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웃음을 베어 문 레이놀드가 예배당 안의 루시엘 인형에게 접근하기 위해 들어갔다.
한번 부추겨 주니 레이놀드는 우쭐해져선 자신을 손에 넣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설레하고 있었다.
그걸 직접 보자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루시엘은 인형 루시엘에게 마음속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금 레이놀드 황자가 들어갈 거야, 시작해 줘. 루시엘,’
그러곤 통신구를 켜서 공작에게도 알렸다.
“아빠, 인형이 곧 레이놀드를 두 번째 테라스로 유인할 거예요.”
―그래, 보고 있다. 저놈의 어디부터 분질러 놔야 속이 풀릴까.
“아직은 안 돼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레이놀드는 아빠가 계시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자리를 잠깐 피해 주세요.”
당장이라도 황자를 찢어발기고 싶으나 그러지 못한 공작의 긴 신음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자 루시엘은 안도의 숨을 잠시 내쉬었다.
이내 영상석에서 인형 루시엘과 레이놀드가 한 장면에 잡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아가 다가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카일라와 완전 똑같았습니다.”
“그랬담 다행이야. 목소리까지 같아져서 더 쉽게 흉내 낼 수 있었어.”
사랑하는 벨슈타인 가족을 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레이놀드에게 안심을 주는 동시에 부추겨 벨슈타인이 짜 둔 판으로 유인해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다음은 마검을 살필 차례야.’
안드레아 추기경을 만나야만 한다. 루시엘이 정원의 풀밭을 내려다보다가 넝쿨 벽 뒤에 숨어 거울을 꺼냈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루시엘이 눈동자를 굴리자 노아가 말했다.
“이제 캐서린을 불러올까요?”
“맞아. 노아도 이제 착착이네.”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끄덕이자 노아가 곧 캐서린이 정원으로 불러 주었다.
“……아가 마님. 부르셨어요?”
“캐서린, 추기경님을 따로 만날 시간을 만들어 주세요. 그가 마검을 파괴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반드시 만나야겠네요! 음…… 다만 지금은 추기경님이 자리를 뜨기 애매하니, 살짝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러야겠어요.”
캐서린은 미소 짓자, 루시엘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경스러운 짓이요?”
“추기경님 옷에 포도주를 쏟아서 마법 매거진을 체험시켜드린다고 핑계를 대 보도록 하죠.”
과연 테일러다운 발상이었다.
“아!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제 별궁으로 모셔 와 주세요.”
“네, 아가 마님,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고 있답니다.”
“저도요.”
루시엘은 캐서린과 손을 맞잡아 주고는 별궁으로 총총 이동해 다음을 준비했다. 통신구에 클로디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자비, 궁금해서 목이 빠지는 중이랍니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클로디아 황녀님, 다행히 아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루시엘의 대답을 들은 클로디아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그렇군요. ……도 ……중이랍니다. 레이놀드가 돌아올 곳은 하나밖에 없지요. 힘내요, 루시엘.
‘황녀님의 말을 들으니 황실 측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야. 이제 정말 끝이 멀지 않았네, 레이놀드.’
루시엘은 안도하며 클로디아와의 통신을 마치고 별궁으로 향했다.
* * *
하고 많은 이들 중에서 하필 제 앞에 손수건을 떨어뜨린 이유라면 자명했다.
손수건을 움켜쥐며 입매를 말아 올린 레이놀드는 사뿐 걸음을 옮기는 하얀 발만 보았다.
이건 분명히 저에게 와 달라는 은밀한 신호였다.
‘앙큼하긴. ……기가 막히는군, 그래, 너도 날 기다렸다 이거지. 그 꿈은 정녕 진짜였어.’
그러나 바로 쫓아갈 순 없었다. 레이놀드는 흥분을 억누른 채 서둘러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지 살폈다.
운 좋게도 벨슈타인 것들도 보이질 않고, 추기경이나 신관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느라 바쁜 듯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레이놀드는 괜스레 예배당 앞 주신의 석상 앞에서 기도를 드린 다음, 루시엘이 기다릴 두 번째 테라스로 들어갔다.
헛된 망상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서.
테라스에는 루시엘이 저를 돌아보면서 커다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보석안이라고 했던가? 실로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한 눈이다.’
“……공자비. 그대가 나를 먼저 찾을 줄은 몰랐는데.”
입매를 비튼 레이놀드가 짙은 보라색 눈을 굴리며 다가왔다.
“황자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내숭은 필요 없어. 루시엘, 그날 꿈에 나를 찾아와 홀려 놓고 갔잖아. 아, 그리고 신전 맞이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했지.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어.”
‘크리스털 페어리, 너를 내 손에 가질 날을!’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루시엘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굴렸다.
이제 와 모른 척인가. 그러나 레이놀드는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꿈을 기억하고 있겠다고 했었지. 오늘 내게 대답도 해 주기로 했잖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응?”
레이놀드가 한 걸음 다가가자, 루시엘이 뒤로 물러나며 테라스 아래 계단으로 걸어갔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거짓말. 그럼 이딴 수작은 뭐였지……?”
레이놀드가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그건 실수였을 뿐이에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상관없겠군. 내가 그댈 원하는 건 변함없을 테니까.”
루시엘이 은빛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어쩌려는 거지요?”
“내 계획을 안다면 깜짝 놀랄 거야. 루시엘, 내게로 와. 그래, 오늘 밤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건 어떨까? 아주 자세히 들려줄 테니까. 내 계획뿐 아니라 그대의 계획도 듣고 싶거든.”
“계획이라니?”
“벨슈타인을 끝내고, 나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거다. 내 손으로 직접! 그러니 이혼하고 순순히 내게로 와.”
레이놀드가 루시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게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내 레이놀드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멈췄다. 그러곤 가소로운 듯 웃음을 흘렸다.
“큭. 이번에도 몸에 발동되는 마법이라도 있나?”
“…….”
“그대는 공작 부인보다는 더 높은 곳에 어울리는 여자야. 정확히는 내 옆이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레이놀드의 말에 루시엘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리석은 레이놀드.’
지금 녹음구를 통해서 그가 하는 말들이 예배당 안쪽에 설치된 통신구를 통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디아가 마련해 놓은 통신구를 통해, 황실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걸 듣는 순간 모두 뒤집어질 것을 기대하며, 루시엘과 벨슈타인이 함께 도모한 일이었다.
표정을 바꾼 루시엘이 손을 들어레이놀드의 뺨을 때렸다.
짜아악!
“……이 이상 절 모욕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누가 뭐래도 제 남편은 벨슈타인 공자뿐이에요.”
뺨을 맞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놀드가 광기 어린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쿡쿡. 상관없어. 루시엘, 넌 반드시 내가 가질 테니.”
그 반응에 더 애가 닳은 레이놀드는 기어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싫어! 꺄아악!”
그 순간 주변에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공기가 깔렸다.
파아아아!
분노를 넘어 서늘하게 굳은 공작이 형형한 눈을 굴리면서 나타났다.
이미 내뿜고 있는 살기가 실로 폐부를 뚫을 정도의 냉기로 휘돌았다.
“……내 며느리에게 무슨 짓인가, 황자! 제아무리 황족이라도 이번 일은 참을 수가 없군. 그 아이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용서가 되질 않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루시엘, 네가 감히 나에게 함정을 판 것이냐?”
분노하며 루시엘의 이름을 부르짖던 레이놀드를 향해, 공작이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갔다.
움츠려 있던 인형 루시엘은 마침 허리춤에 있던 가넷의 힘이 다해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루시엘을 안아 올리며 공작 부인 솔리아페와 이벨린도 맹비난했다.
“제국의 황자가 실로 이런 불경스럽고 망측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런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썩은 가지를 자르지 않으니, 이렇게 되었구나. 황자, 우리 벨슈타인을 건드린 죗값은 달게 받을 것이란다.”
“……나 또한 결코 용서치 않겠다!”
공작은 눈을 스산하게 내리깔며 얼음을 섬세하게 깎아 놓은 듯한 날카로운 지팡이 끝을 황자에게 겨누었다.
“아무리 그런들. 감히 제국의 황자인 저를 어쩌실 겁니까.”
레이놀드는 제 신분을 믿고 오만하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 건방진 모습에 공작은 말을 아꼈다.
‘그 더러운 속내를 더 지껄여 보도록.’
몇 번이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놈이지만, 구석구석에 설치된 녹음구와 영상구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고 있었다.
이미 레이놀드 황자가 공자비를 추문하고 벨슈타인을 모욕하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가 듣게 된 것이다.
“……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레이놀드 황자가 저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까 그 말은 반역이 아닙니까.”
신관들이 그리 수군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아앗.
콰아앙!
공작이 애꿎은 예배당 벽과 테라스를 부수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직은 황족의 신분이니까, 정식 결투로만 그에게 폭력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이내 테라스 밖 정원에서 황자와 공작이 대치하는 소란이 생기자 삽시간에 사람들이 모두 몰려갔다. 사방에서 난리가 난 가운데 은빛 갑주를 입은 그대로 키제프가 예배당을 지나 테라스 앞 정원으로 나타났다.
황자를 노려보고 있던 공작에게 키제프가 다가서며 물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많이 늦었다. 내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중이거든.”
“……지고하신 황자 전하께서 내 아내와 벨슈타인을 모욕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 황자의 언행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짓. 벨슈타인과 루시엘의 명예를 위해, 목숨도 바칠 것이다. ……네가 하겠느냐, 아비인 내가 할까.”
“당연히 제 몫입니다.”
스르릉!
키제프는 사납게 황자를 노려보며 이터널을 뽑아 들었다. 형형한 붉은 눈에 대조되듯, 잘 벼려진 푸른 칼날이 빛났다.
“레이놀드 데 세이블 헨드릭 황자. 나 키제프 폰 벨슈타인이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키제프가 일렁이는 붉은 눈을 빛내며, 바닥에 검을 내리꽂고는 끼고 있던 장갑을 내던졌다.
그걸 지켜보던 레이놀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재밌군. 명예 결투를 선택하겠다는 것인가? 좋다. 공자. 하면 이 결투에서 내가 이기면 너를 죽이고, 루시엘은 내가 차지하겠다.”
그리곤 뻔뻔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만 결투는 내일 아침이 좋겠소. 내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레이놀드는 머릿속으로 제 어머니 카일라를 다시 만날 생각을 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밤에 어둠의 심장과 처형 검으로 벨슈타인을 쳐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 일을 벌이지 못한다고 해도 공자 놈의 저 검은 심상치 않아 보이니, 자신도 마검을 들어야만 싸움에 승산이 있을 터였다.
“……좋습니다. 결투는 내일 오전 8시로 하지요. 어떤 검을 가져와도 소용없을 겁니다.”
키제프가 ‘어떤 검’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며 레이놀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들려온 소식에 의해 레이놀드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자르가 단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공작에게 고했다.
“……황실 기사단이 벨슈타인으로 오고 있다 합니다.”
“황실 기사단이 무슨 일인가?”
공작이 고개를 들어 묻자, 자르가 단장이 황자를 경멸하듯 보며 말했다.
“레이놀드 황자를 반역죄로 체포하기 위해서랍니다.”
“……무, 뭐, 뭐라고?”
고개를 가로젓던 레이놀드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어났다. 사실을 확인한 공작이 눈을 내리깔며, 자르가와 그가 이끌고 온 검은 날개에게 명했다.
“뭣들 하나. 우리 벨슈타인은 황실의 반역죄인을 체포하는 일에 적극 협조한다. 황자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