 난리도…… 읍읍.”

키제프가 얼른 엘링턴의 입을 틀어막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 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잖아. 우리.”

“볼일?”

“결혼 계약 수정해야지. 나랑 이혼할 거야?”

“아…….”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맑게 굴리자, 공작이 살짝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우리 딸, 애비한테만 살짝 본마음을 알려 줘도 된다. 잠깐 마음을 결정하는 시간이라도 줄까?”

공작이 넌지시 말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키제프와 공작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결정했어요.”

그러고 나서 루시엘이 공작의 귀에 대고, 속삭여 주었다. 루시엘의 대답을 들은 공작이 슬쩍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러냐. 아쉽게 됐군.”

“루시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가 마님, 인생은 깁니다. 잘 생각하세요.”

키제프가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간절하게 루시엘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루시엘, 이제 와서 나 버릴 거야? 우린 절대로 못 떨어져.”

“키제프,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건데. 나 못 믿어?”

“그래, 이놈아. 루시엘은 이혼 안 한 댄다.”

공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망할 제국법 때문에 그랬어. 그럼 얼른 서류 주십시오.”

공작이 아공간 포켓 깊은 곳에 숨겨 둔 결혼 계약의 서류를 꺼냈다.

이어 허공에 뜬 서류의 페이지가 팔락 넘어가더니, 이혼 조항은 소멸되고, 8년이라는 숫자는 평생으로 바뀌었다.

“살았다. 이제 영원히 우리 부부네.”

“응.”

그제야 키제프의 눈에 이채가 돌면서, 루시엘을 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눈에 담았다. 그러자 공작이 크흠 하고 계속해서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아버지, 이혼 안 하는 걸 도대체 왜 이렇게 아쉬워하시는 겁니까.”

키제프가 흐린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몰라서 묻냐?”

“아빠도 참.”

장난기를 거둔 공작이 축복의 말을 전했다.

“이로써 평생 부부가 된 걸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소공작님, 그리고 아가 마님.”

“모두 고마워요.”

루시엘은 키제프의 너른 품에 안기면서 열여덟 살의 기쁜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 베시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는 살짝 말했다.

“아가 마님, 생일도, 결혼도 모두 축하드려요. 그리고 삼십 분 후. 큰 마님께서 연회 홀로 모두 모이시랍니다! 아, 그 전에 드레스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이리 오셔요.”

“응. 너무 고마워, 베시.”

베시의 손에 끌려 나가면서 루시엘이 남겨진 키제프와 공작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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