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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68)화 (268/282)

<268화>

“시간을 되돌려 과거에 개입하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키제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는걸. 다른 건 손대지 않을 거야. 그냥 유리관 제작만 앞당기자. 응?”

잠시 고민하던 키제프가 주변을 서성거리며 이마를 짚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그럼 준비한 다음 이동하자. 네 말대로 우리에겐 지금 선택지가 없으니.”

당장 내일모레가 신전 맞이였는데, 뒤늦게 재료를 추가해서인지 유리관 제작이 더 늦어지고 있었다.

“유리관 제작을 막스에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과거의 우리에게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맞아, 그렇게 해야 꼬이지 않을 거야. 보름 전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 하자.”

루시엘은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면서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유리관은 물론 그 안에 만들어야 하는 주술이나 트랩 같은 세부 장치들까지 알 수 있도록 꼼꼼히 적어 갔다.

“……다 썼다. 이제 가자!”

한 시간 후 루시엘은 이동포탈을 열어 달빛 이슬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키제프를 데려갔다.

그런 다음, 반지로 끼고 있던 페어리 문을 빼내어 나무에 끼웠다. 곧 나무가 비틀리며 소란을 피우더니 그때처럼 통나무집으로 변했다.

안에 들어가자 시간의 책과 빗자루만 한 깃펜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더 근사하다.”

다시 보아도 여전히 신비로운 곳이었다. 처음 본 키제프마저 감탄하고 있자 어느새 책의 서명란이 나타났다.

“키제프, 누가 다녀올래? 어차피 편지만 주고 오면 되니까.”

“함께 갈 수는 없나?”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이름을 한 명만 적으라는 법은 없어. 둘 다 서명하자.”

고민스레 입술을 깨물던 루시엘이 깃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적고, 그다음은 키제프에게 넘겨주었다.

놀랍게도 시간의 책이 발동해 연월일을 적는 곳이 나왔다.

“두 명도 되는구나, 몰랐어.”

“여기에 적으면 되는 건가?”

“응, 그치만 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려서 북마크를 이용해 갈 수도 있었어.”

“멋지군. 넉넉하게 보름 전이 어때, 루시엘? 신전 맞이 소식이 들려올 때쯤.”

루시엘이 보름 전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때 난 천공선에서 아스트리야를 정찰할 때였어. 돌아와서 신전 맞이 연락이 오기 전이 좋겠어. 내가 바로 편지를 확인할 수 있게.”

“좋아.”

그러자 책에 곧 하늘색 북마크가 생성되었다. 루시엘이 키제프의 손을 잡으며 그것을 당기니 이내 책장이 사라락 넘겨지며 빈 여백에 글씨가 채워졌다.

「천공선의 여정을 마치고, 공작성으로 귀환한 루시엘은 아스트리야에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가족들과 계획을 공유하고 의논했다.

“……확실히 미끼를 문 것 같아요. 어쨌든 레이놀드를 유인해 내는 건 쉬울 것 같아요. 잘됐지요, 아빠?”

공작과 키제프는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감히 너를 담은 그놈의 눈알부터 파내야겠어. 다음은 널 건드린 팔, 심장을 마물에게 던져 주겠어.”

“그래, 갈기갈기 찢어야겠다.”」

“……나 우리 아버지랑 말투가 똑같구나.”

“그거 이제 알았어?”

책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키제프가 흠칫 놀라자 루시엘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두 사람의 몸을 깃털과 바람이 살랑 감싸더니 마법의 힘과 함께 둘은 곧 보름 전 집무실 앞 복도로 이동되었다.

둘은 재빨리 벽으로 몸을 숨긴 후 하이드로 모습과 기척을 숨겼다.

탁탁탁!

엘링턴과 보좌관이 급히 집무실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에는 신성 통신구가 들려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집무실 안으로 그들이 들어갔다.

“신전 맞이 소식이 도착한 모양이야.”

“응. 기억난다.”

살금살금 이동한 두 사람은 집무실의 소리를 엿들으려고 귀를 대보았다.

“각하, 아스트리야의 신성 통신구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보름 후에 신전 맞이를 열어 달라는 청입니다.”

소식을 확인한 키제프가 말했다.

“이제 어쩌지?”

“조금 더 기다리면 너랑 아빠는 경매소에 가실 거야. 나는 집무실에서 혼자 유리 온실 설계도를 검토할 거고. 그때 편지를 전하자.”

“좋은 생각이야.”

두 사람은 그들이 나가길 차분히 기다렸다. 몰래 둘만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니 괜스레 두근거리기도 했다.

얼마 후 공작과 키제프가 나란히 함께 아래층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지금 보니 두 사람은 걸음걸이마저도 닮아 가고 있었다.

“키제프, 점점 아빠랑 똑같아져…….”

“그거 칭찬이겠지?”

“물론이야.”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마법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선율이 들려왔다. 루시엘이 혼자 남았다는 뜻이었다.

“키제프, 지금이야. 잠깐 잊고 갔다면서 이거 전해 주고 와.”

“알겠어.”

키제프가 하이드를 풀고, 루시엘에게서 편지를 받아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름 전의 루시엘이 유리 온실 설계도를 검토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키제프? 경매소에 간 것 아니었어?”

“잠깐 잊은 게 있어서.”

키제프가 품 안에서 곱게 접힌 편지를 건넸다.

“……뭐야, 편지? 이런 건 언제 쓴 거야? 어, 키제프? 그새 어디로 갔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 루시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키제프는 편지만 주고 얼른 문을 닫고 나왔다.

남겨진 루시엘은 하는 수 없이, 그가 남기고 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 루시엘. 나는 미래에서 왔어. 시간이 없어. 이제 신전 맞이 연락이 올 거야.

그 전에 악령 카일라를 가둘 유리관을 제작해야 해. 그곳에 고대 주술 부적을 쓰면 그녀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레이븐이 알려 줬어.

그러니 막스 씨에게 유리관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해 줘.

키제프가 가진 고대의 석판을 가루로 빻아서 유리관의 재료로 쓰고, 이벨린 할머니께도 고대의 주술에 대해 물어보면 도와주실 거야.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지금 우리는 내일모레 신전 맞이까지, 유리관 제작이 어려워졌거든.

도와줘. 믿을 건 너뿐이야.」

편지를 다 읽어 내린 루시엘이 집무실을 나와서 복도를 두리번거렸지만, 하이드로 기척을 숨기고 있던지라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루시엘은 편지를 들고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면 돌아볼 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으니 루시엘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모든 건 과거의 나에게 달렸네. 힘내 줘, 루시엘.’

자신에게 속으로 응원을 보낸 루시엘에게 키제프가 다가와 말했다.

“편지는 줬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자. 루시엘.”

그렇게 마음먹자 깃털과 함께 두 사람은 다시 시간의 책 앞으로 이동했다. 신기한 경험에 키제프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초조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루시엘을 보며 키제프가 말했다. 그 역시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됐을까.”

“그러게, 너무 떨려.”

과연 현재가 바뀌었을지, 유리관은 제대로 제작이 되었을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만약에 뭔가 변한 게 맞다면, 책에도 변화가 있을 거 같아.”

루시엘이 그리 말하면서 책을 지켜보았다.

몇 분쯤 기다렸을까.

시간의 책이 잠시 분홍색으로 빛났다. 책장이 사락사락 넘겨지면서 새로운 내용이 군데군데 채워지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냄으로써 과거가 실시간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어그러짐 없이 순조롭게 유리관 제작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원하는 문장이 생겼다.

「드디어 카일라를 죽일 유리관이 완성되었다. 고대 주술과 마법 트랩, 그리고 유리공예 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루시엘은 기쁨에 차올라 키제프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키제프, 이제 이걸로 카일라를 처치하는 거야.”」

“……마, 맙소사, 진짜로 됐나 봐.”

커다래진 눈으로 루시엘이 숨을 꼴깍 넘겼다. 목소리가 잔뜩 떨려 나왔다. 키제프도 놀라움에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로 완성되었는지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유리관은 어디에 있지?”

솔리아페에게 전해 듣기를 신전 맞이는 예배당에서 열린다고 했다.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니까.

“신전 맞이가 열리는 장소일 거야. 예배당으로 어서 가 보자.”

예배당으로 두 사람은 빠르게 이동했다.

그사이 예배당은 더욱 아름다운 조형물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치 성대한 연회가 벌어질 것처럼 웅장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반짝반짝 아름다운 유리관이 놓여 있었다. 사람이 여러 명 들어갈 수도 있는 커다란 유리관이었다.

그걸 보자, 과거 레이놀드의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이 안에서 생활하는 거다. 루시엘. 영원히. 네가 보석을 만들어 내는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거야. 너는 내 것이니까.’

괴로운 과거를 떠올린 탓인지 두통이 시작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괜찮아?”

“응, 잠깐 어지러워서.”

그러나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평생 유리관에 갇혀 있던 그녀에게, 그걸 보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다.

“……나에겐 솔직하게 다 말해도 돼. 옛날 기억이 널 괴롭게 한 거지? 다른 기억으로 덧칠해 줄게.”

키제프가 싱그레 미소 지었다.

파아아.

키제프가 루시엘을 위해, 유리관 내부에 비눗방울들을 가득 소환하는 마법을 부렸다.

몇 개가 뾱뾱, 터지긴 했지만 무지갯빛의 비눗방울은 동화처럼 예뻤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내니 유리관의 문이 열리며 일제히 예배당의 천장으로 날아 올라갔다.

“예쁘다. 이런 마법도 할 수 있었어?”

“응, 마음을 사로잡는 49가지 마법의 책에서 봐 뒀지.”

“……누구 마음을 그렇게나 사로잡으려고?”

루시엘이 투덜거리자 한 걸음 다가온 그가 귀를 붉히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너.”

“……뭐래.”

민망함에 웃던 루시엘은 어느새 과거의 상념을 털어 버린 걸 알 수 있었다. 이제야 고개를 주억이며 유리관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천장은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아름다웠지만 사실 무시무시한 고대 주술과 트랩이 숨겨져 있는 죽음의 유리관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없어, 루시엘은 멍하니 보았다.

“……우리가 진짜 해냈어. 막스 씨가 유리관 제작에도 혼신을 다해 줬구나. 파괴되기엔 아까울 만큼 아름다워.”

“그래도 끝내야지. 우리 손으로 직접.”

내내 애틋하게 바라보던 키제프의 눈이 다시금 서늘해졌다.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철저하게 준비해, 그들에게 진짜 최후를 맛보게 해 줄 차례였다.

이틀 후.

공작성의 검은 장벽 위 보루에 올라서자 한결 가깝게 내려오고 있는 아스트리야의 천공섬이 저 멀리서 보였다.

서서히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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