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반년 후.
폐황자의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었다. 황도 아르테의 시내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희대의 살인마.
피에 미친 악귀.
모두 레이놀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피가 없는 시체가 발견된 것도 전부 폐황자의 짓이라는 이야기가 군중에 널리 퍼진 탓이었다.
“저놈이 죽인 사람이 자그마치 수십 명이나 된다지? 악마 같은 놈!”
“죽어라! 반역자!”
“저런 괴물이 황위를 물려받았더라면 제국이 멸망할 뻔했지 않소.”
퍼억!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오물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고, 다짜고짜 멱살을 쥐고 주먹을 날리는 이들도 있었다.
처형장에 묶이기 위해 가는 동안 레이놀드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병사들도 혀를 차며 군중을 말리지 않았다.
사형집행관을 따라서 양손이 결박된 레이놀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질질 끌려갔다.
벨슈타인의 지하 감옥에서 지낸 끔찍한 고통의 시간 동안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크리스털 페어리의 보석이 다른 모든 것은 원상태로 치유해 주었어도, 머리 색과 피폐해진 정신 만큼은 복원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놀드는 깊이 침잠하는 눈으로 처형장을 바라보았다.
저를 죽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황성의 지하 굴에서 모든 증거가 드러났다는 것을 심문 과정에서 들었을 때.
레이놀드는 자신이 벨슈타인이 놓아둔 덫에 완벽히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 클로디아가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까지.
그녀는 마지막으로 감옥을 찾아와 말했었다.
‘처음부터 네게 아까운 자리였다, 레이놀드. 루시엘이 전생에 받았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길 바라. 제국의 황위는 걱정하지 말렴. 진정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할 테니까.’
황제 요하네스가 침통한 얼굴로 레이놀드를 내려다보았다.
“죄인 레이놀드는 고개를 들어라. 네 죄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고 무겁구나. 반역을 위해 그 무수한 악을 행하였더냐!”
“…….”
“감히 황실과 신전을 기만하였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숱한 불법을 저질렀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닐뿐더러 인간도 아니다. 사형을 집행하라.”
더는 보기도 싫다는 듯, 황제는 손을 들어 사형집행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루시엘이 전생에 죽었던 바로 그곳에서 지금은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시퍼런 단두대의 칼날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처형대 앞에 목을 들이민 레이놀드는 뒤늦게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루시엘…… 네가 느꼈을 고통이 아주 조금은 이해되는구나.’
서컹!
단두대의 서늘한 칼날이 떨어졌고 군중들은 환호했다.
* * *
같은 시각, 루시엘은 온실에 마련된 티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들며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야.’
루시엘은 겨울을 기다려 왔다. 키제프의 생일을 챙겨 줄 수 있었고, 꼭 가 보고 싶었던 마법제도 있었다.
발목을 감싼 분홍빛 벨벳 슬리퍼에 편안하고 포근한 흰색의 숄을 걸친 루시엘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겨울임에도 온실 안은 마법이 걸려 있어 항시 따뜻한 봄 같았다.
―부엉.
솔방울 부엉이 벨이 루시엘의 어깨에 사뿐 내려앉았다.
벨은 루시엘의 방보다는 벌레가 많은 온실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루시엘의 주먹만큼이나 작았던 몸 크기가 제법 보동보동 살이 올랐다.
“벨, 약간 무거워진 것 같네?”
요 며칠 사이 루시엘은 겨우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동안은 처리할 업무가 너무 많아 온실을 산책하는 일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배려로 루시엘에게 일주일 동안의 휴식이 주어졌다.
루시엘뿐 아니라 키제프도, 벨슈타인 가족 모두가 계속 바빴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카일라와 레이놀드, 마검을 파멸시키기 위해 제쳐 놓은 일들이 잔뜩 쌓여 있던 터였다.
특히나 공작과 키제프는 정말 몇 달간은 쥐죽은 듯, 정무궁에서 살았다. 엘링턴도 어차피 퇴근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으니, 본성에 상주하겠다면서 연봉 인상도 요구했다고 들었다.
‘저도 장가는 가야지 않겠습니까!’
―라면서.
신붓감이나 데리고 와서 요구하라고 공작이 맞공격을 했지만 이어 두 시간의 접전 끝에 엘링턴의 승리로 끝났다고 들었다. 무려 두 배 인상이라니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당당한 걸 보니, 정말 누가 있는 거 아닐까?’
루시엘은 엘링턴 생각에 미소를 짓다가, 제 발밑으로 폴짝 뛰어온 눈토끼를 보았다.
자그만 앞발로 제 얼굴을 비비며 세수하는 눈토끼를 안아 들었다.
“어? 눈토끼네. 아기 영지에 있을 텐데 어떻게……? 혹시 아르제온이야?”
루시엘은 토끼와 눈을 맞추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토끼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앙증맞은 앞발로 제 얼굴을 마구 문지를 뿐이었다.
“……진짜 눈토낀가?”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진홍빛 눈망울을 굴렸다.
“……루시엘, 설마 못 알아보는 건가? 내가 준 눈토끼잖아. 우리 딸 하기로 했는데.”
저벅저벅.
작고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관목 저편에서, 키 큰 남자가 들어섰다. 토끼 케이지를 든 헝클어진 금발의 남자.
곧 열아홉 살이 되는 키제프는 완연하게 어른티가 폴폴 났다. 날이 갈수록 선이 굵어지는 몸과 목소리, 분위기마저도 눈길을 사로잡는 남자로 자라고 있었다.
반면에 루시엘은 아직도 열다섯 살의 보송한 소녀라 빨리 크는 그가 부러웠다.
그 모습마저도 잘생겨 보인다는 건 조금…… 콩깍지인가?
“……키제프?”
가벼운 셔츠에 베스트 차림을 한 키제프는 안경도 그대로 쓰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일하다가 잠깐 온 모양이었다.
“바쁘다면서?”
“아무리 바빠도 부인 얼굴 볼 시간은 있지.”
키제프의 붉은 눈이 한결 애틋함을 담으면서 루시엘에게 다가와 뺨을 가볍게 댔다.
두근.
루시엘이 가볍게 뛰는 심장을 누르는 사이에 키제프는 토끼를 슥 가로채서 보드라운 털을 매만졌다.
그동안 아기 눈토끼는 제법 자라서 이제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성장했다.
“얘 제법 많이 컸는걸.”
“아, 그 애한테 이름을 안 지어 줬네. 계속 눈토끼라고 불렀어. 토끼야, 미안.”
“괜찮아. 내가 엘이라고 지어 줬으니까.”
토끼를 안은 채로 루시엘의 옆에 앉은 키제프가 말했다.
“잠깐? 엘이면 그거 내 이름 끝 자잖아.”
“맞아. 널 닮았으니까.”
키제프의 눈빛이 한층 루시엘을 진하게 담았다. 요즘 가장 좋은 건 루시엘의 얼굴이 활짝 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모든 일이 끝났으니 진정한 휴식이었다.
오늘 루시엘이 혼자서 여유롭게 홀가분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에바에게 전해 들어서 최대한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보고 싶어서. 저 말갛고 뽀얀 얼굴을 하루라도 안 보면, 이제 살 수 없을 테니까.
키제프는 눈토끼를 푹신한 케이지 안에 다시 넣어 주고는,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오늘 레이놀드의 처형이 있다는군.”
“알고 있어.”
“가 볼 수도 있었잖아.”
루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길게 내린 은발을 쓸며 말했다.
“아니야. 그만 보고 싶은걸. 내 인생의 책자에서 그 페이지는 찢어 버린 지 오래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루시엘은 한결 성숙하고 어른스러워졌다.
“그래, 앞으로는 키제프 폰 벨슈타인의 페이지로만 채워 줄 테니까…….”
키제프의 눈빛이 뜨겁게 타오르더니 귓가에 속삭이며, 그녀를 품에 깊숙이 안았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한 시선이 얽히면서 그의 단단한 몸이, 매끈한 턱이 다가왔다.
열이 오르는 그의 심장이 높다랗게 쿵쿵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키제프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자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엘이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그를 살짝 밀어낸 다음 말했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으로 먼저 채울 거야.”
“……그거야 당연히.”
그러곤 루시엘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열린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루시엘의 심장도 쿵쿵 큰 소리를 냈다.
키제프도 그녀를 놓치지 않고, 말랑한 입술을 지그시 꾹 눌렀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가도, 아직 루시엘이 성인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못내 아쉽기만 했다.
‘어른의 키스는 조금 더 아껴 둘게, 루시엘.’
파앗.
또롱, 또로롱.
스피넬과 페어리 하트가 만들어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며, 키제프는 가볍게 풀어진 입술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촉촉한 감촉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키스의 여운이 사라기도 전에 키제프의 통신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오후 회의 준비하라고 연락 온 것 같네.”
키제프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모처럼 루시엘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방해받았다.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부인을 두고, 돌아가서 다시 일해야 한다니 키제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루시엘의 부드러운 손에 제 손을 엮고는 중얼거렸다.
“하…… 몰라. 안 가. 차라리 날 죽이라고 해.”
자신의 손을 놓기 싫어하는 키제프의 팔을 흔들며 루시엘이 먼저 말했다.
“키제프, 해야 할 일들을 어서 처리해야, 쉴 틈이 더 날 거야. 다음 달 네 생일에 마법제 구경하러 가기로 했잖아.”
“……알고 있어.”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해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키제프, 나는 네가 정무에 집중할 때가 너무 멋있는걸. 나 아무래도 일 잘하는 남자가 이상형인가?”
루시엘이 순진한 척 눈망울을 굴리며 말하자, 키제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간다.”
돌아서던 키제프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그리고 내년 여름쯤에는 유리 온실 건축 사업이 완공될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완성되면 정말 근사할 거야.”
막스와 갈리우스 백작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루시엘도 간간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도 기대되는군. 우리가 상상한 것들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분명 황성에서 가장 멋진 장소가 될 거라고 자신해. 이제 얼른 가 봐, 키제프.”
“응, 오늘은 같이 자는 거다?”
“알았어, 이따 봐.”
키제프가 토끼 케이지를 들고는 온실을 나갔다. 루시엘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문득 시간의 책에 가 볼까 생각이 들었다.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품고 있었지만, 여유 없이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던 터였다.
그때였다.
루시엘의 통신구가 울렸다. 뜻밖에도 엘링턴이었다. 얼른 받아 보니, 그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엘링턴, 무슨 일이에요?”
―아가 마님, 노아의 여동생이 있는 수녀원을 알아냈습니다만, 그녀의 아버지인 자작이 찾아내서 도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정말요? 하지만 노아는 지금 훈련소에 들어갔잖아요.”
지난 여름 스콰이어 검투 대회에 참가했던 노아는 기적적으로 우승했다. 기사단 동료들과 매일 훈련하고, 무엇보다 루시엘 모르게 키제프도 그의 상대를 해 준 모양이었다.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검투 대회 주최 측에서는 노아에게 더 우승 특전으로 큰 제안을 주었다.
바로 일 년 후에 열리는 다른 무투 대회에 참가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넉넉한 후원금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스콰이어 검투 대회보다 규모가 더 큰 대회로, 세계의 검사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나가기 위해, 훈련소에 들어와서 추가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노아는 루시엘과 상의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먼 곳으로 훈련을 떠났다.
‘반드시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대회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아가 마님을 지킬 수 있는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루시엘도 꿈을 위해 달려가는 그를 응원하며, 보내 주었다. 잠시 노아를 생각하던 루시엘은 엘링턴에게 답했다.
“노아와는 지금 연락할 수단이 없을 텐데…….”
―제가 주최 측에 연락했고, 노아도 우선 벨슈타인으로 귀환 중입니다.
“아, 역시 엘링턴. 잘하셨어요. 좋아요, 그럼 노아가 도착하는 대로 같이 여동생을 만나러 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