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할아버지가 만일 악마와 거래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자신은 요정의 마나를 지녔으니 버텨 보기라도 할 수 있을 테지만, 할아버지는 카일라처럼 되실 가능성도 있다.
가족들의 버팀목이었던 할아버지를 온전히 마주할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터였다. 루시엘은 입술을 깨물고 땀에 젖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혼자 온 거라면 잠시 여기 있다가 가렴. 그게 안전할 거다. 자, 먹고 싶은 것을 골라라.’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인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었던 분…….
루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기게 두지 않을 거야.’
루시엘은 순간 벨슈타인의 보물고를 찾아가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벨린과 함께 별채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루시엘? 어디 가!”
뒤쫓아 온 키제프가 루시엘의 몸을 얼른 붙잡았다.
“키제프, 하, 할아버지가…… 우리 대신 악마와 거래하려 하실지도 몰라. 그런 눈을 하고 계셨단 말이야.”
루시엘은 할아버지 걱정이 왈칵 올라와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흑, 흐흑.”
“……잠깐만, 루시엘. 우리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무모하게 그러시진 않을 거야. 아까 우리도 너무 감정이 앞서서 생각 없이 거래에 대해 말했어.”
키제프가 루시엘을 도닥여 주며 말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키제프의 말대로 감정이 앞서 있는 건 사실이었다. 루시엘은 조금 감정을 추스르며, 키제프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할아버지에게 가 보아야 하는데……. 신전 맞이의 기념식도 예배당에서 곧 열릴 거야. 어쩜 좋지?”
“거긴 아버지와 어머니가 참석해 계시니 아직은 안 가도 돼. 할아버지는 내가 가서 살펴드릴게.”
“그럼 내가 예배당에…….”
“아냐. 루시엘 넌 별궁에 가서 잠깐 진정하면서 쉬고 있어. 영상구를 통해 지켜봐도 되잖아.”
“응…….”
키제프는 루시엘을 별궁의 침실까지 데려다주고는, 밖에 있던 기사 노아를 불렀다.
“부탁이 있다.”
“예, 하명하십시오.”
“루시엘이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대화해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어디 가지 못하게 하고…….”
“……예?”
뜻밖의 명령에 노아가 까만 눈을 데룩 굴렸다. 언제나 저를 보면 경계하면서 날을 세우던 그가 도리어 루시엘과 대화를 해 달라는 명령을 하다니.
“지금 루시엘은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개 숙이는 노아를 뒤로한 채로 키제프는 은빛 갑주를 입은 그대로 별궁을 나가 벨슈타인의 별채 보물고의 한 곳인 악마궁으로 향했다.
키제프의 눈이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듯, 한없이 가라앉았다.
‘……악마 따위, 내가 가서 막겠어.’
이내 형형해진 붉은 눈을 한 키제프가 어둠 속에서 레이븐을 불러냈다.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움켜쥐며 물었다.
“……캑캑, 야, 왜 이래. 너 뭐 잘못 먹었어?”
날이 잔뜩 선 계약자의 태도에 레이븐은 당황했다. 냉기와 독기가 바짝 오른 키제프의 핏빛 눈이 무감하게 굴렀다.
“……아는 걸 전부 말해. 마검이든 악마든 조져 버리는 법.”
묵직한 힘과 살기가 레이븐을 짓눌렀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고는 하지만, 사신을 위협할 정도의 위압적인 기운.
“캑, 이, 이걸 놔야 말을 하지.”
그제야 키제프가 레이븐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레이븐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착지했다.
그러곤 픽 웃으면서 제법 대견하다는 듯 보았다.
“힘만큼 입도 험해졌네.”
“농담할 시간 없어.”
레이븐이 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은 종종 지울 수 없었다.
카일라를 처치하는 법도 다그쳐서야 겨우 알려 주었고, 악마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원을 해도 대놓고 모른 척 능청을 부렸다.
그러니 이렇게 협박을 할 수밖에.
“……뭔 오해를 하는지 알겠다만. 진정해. 내 선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다 알려 줬어.”
“네가 입을 여느냐 안 여느냐에 따라, 모든 게 걸려 있어.”
“하아……. 진짜.”
레이븐이 키제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그를 어르듯 말했다.
“사신에게도 기밀 유지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선생님. 그걸 어기면 안 된다구요.”
“그럼 사신을 그만두면 입 열거야? 사람 셋 죽이는 거 이제 어렵지 않아.”
어차피 벨슈타인의 지하 감옥에는 당장 죽여 없앨 죄인도 있었다.
“어이, 잠깐. 이 시점에서?”
“……왜. 막상 속박에서 벗어나 죽는다고 하니까 겁나?”
키제프가 레이븐을 다그쳤다.
레이븐이 사신이 아니게 되면, 필멸자로 돌아가게 되고 그는 순리에 맞게 죽을 것이다. 이미 신체의 나이는 수백 살이 넘었을 테니.
그리고 사신의 굴레는 키제프의 차지가 될 터였다. 그만큼 각오를 다진 키제프의 눈이 깊게 불타올랐다.
“……악마의 진짜 이름을 알면 검을 파괴할 수 있어. 난 여기까지밖에 못 말해. 대신에 합법적인 악마 처단자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 보라고.”
“그게 누군데.”
키제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사납게 물었다.
“지금 성에 와 있잖아.”
키제프는 레이븐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전 맞이에 온 신관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 추기경!’
그야말로 악을 처단할 자. 악마의 이름을 알지도 몰랐다. 뒤늦게 키제프가 레이븐의 눈을 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거칠게 대한 건 미안했어.”
“……됐어. 뭐, 우리 사이에.”
레이븐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악마궁의 통로로 들어가기 전 키제프가 말했다.
“……그럼 하나만 더 부탁해. 루시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줘.”
어느새 평소의 키제프 얼굴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한 레이븐이 고개를 주억였다.
* * *
“……주신 레트라논의 축복이 벨슈타인의 땅 곳곳에 닿을 것입니다.”
추기경 안드레아가 무릎을 꿇은 벨슈타인 공작과 공작 부인의 이마에 차례로 손을 대자, 하얀빛이 발했다.
“두 분께 신성력을 사용해 빛의 축복을 드렸습니다. 베풀어 주신 신전 맞이의 작은 보답입니다.”
“고맙소.”
“감사합니다, 추기경님.”
흰색의 말끔한 의복을 갖춰 입은 공작 부부는 그제야 단상 아래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뒤를 이어 교황의 축하 인사를 안드레아가 대신 낭독했다.
성스러운 신전 맞이의 기념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예배당 내에는 긴 테이블 위로 산해진미의 음식들이 차려졌다.
아스트리야에서 지낸 자들은 평생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호화로운 음식이었다. 신전 맞이가 열리는 예배당은 신관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레이놀드도 그걸 지켜보면서 눈으로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온 오라클의 고위 신관이 넌지시 말했다.
“레이놀드 황자님께서도 축복의 말을 전해 주시지요.”
“아닙니다.”
“제국의 훗날을 이으실 분의 귀환이니 빠질 수 없지 않습니까.”
오라클의 신관이 그리 말하자마자, 벨슈타인의 내부 보좌관이 금빛이 도는 두루마리 하나를 든 채로 단상 아래에 있는 공작에게로 가져다주었다.
“황실에서 기념 인사가 도착했습니다.”
“오, 황자님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 인사가 아닐지요.”
그러나 이어서 공작이 낭독한 두루마리의 내용 그 어디에도 레이놀드 황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황자를 모셔 갈 황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체면이 구겨진 레이놀드는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좀 늦는 모양이지. 하지만 오든 말든 상관이야 없다. 어차피 이곳 벨슈타인을 싹 쓸어 버리고, 황성도 그리 만들어 줄 터이니.’
사악하게 벨슈타인 공작가를 훑어보던 레이놀드는 아스트리야의 합창단 뒤로 등장한 은발의 소녀를 보고 자안을 크게 떴다.
꿈에서 만났던 크리스털 페어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합창단과 함께 인사한 루시엘은 피아노 반주자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피아노를 치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루시엘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며, 레이놀드는 저도 모르게 황홀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과연 눈부시게 아름답군. 널 기다렸지.”
레이놀드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루시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이내 낭독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공작의 귀가 쫑긋 섰고, 입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움찔거렸다.
십 미터는 족히 떨어진 황자의 옆모습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덕분에 얼굴이 따가운지 레이놀드가 흘깃 고개를 돌렸다가 공작의 형형한 눈과 잠시 마주쳤다.
아직 아무런 계획도 모르는 레이놀드 황자는 공작의 눈빛에 움찔하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눈을 돌렸다.
공작은 하얀 제복 슈트를 목까지 채운 단추를 거칠게 풀며, 우득 손가락을 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공작은 귀를 씻어 내고 싶었다.
‘……저 빌어먹을 X새끼가. 내 인내심을 시험하게 하는군.’
잘 빗어 올린 애꿎은 머리를 가다듬은 그는 턱을 문질렀다. 이럴 때는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청각이 못내 그를 괴롭혔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공작은 주머니 속에서 악력을 흡수하는 금속 마도구를 꾹 쥐었다.
괜한 분풀이를 하자 솔리아페도 루이비드의 단단한 팔목을 잡았다.
제발 진정하라는 의미로.
순간 흘린 차가운 그의 마력 일부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왠지 갑자기 예배당이 춥지 않소?”
“그야 벨슈타인은 북쪽이니 당연하지요.”
같은 시각, 영상구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엘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노아가 루시엘에게 캐모마일 차를 가져다주었다.
“아가 마님, 이것 좀 드시고 기운 좀 차려 보십시오.”
“고마워.”
“차 맛은 기대하지 마시고요. 처음…… 우려 본 거라 맛없을 겁니다.”
머리를 긁적인 노아가 말하자, 루시엘이 웃어 보였다.
“괜찮아. 차는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니까.”
루시엘은 찻잔을 들어서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살짝 입술에 축였다.
“그럼 무엇으로 먹습니까?”
“향기와 그 사람의 정성으로 마시는 거지.”
“……아, 그렇습니까. 저는 그런 건 모르고 자라서.”
“노아의 차는 우선 합격이야. 향기가 좋은걸.”
그렇게 말하며 루시엘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감정을 억누른 채 이성적일 수 있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루시엘은 여전히 못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별일 없으실 거야. 모든 것은 다 잘될 거야.’
이를 눈치챈 노아는 노력해도 루시엘의 불안을 줄여 줄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노아가 말했다.
“아가 마님, 제가 아무 힘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거의 다 왔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고마워. 덕분에 힘내 볼게.”
방 안에 어둠의 기운을 느낀 루시엘이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한데 노아, 잠깐만 나가 줄래?”
“……예.”
노아가 나가자, 레이븐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