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예에? 가,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 루시엘은 요정이라 그렇소. 허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드레아가 허락하자, 루시엘이 지팡이를 꺼내 피닉스와 아르제온을 소환했다.
화려한 금빛 불꽃이 타오르면서 피닉스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루시엘. 이 미남은 누구지?”
“안드레아 추기경님이에요, 피닉스. 간단한 협조 부탁해요. 저기 동쪽으로 가서 서 줘요.”
“호…… 알았다.”
안드레아를 보며, 금빛 눈동자를 굴리던 피닉스는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고, 이어서 아르제온도 눈송이를 폴폴 날려 분위기를 잡으며 등장했다.
“……루시엘, 언제 부르나 기다렸다.”
“……저놈은 안 불러도 됐는데. 네가 준 이터널의 얼음의 힘이 강하니까.”
키제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아르제온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얼음의 심장에 비할 바는 아닐 텐데?”
“…….”
“……얄밉게 입 그만 털고, 쉿 해라, 아르제온.”
길리아트도 지팡이의 거리가 닿았더라면, 아르제온을 한 대 쥐어박았을 터였다.
“자, 다들 그만해요. 이제부터 블루 익스큐션에서 악마를 소환해야 하니까.”
그리 말한 루시엘은 살짝 심호흡했다.
동시에 권속을 둘이나 소환하니, 힘이 많이 든 탓에 다소 숨이 가빴지만 시클라인에게 치료를 받은 후로, 루시엘의 마나는 몹시 안정적이었다.
다시 자리를 재정비해서 불의 힘은 피닉스가, 얼음의 힘은 아르제온이, 바람은 키제프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내 나무 속성은 땅의 상위 속성이로구나.”
길리아트는 자신이 들고 있는 토파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그렇네요.”
사방을 둘러보던 안드레아가 네 속성의 힘을 확인하고, 사제 홀을 이용해 성수를 뿌렸다.
그러자 성수를 뿌린 그대로 바닥이 하얗게 빛을 발하면서 사각형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안드레아가 가운데에 블루 익스큐션을 놓곤 루시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자비는 그럼 저와 같이 익스큐션을 소환하는 주문을 외웁시다. 이 안에서 악마가 등장할 수 있으니, 일단 저 경계선 바깥에서 합시다.”
루시엘은 긴장 어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드디어 악마를 마주하게 되는구나.
곧이어 안드레아가 마법 주문을 외웠다.
“오래된 칼날의 틈새에 비집어 든 어둠의 종마여. 모습을 드러내라. 이 이름이야말로 네 목을 옭아매는 칼이 되고, 심장을 겨누는 화살이 될지어다!”
쿠구구궁.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사각형으로 그어진 안에서 거대한 소환진이 생성되며 바닥이 뒤흔들렸다.
번쩍!
푸른빛이 하늘에 번쩍였다.
블루 익스큐션이 뿜어내던 검푸른 아지랑이가 주변의 대기로 흩어졌다. 사뭇 무거워진 공기에 모두가 바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오오오.
그 안에서 시커먼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양의 뿔, 염소의 발굽, 사자의 몸과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악마였다. 기이하게도 얼굴만은 인간이었다.
황소만 한 덩치를 지닌 터라,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드는 외견이었다.
쿵. 쿵.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블루 익스큐션의 그것과도 같은 푸른 안광을 뿜으며, 자신을 불러낸 자들을 주욱 살폈다.
그러곤 허공을 향해 포효음을 외쳤다.
크아아아아으!
실로 천지를 울릴 듯했다. 기선 제압이라도 하는 듯한 행위에, 모두 움찔 떨었으나 길리아트는 미간을 좁히며, 지팡이로 바닥을 쿵 내리찧으며 호통을 쳤다.
“이노옴-!! 사악한 악마. 우리는 네 놈을 끝내러 왔다.”
“……큭큭, 어리석은 인간이여. 용감함만은 칭찬해 주마.”
동굴 같은 목소리가 왕왕 울리더니, 악마가 블루 익스큐션을 조종한 모양인지 검이 멋대로 움직여 동서남북에 서 있는 네 명을 공격하려 했다.
스윽!
푸른 칼날이 회전하며 날아다녔고, 네 방향을 이리저리 겨누며 쏘다녔다.
“빌어먹을.”
팅!
키제프가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이터널을 휘둘러 블루 익스큐션을 쳐 냈다.
“안에 들어가서 끝장내는 건 안 됩니까?”
“……그건 안 돼. 악마도 결계를 무너뜨리려는 것 같아, 다들 조심해요!”
루시엘이 다급히 말하자 안드레아 추기경도 고개를 주억였다. 루시엘 말대로 결계의 네 명만 공격하고, 루시엘과 안드레아는 공격하고 있지 않았다.
“맞습니다. 결계가 무너지면, 이놈의 힘이 더 세질 겁니다. 우선 제압해서 묶어 놓고, 세 번 호명하여 처단합시다.”
블루 익스큐션이 계속해서 어지럽게 날아다니자 아르제온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 거슬리는 칼날부터 얼리는 게 낫겠는데?”
“좋은 생각이야, 아르제온!”
이어서 아르제온은 제게로 날아오는 블루 익스큐션을 향해, 주문을 시전했다.
“아이스 캐논(Ice cannon).”
이어 날아간 시푸른 광선이 블루 익스큐션을 얼리자 검이 얼어붙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고, 마검이 얼음을 파사삭 깨고 다시 허공을 헤집고 다녔다.
휘익!
“윽…….”
뒤이어 복수하듯 칼날이 아르제온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젠장, 이 미친 마검이 나만 공격하는데? 도와줘!”
“……슬로우(Slow).”
키제프가 아르제온을 한심하게 보며, 마검의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마법을 걸었다.
이내 악마가 가소롭다는 듯, 발을 쿵쿵 굴렀다.
쿠구구구.
땅이 갈라지려 하자, 루시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추기경 님! 어쩌지요? 악마와 싸워야 하나요?”
“성수로 그린 사각형 밖으로는 나오지 못할 겁니다. 우선 각자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혹시 악마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할 마법을 알고 계십니까?”
“묶어 두는 마법이라면 바인드(Bind)라는 마법이 있소만. 저놈에게 먹혀들지는…….”
길리아트가 답하는 사이 악마가 외쳤다.
“어리석은 인간들, 나를 귀찮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쿠오오!
쿵쿵쿵.
악마가 발을 구르며 결계를 부수려 사방을 헤집고 길길이 날뛰었다.
‘더 폭주하기 전에 빨리 막아야만 해.’
루시엘은 악마를 노려보며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바인드를 악마에게 걸어 주세요. 저도 페어리 문을 써 볼게요.”
루시엘의 제안에 모두가 일제히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파아아.
푸르게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길리아트, 키제프, 아르제온이 차례로 영창하자 마법이 연결되었다.
바인드의 투명한 빛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악마의 다리부터 묶었다.
루시엘도 함께 바인드를 외운 다음, 페어리 문 반지에 마나를 흘렸다.
촤아아악!
끝도 없이 길게 늘어난 페어리 문의 금빛 사슬이 번쩍이며, 악마의 몸통을 단단히 조였다.
그러나 악마가 몸을 뒤틀며 체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오히려 루시엘이 끌려갈 듯했다.
“……으, 강해!”
“루시엘!”
기어이 루시엘이 결계 안쪽으로 질질 끌려가려 했다. 악마의 시커먼 눈동자가 루시엘을 살폈다.
“재미있군. 요정이 있었다니?”
그 순간.
결계를 포기할 수는 없고, 루시엘이 걱정되었던 키제프가 이터널을 던졌다.
“……끄아악!”
머리통을 얻어맞은 악마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휘리릭!
재빨리 다시 결계 밖으로 도망쳐 나온 루시엘은 한 손으로 다시 페어리 문의 사슬로 악마를 칭칭 감았다.
“지금이에요, 빨리!”
안드레아가 서둘러 악마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성수를 던져 적신 후, 루미티어스를 손에 쥔 채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악신의 종. 너의 이름을 부르노니, 파멸을 선고한다. 메피스토 펠……!”
“그. 그만……키에에엑!”
“꺄악!”
마지막으로 악마가 발악하며 시커먼 날개를 퍼덕이자, 손목이 꺾이는 것처럼 아파왔지만 루시엘은 마지막을 위해 꾹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공자비!”
“루시엘!”
“계속해요, 계속…… 멈추지 말고. 제발.”
체인의 사슬을 허리띠로 바꾸고 루시엘은 밤하늘의 달처럼 환한 페어리 문을 허공으로 띄웠다.
힘겨운 이 순간, 루시엘의 머릿속에 요정의 노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진실한 심장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별, 악은 사라지리.」
그래, 지금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마음. 진심을 다해 기도하자. 악마가 사라지기를.
‘모두가 행복할 수 있게…….’
루시엘은 눈을 꼭 감고 다시 한번 기도를 청했다.
영롱한 페어리 문이 빛나며, 루시엘에게 힘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심장에서 뽀그르르 올라오는 마나의 작은 흐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모으기 시작했다.
이어 악마의 검푸른 기운이 물러가고 주변 일대에 요정의 맑은 마나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루시엘의 깨끗하고 투명한 마나로.
파아아아!
또롱, 또로롱.
촤르르!
그녀의 주변으로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그동안 만들었던 열두 개의 모든 보석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꿈같은 몽롱한 풍경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루시엘은 악마가 방심한 틈을 타서 안드레아에게 재촉했다.
“추기경 님!”
“악신의 종. 너의 이름을 부르노니, 파멸을 선고한다. 메피스토펠레스, 메피스토펠레스, 메피스토펠레스!”
드디어 호명을 마치자, 안드레아와 루시엘, 지켜보던 모두가 일순 잠자코 벌어지는 일을 눈에 담았다.
콰과가가가!
번쩍!
“크아아아악!”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검은 몸체가 속에서부터 타오르면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악마의 형체가 모두 사라진 다음에는 비로소 마검 블루 익스큐션이 빛을 잃고 녹슬면서 쩡, 하고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카일라의 원혼이 담겨 있던 구슬도 허무하게 바닥으로 낙하하더니 파삭, 하고 깨졌다.
“……해냈어요, 우리가.”
루시엘은 꿈처럼 현실 감각이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제야 결계를 유지하느라, 루시엘에게 다가오지 못하던 키제프가 가장 먼저 갑주를 벗어던지고 달려왔다.
“……루시엘!”
루시엘은 키제프의 너른 가슴에 안겨서 눈을 꼭 감았다.
“……마지막에 잘 버텼어.”
“응, ……진실한 심장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별, 악은 사라지리. 그 요정의 노래 구절을 떠올리며 기도했어. 겨우 파괴할 수 있었어.”
루시엘은 아직도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그녀의 떨고 있는 몸을 도닥이며, 키제프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어느새 루시엘의 주변으로 모두가 모였다.
뒤이어 루시엘은 길리아트와도 와락 껴안았다.
“할아버지, 정말 애 많이 애쓰셨어요.”
루시엘은 어느새 눈가에 퐁퐁 올라온 눈물을 닦아 냈다.
“그래,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마검을 파멸시켰구나. 네 보석이 쏟아지는 모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다. 네 요정의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공기마저 한결 상쾌해졌구나. 마치 세상을 정화시킨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진심으로 힘을 합쳐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정말로 고마워요.”
“나는 제법 재미있었단다.”
피닉스도 활짝 웃었고, 아르제온은 자신의 공은 안 챙겨 준다며 투덜거렸다.
모두 긴장이 탁 풀려 대화를 나누는데, 안드레아만이 자못 조용히 웃었다.
“안드레아 추기경님이 안 계셨더라면, 오늘 마검을 이렇게 수월하게 파괴하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건 제가 할 말이었습니다. 세상을 평화롭게 지키는 일에 함께 한 것 같아서 감회가 남다릅니다. 지금 보니, 벨슈타인이 왜, 악당가로 소문이 났는지 모를 일입니다.”
안드레아가 빙그레 웃으며 그리 말하자 두 명의 벨슈타인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했고, 한 명의 벨슈타인은 맑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음, 그건 비밀이에요!”
루시엘은 함께한 모두와 시선을 맞추면서 인사를 전했다. 마음을 짓누르던 많은 일들이 사라진 탓일까.
루시엘의 심장은 모든 일을 마친 뿌듯함과 후련함으로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걸쳐 그토록 그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던 마검 블루 익스큐션.
그 검을 파괴한 오늘을 루시엘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벨슈타인가의 역사의 기록 한 페이지에도 길이 새겨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