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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70)화 (270/282)

<270화>

“신관님들, 저쪽 마차에 오르셔서 잠시 대기하시면 됩니다. 마부가 도착하면 곧 출발하겠습니다.”

젊은 기사가 안내하는 마차에 오른 카일라는 둘만 남자 팔로스에게 속삭였다.

“이건 공작성으로 가는 마차가 아니라더군. 이따 상황을 봐서, 마부를 처치하고 성으로 마차를 돌려.”

“무작정 말입니까? 하지만 그 푸른 리본이 달린 초청장이라는 게 없으면, 성문에 가서도 일반 신관은 못 들어갈 겁니다…….”

“빌어먹을. 그럼 어쩌란 말이냐? 대책을 강구해 보란 말이다! 쓸모없는 놈!”

분노한 카일라가 한 손으로 팔로스의 멱살을 콱 움켜쥐며 멸시하듯 바라봤다.

“끄흑…… 이, 이것 좀 놓고!”

팔로스를 버러지 보듯이 하던 카일라가 그를 놓으면서 말했다.

“……레이놀드, 이제 믿을 건 레이놀드밖에 없는데. 그 애를 만나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이놀드는 먼저 공작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른 모양이었다.

종이학이라도 보낼 것을 그랬다 싶은 카일라가 손톱을 짓씹고 있을 때쯤, 그들이 탄 마차로 기사가 다가와 고했다.

“……신관님들, 초청받은 봉신 가문인 길렌 백작님의 저택으로 이동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

그들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이분들의 마차는 공작성으로 가는 이동 게이트를 타야 할 거예요.”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카일라가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페넬로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카일라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오랜만이에요.”

페넬로페는 기사에게 푸른색의 초청장 두 장을 내밀었다.

“카빌 영애, 이 신관분들과는 혹시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이분들은 레이놀드 황자님의 측근이시랍니다. 초청 명단에서 빠졌더라고요. 따로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어요. 이제 저희를 공작성 안으로 이동시켜 주세요.”

페넬로페의 요구에 기사 노아가 초청장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예, 틀림없이 확인했습니다. 알겠습니다.”

페넬로페가 냉큼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카일라와 팔로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기뻐요, 어머니.”

페넬로페가 카일라에게 와락 안기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뒤로 물러나며 경계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카일라의 머릿속이 미친 듯이 굴렀다. 얼음의 제단에서 자신만이 겨우 도망쳤었다.

그때 페넬로페를 제물로 쓰고, 블루 익스큐션의 소울 이터 의식을 마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벨슈타인이 전부 꾸며 낸 일이었다.

‘검이 가짜였으니, 페넬로페를 제물로 바치던 그 의식도 거짓이었겠지.’

감쪽같이 속았던 일이었다.

부르르, 온몸이 떨릴 만큼 수치스럽고 원통한 일.

그러니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벨슈타인의 협박이나 회유라도 받았을지도 모른다.

카일라가 눈동자를 살살 굴렸다.

“여기서 널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카일라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페넬로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페넬로페가 울상을 지었다.

“그날 얼음의 제단에서 벨슈타인에게 붙잡혔어요. 프리다 박사와 크루거 백작은 모두…… 흑흑. 저 혼자서 너무 무서웠어요!”

“아가. 페넬로페…….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말끔한 드레스 차림을 한데다, 직접 공작성의 초청장을 가져다줄 정도면…… 답은 하나였다.

“벨슈타인의 밑에 있는 것이냐? 쿡쿡. 그렇지?”

카일라가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동공을 키우며, 페넬로페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윽! 아뇨, 아니에요. 살아남기 위해 협조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제가 루시엘과 벨슈타인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아시잖아요?”

“……하긴 그랬다만.”

하지만 아직은 이 아이를 믿기는 어려웠다. 그때 곁에 있던 팔로스도 페넬로페를 훑어보며 의심에 찬 눈으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일라 님. 저 계집애를 믿을 수 있습니까?”

“사실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레이놀드 황자님께 연락을 받았거든요. 저더러 잘 모시라고 대신 부탁도 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초청장을 따로 받아 온 것이고요.”

“……! 레이놀드가 부탁을 했다고?”

“네, 공작성 안에 들어가서 따로 합류하자고 하셨어요.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레이놀드의 이름이 나오자, 카일라는 마음의 빗장이 살짝 풀려 갔다.

“어쩐지 내 아드님이 그리 생각 없이 굴 위인은 아니지.”

아까보다는 경계심이 누그러진 듯한 카일라를 보며, 페넬로페로 변신한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열심히 동조했다.

‘카일라에게 우선 믿음은 준 것 같은데……. 그날 페넬로페를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척을 해야겠어.’

“그런데 어머니, 그날 저는 왜 혼자서 얼음의 제단에 남았던 걸까요? 아무 기억도 나질 않아요…….”

“……정말 아무 기억도 없단 말이니?”

“네 들어간 이후부터는 기억이 거의 없어요. 깨어났을 때는 이미 벨슈타인으로 옮겨진 후였고요.”

“그래…… 나도 그날은 악몽 같아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카일라가 그제야 경계심을 한층 풀며,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데 지금 큰일이다. 블루 익스큐션도 벨슈타인이 꾸며 낸 가짜였고, 어둠의 심장도 껍데기만 남았어!”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예요, 블루 익스큐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뭐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벨슈타인 공자와 루시엘이 나누는 이야기를 몰래 들었지요. 그들은 그걸 파괴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에요.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페넬로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내 마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마부가 깊게 눌러쓴 모자를 들어 올리자,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얼마나 되었을까.

벨슈타인 영지에 다다르자 아까 동이 터 오던 벌판과는 다르게 이곳은 아직도 밤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어두웠다.

무엇보다 어둠의 숲 가시덤불이 마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숲 뒤로는 검은 장벽이 보였다.

“거의 다 왔어요.”

“……왜 공작성 내부로 가는 이동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는 거지?”

아까 다른 신관들은 이동게이트를 이용하는 걸 보았던 터라 팔로스가 의문을 품었다.

“블루 익스큐션은 위험한 물건이니, 본성 내부에 두지 않았어요.”

“……그럼 어디에 있지?”

“가시덤불 너머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그치만 아직 주변이 어두워서 가시덤불이 비켜 주질 않네요.”

페넬로페의 말에 카일라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앞장서거라. 그깟 가시덤불 따위, 불태우면 그만이지.”

마부석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마부가 마차 문을 직접 열어 주었고, 페넬로페가 가장 먼저 내려 눈 앞에 펼쳐진 가시덤불을 바라보았다. 카일라도 얼른 뒤따라 왔다.

팔로스도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카일라가 신호를 주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남아 있어라.”

암록색의 가시덤불은 몹시 두터워서 그 자체로도 제법 위협적으로 보였다.

벨슈타인의 가시덤불은 어둠이 깔려 있을 때는 또 하나의 장벽 역할을 한다고도 들은 바가 있긴 했다.

“……성가시군. 태우는 데도 한참 걸리겠구나.”

‘……그거야 가시덤불을 더 울창하게 자라게끔 페리도트를 잔뜩 사용했으니까.’

못마땅한 듯 말하는 카일라를 보며, 루시엘이 속으로 웃었다.

이내 바닥에 그려져 있던 녹색 마법진이 빛을 발하면서 가시덤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슷.

높다랗게 둘러쳐진 가시덤불이 스슷 안쪽 길을 살짝 터 주었다.

“어? 지금이에요! 안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루시엘과 카일라가 함께 덤불 안으로 들어가 시야가 가려질 때였다.

마부가 붉은 눈을 빛내며 단숨에 팔로스의 입부터 틀어막고 양팔을 우두둑 꺾어서 뒤로 제압해 버렸다.

“……으웁웁!”

팔로스는 함정이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갑갑하던 모자와 가발까지 벗어 던진 길리아트가 흉폭해진 얼굴로 팔로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괘씸한 놈 같으니.”

스스슥!

콰아악!

이어 그는 지팡이를 꺼내, 가시덤불을 조종했다. 가시덤불이 구불거리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뻗더니 팔로스의 몸을 칭칭 감았다.

사지를 묶고 목과 배도 덤불이 조여 오자, 팔로스는 점차 호흡을 가눌 수 없었다.

뿔처럼 단단한 가시덤불의 가시가 그의 온몸에 박혔다.

이내 그의 몸이 축 처지는 걸 확인한 길리아트는 덤불 안쪽을 향해 하이드로 기척을 숨기며, 차츰 간격을 좁히며 다가갔다.

덤불 숲 곳곳에는 벨슈타인의 기사들이, 유리관 인근에는 키제프가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루시엘이 페넬로페의 모습으로 있다지만, 카일라와 함께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으니…….’

눈을 가늘게 뜬 길리아트는 키제프에게 통신으로 알렸다.

“루시엘이 카일라와 덤불 안으로 들어갔으니, 3분 내로 유리관 쪽으로 접근할 거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구나.”

―예, 할아버지.

점차 덤불 숲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던 페넬로페를 따라가며, 카일라가 재촉했다.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더냐?”

“거의 다 왔어요.”

울창한 덤불 숲이 마치 터널처럼 아치형으로 둘러진 공간을 가리키며, 페넬로페가 말했다.

“바로 저기예요.”

결계를 쳐 둔 봉인석이 주변에 둥글게 심겨 있고, 덤불 터널 안에는 유리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 안에 진짜 블루 익스큐션이 있다고? 그럼 네가 가져오도록 하렴.”

“앗!”

좌우를 경계하듯 살피던 카일라가 페넬로페의 등을 밀며 봉인석 안을 가리켰다.

‘결계 안에 그냥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냉큼 들어가겠니? 두 번 속지는 않을 것이야.’

카일라의 힘에 밀린 페넬로페가 봉인석 안쪽으로 발을 대자, 순간 발동된 결계가 빛을 뿜었다. 그 위로 풀썩 쓰러진 페넬로페가 결계가 쏟아 내는 힘에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 순간 번개와도 같은 빛들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결계의 빛이 사그라든 것으로 보아 결계가 해제된 모양이라, 카일라는 코웃음을 흘리며 쓰러진 페넬로페를 발로 툭툭 찼다.

“고생했구나, 아가야. 마지막까지 넌 쓸모 있는 아이였어.”

이내 덤불 터널 속에 들어가자 아름답고 커다란 유리관이 있었다. 그 안에는 검푸른 아지랑이가 넘실대는 처형 검이 구석에 세워진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과연! 역시 진짜 블루 익스큐션은 다르구나.”

카일라가 희번덕 눈을 빛내면서 유리관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런, 열쇠가 어디 있지?”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찾고 있어?”

기절한 줄 알았던 페넬로페가 일어나 유리관의 열쇠를 짤랑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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