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카일라는 눈앞의 페넬로페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깨어났지?”
“궁금해? 봉인석의 결계는 가짜였으니까.”
“……제법이구나?”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달라진 페넬로페의 태도에 카일라가 놀라기도 전에 그들 주변으로 벨슈타인의 기사들이 무장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삭, 사삭!
카일라가 눈을 매섭게 뜨며, 페넬로페에게 말했다.
“……기어이 네가 날 배신하는구나. 그래, 날 꼬드겨 검이 있는 곳으로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더냐? 어림도 없지. 저 검은 내가 가져갈 것이야.”
하지만 곧 유리관의 왼쪽 수풀에서 위압적인 살기를 내뿜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나는 은빛의 갑주와 잘 벼려진 푸른 검을 든 금발의 청년이었다. 낯이 익었다.
카일라는 지난번 제 한쪽 팔을 베어 버린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네놈, 또 보는구나. 지난번의 복수는 내 반드시 갚도록 하마.”
키제프의 서늘한 눈이 구르며 오만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블루 익스큐션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쿡쿡, 웃기는 소리. 내가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쳐 거래한 검이다. 네놈은 끼어들지 마라.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네 놈은 처형당할 차례나 기다리도록 해.”
카일라가 온 힘을 다해 날카로운 이로 제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에 닿자,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쿠오오!
봉인석 너머 바닥에 여러 개의 검은 소환진이 생성되었다. 그 안에서 기괴한 모습의 마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카일라에게 이 정도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놀랄 정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였다.
“……죽어라!”
마치 지옥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거대한 벌레와 지네, 뱀, 도마뱀의 형상을 한 괴물들이 벨슈타인의 기사들과 키제프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챙챙!
크르르륵!
귀를 찢는 마찰음과 파열음.
사방에서 살점과 피가 튀었다.
마물과 기사들이 뒤엉켜, 전투하는 가운데. 카일라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페넬로페에게 다가왔다.
“……그 열쇠부터 내놓거라!”
“시, 싫어.”
겁에 질린 페넬로페가 뒷걸음질 치는 걸 보면서 카일라가 말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 이 상황에서도 제법 반항하는구나. 멍청한 것.”
쌔애애액!
소환진에서 튀어나온 검은 뱀 한 마리가 기어와 페넬로페의 몸과 손목을 칭칭 감고는 조였다. 그러자 열쇠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윽.”
일부러 당해 주고는 있었지만, 루시엘은 고통에 괴로웠다.
‘거의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카일라가 스스로 저 안으로 기어들어 갈 때까지 버티자.’
루시엘은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과 키제프 쪽을 주시했다. 숨 가쁘게 마물을 해치우며 그들이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마조마했다.
“……쿡쿡, 드디어 얻는구나.”
카일라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는 환희에 찬 얼굴로 스스로 유리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철그럭.
그녀가 완전히 들어선 순간 유리관이 잠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유리관 앞으로 다가간 페넬로페가 카일라를 보며 웃어 주었다.
“……멍청하긴. 제 발로 관에 들어간 기분이 어때?”
손거울을 꺼내 들자 눈앞에 있던 페넬로페가 크리스털 페어리, 루시엘로 변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너…… 너는 루시엘?!”
튀어나올 듯 커진 카일라의 눈동자가 루시엘을 보고 놀라 흔들렸다. 뒤늦게 유리관을 벗어나려 해도 도통 열리지 않아 더욱 불안해졌다.
“그래, 당신과 레이놀드 때문에 평생 보석을 강제로 만들어 냈던 크리스털 페어리. 내 고통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알까?”
“……무슨 소릴. 네년을 손에 넣었더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씹어 죽일 것!”
표독한 말을 입에 담던 카일라가 약이 바짝 올라 유리관을 쾅쾅 세게 두드렸다.
발악하는 카일라를 보며, 루시엘은 도리어 웃음이 났다.
“난 전생을 기억해. 전생의 당신은 아들인 황자를 위해서, 마검을 완성하려고 했지. 크리스털 페어리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희생해서!”
루시엘이 유리관으로 한 발 다가가면서 겉에 달린 자물쇠를 없애 버렸다.
그러곤 지팡이를 꺼내, 유리관 내부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파아아앗.
루시엘의 마나가 닿는 그 순간 내부에 장치되어 있던 온갖 트랩과 고대 주술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붉은 선이 카일라의 몸을 꽁꽁 싸맸고, 몸이 마비되는 맹독이 살포되었다.
“과거의 난 그저 보석을 만드는 도구로 살았어.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삶을 살았어. 당신들의 그 탐욕 때문에 짓밟히다가 그렇게…… 죽었어.”
의식이 점차 둔화되어 가던 카일라가 발작하듯, 입에 게거품을 물며 원통함에 발버둥 쳤다.
그런 카일라를 내려다보며 루시엘이 이젠 아득하게 멀어진 과거를 떠올렸다.
그 고통스런 기억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왔던 긴 시간들. 루시엘은 주먹을 꾹 쥐며 눈앞의 원흉을 향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어. 복수할 이 날만을 기다려온 거야. 당신의 아들도 곧 이렇게 만들어 줄 거야.”
“크흐억…… 이, 이렇…… 게. 가, 갈 수는 없……!”
카일라의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콰과가가!
날카로운 쇠가시가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꼴이었지만, 루시엘은 모조리 눈에 박아 넣었다.
카일라의 마지막을 지켜보려고, 모두가 노력했다.
후드득.
류프델이 한 자루 더 만들어 준 가짜 블루 익스큐션에서 성수가 흩뿌려지며, 카일라의 살점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유리관 주변의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웅웅 울리는 거대한 소리에 주변의 모두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만신창이의 몸으로도 카일라의 형형한 두 눈은 루시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내가…… 이대로…… 꺼흑, 갈 성 싶으냐…… 윽!”
쿵쾅.
카일라가 품은 사악한 기운이 마지막으로 날뛰며, 유리관을 들썩이게 했다.
“……이제 지옥으로 보내 줄게.”
루시엘은 유리관을 향해서 페어리 문 반지를 낀 손을 들었다. 이내 페어리 문이 가진 번개의 힘을 발동시켰다.
펑퍼버벗!
번쩍, 우르르 쾅!
촤아아악!
반지의 금빛 체인이 길게 늘어지면서 카일라가 갇혀 있던 유리관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러더니 단단한 빛의 사슬이 유리관을 감싸며 번쩍였다.
콰드드득, 와장창!
뒤이어 거대한 굉음과 눈부신 섬광이 이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신의 심판이라도 내리는 듯했다.
한참 후 빛이 잦아들고 모두가 눈을 떴을 땐 유리관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지이잉.
튀어오는 파편을 방패로 변한 페어리 하트가 막아 주었다.
한때 카일라의 몸이었던 형체는 이제 완전히 식별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것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루시엘은 겨우 숨을 몰아쉬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엘.”
촤악!
마지막 남은 마물의 몸체를 칼날로 가르고 난 후, 키제프가 다가왔다.
“끝난 건가?”
“……모르겠어.”
루시엘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해치우긴 했지만, 블루 익스큐션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마지막 싸움은 루시엘이 하겠다고 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내내 지켜보던 길리아트가 다가왔다.
“루시엘, 아가! 해냈구나. 카일라를 끝냈어.”
“할아버지, 아직은 몰라요.”
길리아트가 흐트러진 루시엘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더냐?”
“네, 덕분에요.”
길리아트가 걸어 준 숲의 가호 실드가 있었기에, 사실 루시엘은 공격을 받아도 실드가 타격을 흡수하게끔 되어 있었다.
푸시싯!
카일라가 소멸한 유리관의 잔해에서 퍼석거리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 사람이 긴장한 채로 각자의 무기를 겨누고 있을 때였다.
잔해 속에서 작게 일렁이는 검은 구슬 조각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성의 안쪽으로 날아갔다.
“……저게 뭐지?”
그러자 길리아트가 미간을 좁혔다.
“저건, 카일라의 원혼인 것 같구나.”
루시엘은 악마 날개가 그려진 황궁 장서관의 책 내용을 떠올렸다.
「곁에 두고 잠들면 악마와 거래할 수 있다. 거래의 대가로 계약자는 검이 파괴될 때까지 영혼이 종속된다.」
“카일라의 영혼은 검에 얽매여 있으니까, 그리로 갔을지도 몰라요. 할아버지, 블루 익스큐션이 어디에 있지요?”
“……악마궁에 있다.”
“블루 익스큐션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그 악마를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굴리며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키제프가 이를 꽉 물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루시엘…… 설마 악마와 거래할 생각은 아니지?”
“그걸로 검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하겠어.”
“그건 절대로 안 돼.”
카일라처럼 끔찍한 괴물이 될지도 몰랐다.
“……방법이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야.”
루시엘이 입술을 앙다물며 굳게 말했다.
“할아버지, 악마궁의 보물고로 절 데려가 주세요.”
“루시엘, 차라리 내가 만날게. 나는 어차피 이미 사신과 묶여 있는 몸이야. 한 번 팔아 버린 영혼, 악마에게 또 한 번 팔아 버린다고 해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렇게 루시엘과 키제프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려 꺼내 보았더니 루시엘의 통신구가 반짝거렸다.
―아가 마님, 예배당으로 신관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신전 맞이의 예식이 잠시 후 시작될 것 같아요.
캐서린의 보고였다.
“……이런, 너희들은 어서 가도록 해라. 가서 황자 놈의 마지막도 처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는요?”
“먼저 가 있으렴. 내가 블루 익스큐션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마.”
길리아트가 웃으며, 초록빛의 이동포탈을 생성했다. 그가 두 아이의 등을 재촉해, 포탈 안으로 보냈다.
“……할아버지? 그럼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오냐, 곧 갈 거란다.”
어느새 본성 안으로 이동해 버렸지만, 그 순간 루시엘은 길리아트의 붉은 눈빛에 아른거리는 불꽃을 보고 말았다.
‘저 눈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어.’
루시엘이 류프델을 만나러 밤의 대장간에 처음 가겠다고 했을 때도. 할아버지는 반대하고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하시면서 꼭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루시엘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당신께서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자처해 가실 때의 바로 그 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
‘……할아버지는 우리 대신 악마와 거래하려는 거야! 가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