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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73)화 (273/282)

<273화>

악마궁의 금고 안으로 들어선 길리아트는 침음을 흘렸다.

카일라의 원혼이 담긴 검은 구슬이 블루 익스큐션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선택지는 둘이었다.

악마를 직접 만나 거래하거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마검을 버리는 것.

자신이 악령으로 변한다면 그것 또한 가족들에게 큰 상처와 피해를 주는 일이 될 터.

‘차라리 깔끔하게 두 번째가 낫겠구나.’

고뇌를 마친 길리아트는 깊어진 눈으로 요망한 마검을 등에 짊어졌다.

그러곤 품에서 붉은색 포탈석을 꺼내 깨뜨렸다.

점차 범위를 넓혀 가던 붉은 액체를 바라보며, 길리아트는 류프델의 말을 회상했다.

‘도무지 파괴할 수 없다면, 마계의 화염 구렁텅이로 가서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의 불꽃은 모든 걸 녹여 없애 버릴 테니.’

이내 완성된 포탈 안에서는 지옥에 가까운 화염의 열기가 벌써부터 일렁이며, 혀를 날름거렸다.

저기에 들어가면 다시는 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완벽하게 검을 처리할 방법은 없겠지.

길리아트는 다시금 등에 짊어진 마검과 카일라의 원혼, 그리고 자신을 떨어지지 않도록 결박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파아앗!

이윽고 끔찍한 불 구덩이의 세계로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쾅!

문이 거세게 열렸다.

“할아버지, 안 됩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키제프가 열기를 토하는 이동포탈을 보고 본능적으로 가로막았다.

“키제프. 예배당에 가질 않고 왜 여기로…….”

길리아트가 고개를 들었고, 어느새 그의 몸을 살피던 키제프가 상황을 살폈다. 기이한 포탈이 열려 있고, 마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걸 보니 알 만했다.

“……금방 돌아오시겠다고 했잖습니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길리아트는 가라앉은 탁한 눈으로 키제프를 밀쳤다.

“비키거라. 키제프. 이 마검은 내가 반드시 처리할 거다.”

“안 됩니다.”

포탈일 뿐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밖까지 치솟고 있었다. 그런 곳을 자진해서 간다는 건 아무리 그라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포탈에 들어가려는 할아버지를 뒤에서 붙잡으며,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키제프가 힘겹게 말했다.

“그만두고 제발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윽…… 마검을 파괴할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요. 예?”

“뭐라고?”

놀란 길리아트가 움직임을 멈추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릉.

키제프가 재빨리 냉기를 머금은 이터널을 휘둘러, 붉게 일렁이는 화염의 포탈을 겨우 해제시켰다.

“……이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겨우 숨을 몰아쉰 키제프가 말했다.

* * *

형체를 드러낸 레이븐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루시엘, 키제프의 부탁으로 왔어. 키제프는 지금 네 할아버지를 막으러 갔으니, 일단은 안심해.”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레이븐의 입으로 재차 듣게 되자 일단 안심이었다.

“……응. 다행이야. 제발 할아버지께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

루시엘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근데 부탁이라고?”

“그래. 블루 익스큐션에 깃든 악마를 없앨 방법을 알려 주라고 협박하더군.”

“잠깐. 레이븐이 그걸 알고 있었어?”

그의 말에 놀란 루시엘이 레이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레이븐은 흑발을 매만지며 말했다.

“……악마의 이름을 알아내면, 마검을 파괴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 기밀이거든. 대신에 아는 자가 있어. 안드레아 추기경. 그에게 가 봐.”

레이븐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루시엘은 그제야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악마의 이름이라……. 알겠어.”

“루시엘, 너라면 잘 해낼 거야. 무려 키제프가 나에게 협박을 하게 만들다니. 넌 진짜 대단한 여자라고……! 추기경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 얼른. 시간 없다!”

“……응, 맞아. 이럴 때가 아니야.”

그의 말대로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알려 줘서 정말로 고마워. 레이븐.”

“이 은혜는 따따블로 이자까지 쳐서 초콜릿으로 받을 거야.”

“그럴게. 저기 서랍장에 초콜릿이 약간 있으니 일단 그거라도…….”

“오케이. 접수하지.”

레이븐이 서랍장에서 초콜릿을 가져간 다음 모습을 감췄다.

루시엘은 다시금 주먹을 쥐며 진홍빛 눈을 빛냈다.

‘그래, 여기까지 왔어. 카일라를 속이고 처치하는 것도 완벽히 끝냈는걸. 남은 일들도 무사히 마무리하려면 다시 정신 차려서 힘내자, 루시엘.’

공작성 안에는 아직 레이놀드 황자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전생의 모든 원한을 갚아 줄 대상이.

사악한 마검을 파괴하고, 악독한 레이놀드까지 사라져야 진짜로 끝이었다.

‘……추기경을 만나기 전에 우선은 할 일이 있어.’

루시엘은 영상구로 제 마나와 연결된 인형 루시엘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피아노 반주가 끝나고 루시엘은 공작 부부와 이벨린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영상구를 통해서도 인형 루시엘을 향해 자안을 빛내는 레이놀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예상대로라면 레이놀드는 자신과 따로 만날 틈을 엿볼 것이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테니까.’

루시엘은 마나를 사용해 인형에게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잘해 주고 있어, 루시엘. 신전 맞이 기념식의 순서가 끝나고 내가 거기로 갈 거야. 다시 신호를 줄게. 그럼 예배당의 긴 테이블로 가서 음료를 마시는 척 레이놀드 앞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려. 그리고 예배당과 이어진 두 번째 테라스로 이동해 줘.’

‘네.’

인형이 마음속으로 대답을 전해 왔다. 혹여나 가넷이 중간에 떨어지면, 캐서린에게 갈아 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좋아, 이제 레이놀드를 속이러 가 보아야겠어.’

루시엘은 별궁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는 노아를 불렀다.

“노아, 한 가지 더 도와줄 수 있을까?”

“아가 마님. 아, 하지만 소공작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노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키제프, 그런 말도 해 뒀었구나. 내가 걱정되어서 감정에 휘둘려 조급하게 움직일까 봐 그랬던 모양이야.’

루시엘은 내심 키제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키제프 쪽에서 연락을 받았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나 괜찮아. 아까는 너무 걱정되어서 불안했거든. 봐, 이젠 안정됐어.”

노아가 보기에도 루시엘은 이제 괜찮아 보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보석안이 총기로 반짝 빛나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실은 아가 마님을 기다렸거든요.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노아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나의 기사니까. 항상 도움이 되고 있어.”

루시엘이 밝게 웃으며 그리 말해 주자, 노아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우선 고위 신관복이 한 벌 필요한데…….”

“아, 그거라면 테일러 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게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좋아, 그럼 노아는 가서 신관복으로 갈아입고 나랑 예배당 입구에서 만나.”

“옙.”

두 사람은 결연하게 뜻을 다지듯 눈빛을 교환했다. 루시엘은 블랙 다이아몬드를 다시 꺼내 들고는 화장대 앞 거울로 향했다.

‘이 얼굴로 변하는 건 정말 싫지만…….’

신관복을 입은 카일라로 변신을 마친 루시엘은 통신구로 해당 사실을 몇 사람에게 알렸다.

“좋아. 가자.”

이내 예배당으로 신관복을 입은 두 사람이 들어갔다.

장내는 기념식이 끝나고 약간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벨슈타인이 마련해 준 잔치를 즐기는 신관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자, 잔을 듭시다.”

신관들과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면서도 레이놀드는 루시엘의 행적을 눈으로 뒤쫓았다.

눈엣가시이던 그녀의 남편 벨슈타인 공자도 보이지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둘만이 있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접근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는 벨슈타인 공작이 아직 있었다.

“……오랜만이오, 레이놀드 황자. 신전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

마침 공작이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청했다. 아까 느낀 그 서늘한 시선이 생각났으나, 지금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레이놀드는 과거 벨슈타인이 공작이 제게 준 수모를 결코 잊지 않았다.

“많은 걸 보고 듣고,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반성의 시간을 잘 보낸 듯하니 황제 폐하께서 흐뭇해하실 일이오. 모쪼록 잘 즐기시길.”

공작이 느른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멀어졌다.

공작이 있는 한, 루시엘에게 접근할 수 없다. 아니면 예배당 말고 공자비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를 노려야 했다.

그때였다. 이리저리 부표처럼 떠돌던 레이놀드 앞으로, 신관 하나가 다가오더니 건배를 했다.

“황자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그 잔에는 레이놀드가 카일라와 연락할 때 쓰던 것과 비슷한 검은 종이학이 들어 있었다. 아르제온에게 이미 들은 바가 있어, 색깔만 검은 종이학을 미리 구해 놓았다. 움찔 놀란 레이놀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했다.

“……넌 누구냐.”

레이놀드는 가발을 뒤집어쓴 노아에게 낮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어디 계시더냐?”

노아가 예배당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가리켰다. 레이놀드는 루시엘을 놓치지 않으려고 쳐다보면서도, 바지런히 걸음을 놀려 제 어머니로 보이는 신관에게 접근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카일라는 살짝 후드를 내려 레이놀드에게 제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다.

“……!”

틀림없는 어머니를 확인한 레이놀드는 인적이 드문 바깥 정원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어머니, 이 안으로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이 어미가 누구더냐. 몰래 초청장을 베껴서 내밀었더니 금세 통과시켜 주더구나. 멍청한 벨슈타인 놈들.”

“아스트리야 놈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더군요. 아, 곧 해가 지면 어둠의 심장을 확인하러 가야겠습니다.”

“내가 잠깐 확인하고 왔는데 아주 훌륭하게 키웠더구나.”

“거기에 갈아 넣은 신관들의 마력이 얼마인데요.”

“아주 장하다.”

한껏 벨슈타인과 신전을 비웃어 주고 난 그들은 짧은 해후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우리 아드님, 이게 몇 년 만이더냐. 왜 이리 말랐을꼬.”

“……차라리 감옥이 더 나았을 겁니다. 아스트리야 생활은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이제 지겨운 시간은 끝났다. 레이놀드, 나에게 블루 익스큐션은 있으니 이제 공자비만 손에 넣으면 될 터인데…….”

카일라의 입에서 공자비 이야기가 나오자, 레이놀드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어머니, 루시엘은 어쩌면 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름 전 꿈에서 루시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

꿈 이야기를 하면서 공자비를 만나기만 하면, 제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라 말하는 레이놀드를 속으로 비웃으며 진짜 루시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계집애가 싫든 좋든 우리는 손에 넣기만 하면 그만이지. 가서 네 것을 가지고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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