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거대한 천공섬 아스트리야가 하늘을 몽땅 가려, 지상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섬이 지상 위로 맞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 장관을 바위틈에 숨어서 지켜보던 카일라가 고개를 젖히며 구름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그것을 따라 달려갔다.
천공섬의 겉에는 여전히 그것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검붉은 보랏빛의 꽃을 확인한 카일라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바로 이 날을 기다렸다.”
레이놀드가 그간 키워 온 어둠의 심장. 그들의 마지막 무기인 인형 군단이 나올 때가 된 것이다.
카일라가 눈을 빛내면서 아스트리야의 지반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천공섬이 멈추기 전에 인형 군단을 소환해 낼 생각이었다.
사아아.
카일라는 한 손을 들었다. 흑주술을 사용해 어둠의 심장을 살짝 건드려 보기로 했다.
‘오냐, 벨슈타인을 깨부술 인형들이여! 쏟아지거라!’
검은색의 뱀이 몸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아가리로 어둠의 심장을 살짝 깨물어 열어 헤집었다. 그런데 막상 열어 보니 어둠의 심장은 겉으로만 그리 실할 뿐, 텅 빈 껍데기였다.
“이, 이럴 수가! 설마, 아니겠지.”
인상을 찌푸린 카일라가 뱀을 조종해, 그 몸에 올라타고는 어둠의 심장을 더 가까이 살펴보았다.
말라 죽고 터져 버린 흔적이 있었다. 도둑이라도 맞은 듯한 심정으로 카일라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이…… 이건 대체!”
무언가가 어둠의 심장 속 양분을 빼먹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공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카일라는 뿌리처럼 이어진 다른 어둠의 심장도 열어 보았다. 아홉 개나 되는 어둠의 심장이 전부 그런 처참한 꼴이었다.
“으으으, 감히…… 어떻게!”
망연자실한 카일라의 얼굴이 허망한 빛을 띠었다가, 실망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인간의 피를 섭취해 회복했던 얼굴이 잠시 다시 기괴하게 변하려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건!”
핏대가 잔뜩 선 눈알이 커지면서 아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놀드…… 레이놀드라면 이것에 대해 알고 있겠지? 그 애가 직접 키운 것이니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천공섬을 올려다보던 카일라는 소환한 뱀을 돌려보내고는 다시 검은 로브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이제 팔로스를 기다렸다가 신관으로 위장해서 공작성에 잠입할 일만 남았다.
‘그 전에 레이놀드와 합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구나.’
카일라가 입술을 깨물며, 서서히 멈춰 가는 천공섬을 주시했다.
* * *
거대한 천공섬이 아무 지상에 완전히 닿을 수는 없었기에 이륙할 만한 널찍한 벌판 위로 옮겨 사다리를 이용해 사람들을 내려오게 한 다음.
마차를 이동시킬 이동 게이트를 따로 마련해 내려온 대규모의 인원을 공작령으로 데려오라는 공작의 명이 떨어졌다.
자르가 단장이 천공섬에서 내린 이들에게 벨슈타인 공작의 인사를 전했다.
“아스트리야의 방문을 환영하며, 금일 신전 맞이를 기념하여 신전의 귀한 손님들을 벨슈타인의 공작성으로 초청하는 바입니다.”
인사를 마친 자르가가 눈짓하자, 검은 날개의 기사들이 푸른 리본의 초청장을 귀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추기경과 오라클의 신관, 성기사단 전원, 교황청과 학술원에 소속된 간부들, 특별히 레이놀드 황자와 그들의 측근까지 귀빈으로 대우,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공작성으로 초청해 삼 일 내내 휴식하며 머물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벨슈타인이 베풀어 주신 친절에 신전을 대표해,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안드레아 추기경이 성기사 하인델을 거느린 채로 선두로 나와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신관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커다란 신전 맞이입니다.”
신전 맞이는 종교적 행사였기에 그저 기부금이나 물자를 지원하는 데에서 끝나거나, 간단히 저녁 식사 자리에만 초청하는 일도 있었기에 이는 매우 큰 규모였다.
“……과연 제국의 부호다운 규모입니다.”
“이 정도면 신전 맞이가 아니라, 축제가 아닙니까. 허허허.”
오라클의 신관들이 껄껄 웃으면서 벨슈타인을 소리 높여 칭송했다.
그 가운데 레이놀드 황자는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어둠의 심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으나,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던 터였다.
“또한, 아스트리야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 또한 벨슈타인의 일곱 개 봉신 가문들의 저택으로 나누어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 것입니다.”
자르가 단장의 이어진 말에 나머지 신관들도 환호했다.
하여 수백 명에 달하는 신전 맞이의 손님들을 공작가의 검은 날개 기사와 마법사들이 직접 마차로 나누어 태우고, 이동 게이트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기경님의 마차는 저쪽입니다.”
자르가 단장의 말에 안드레아가 미소 지으며, 레이놀드에게 먼저 권했다.
“황자님부터 마차에 오르시지요. 누구보다 지상에 오시길 고대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 아, 먼저 가시지요. 저는 천천히 이동해도 됩니다.”
그리 말하면서 레이놀드가 천공섬의 지반을 살피려 했지만, 안드레아가 재차 권유했다.
“그럼 같이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러시지요, 황자 전하야말로 귀빈 중의 귀빈이 아니십니까.”
고위 신관들이 등을 떠밀자, 레이놀드는 별수 없이 마차로 발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둠의 심장이 그대로였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안드레아가 어둠의 심장에 성수를 써 타격은 주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완전히 뿌리 뽑을 방법은 없었을 터다.’
안일하게 생각하며 레이놀드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를 신경 쓰기보다 어서 벨슈타인 공작성에 가서 루시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레이놀드가 마차에 탄 것을 확인한 노아는 재빨리 줄을 선 다른 신관들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일라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테니, 바로 황자와 합류하진 않을 거야. 눈에 띄니까.’
* * *
루시엘이 열다섯 살이 되는 날이자, 벨슈타인의 굳건한 성문이 두 번째로 개방되는 날이었다.
생일과 결혼 관련된 모든 기념행사는 추후로 미루어 놓은 상태였다. 지금의 루시엘에게는 황자와 카일라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이야말로 진짜 ‘선물’이 될 테니까.
성의 분주한 분위기를 느끼며, 키제프의 집무실에서 잠깐 나온 루시엘이 소응접실에 앉아 있자 베시가 다가왔다.
새벽부터 단장을 마친 루시엘은 흰 카라가 달린 깔끔하고 수수한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가 마님, 신문이 왔네요.”
“바쁠 텐데 고마워, 베시.”
베시도 오늘은 신전 맞이 준비를 거들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제 할 일인데요.”
제국의 신문 기사에도 신전 맞이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신전 맞이가 벨슈타인 공작가에서 금일 열린다.」
루시엘 역시 신전 맞이에 초청된 명단과 규모를 듣고 놀랐으나 눈으로 직접 보니 더욱 대단했다.
벨슈타인 성의 내부도 예배당처럼 성스러운 흰색의 천으로 바꾸고, 장식품 하나조차 정갈하고 고요한 분위기로 섬세하게 꾸며져 있었다.
둘러보면 누구 한 사람 가만히 있는 사람 없이 저마다 분주했다.
때마침 이벨린과 에바가 소응접실로 들어서면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리던 루시엘이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 이 모든 걸 단시간에 완벽하게 준비하시다니, 너무 대단해요.”
루시엘의 칭찬에 이벨린이 반가운 듯 복숭앗빛 볼에 뽀뽀하고는 말했다.
“오, 우리 루시엘. 생일 축…… 아, 이 말 금지라고 했지. 후우, 힘들구나. 뭐든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않겠니? 솔리아페와 에바가 아주 제대로 작정을 했단다. 이제 나는 내성 일에 관여를 안 해도 될 정도구나.”
이벨린이 곁에 있던 에바를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큰 마님께서 벌써 손 떼시면 안 되세요. 마님께서 우실 거예요.”
잠시 이벨린과 농담한 에바가 루시엘에게 시선을 맞추면서 다가오더니 손을 꼭 붙잡았다.
“아가 마님,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날이네요. 벨슈타인과 신전의 우호적인 교류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에바.”
“자요, 힘내시라는 선물이에요. 어제 구워 뒀어요.”
에바가 건넨 건 연노란색의 베이크드레몬치즈케이크였다.
“너무 고마워요. 에바가 직접 만든 케이크라니……. 힘이 마구 나는걸요.”
최후의 싸움이 되리라는 걸 에바도 아는 걸까?
루시엘은 새콤달콤한 케이크를 먹은 다음, 키제프의 빈 집무실로 돌아와서 통신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전 루시엘은 사용인들을 제외한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기 영지로 불렀다.
엘링턴과 캐서린, 노아, 에리카와 제르다, 시클라인, 막스. 마지막으로 벨슈타인을 대표한 키제프와 권속인 아르제온과 피닉스까지.
클로디아와 류프델은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 통신구로 대신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이전 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최종 적은 누구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여러분과 함께 눈토끼 상회를 만들어 여러 가지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마지막 장애물을 앞둔 이 시점, 모두의 응원이 필요해요. 그래서 이렇게 불렀어요.”
두 시간이 넘도록 긴 이야기를 했지만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루시엘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어서 큰 힘이 되었다.
이번 일에도 도울 수 있는 것들은 돕겠다고 했고.
알게 된 루시엘의 비밀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기로 마법의 계약을 나누었다.
그렇게 결속을 맺은 후라서일까.
루시엘은 한결 단단해진 마음으로 신전 맞이를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지금쯤 카일라는 어둠의 심장이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는 걸 알고 이제 들어오려고 하겠지?’
그녀가 공작성의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는 없다.
침입을 시도하기에 벨슈타인의 벽은 견고했고 결계도 철저하게 되어 있으니까.
고작해야 신관으로 위장해 들어오는 방법뿐이다.
어둠의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걸 눈치챈 이상, 레이놀드와 만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신관은 공작성에 들어올 수 없고, 고위급만 초청했으니 여기서 진입이 또 막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달이 난 카일라는 갑자기 만날 그 애를 몹시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 든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생각이야. 카일라, 당신을 유리관으로 처넣기 위해서 말이야.”
그간 신전 맞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가족들과 머리를 맞대고 추리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하면서 동선을 그려 보고, 꿰맞춰 보았다.
그때 루시엘의 통신구가 반짝였다. 받아 보니 노아였다.
―아가 마님, 카일라가 나타났습니다.
“노아, 용케도 바로 알아봤네.”
―외팔인 걸 감추느라 구부정하더라고요. 신관들은 모두 자세가 가지런하니까요. 중년 남자도 함께 있습니다.
“황자의 보좌관이었던 자일 거야. 그들을 계속 주시하고, 일단 그들은 따로 벨슈타인의 마차로 안내해.”
‘이제 슬슬 마중 나갈 시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