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우리 새아가가 어떻게 됐다고?”
루시엘이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에 벨슈타인 공작성은 발칵 뒤집혔다.
공작은 잔뜩 날이 곤두선 채로 소집한 주치의와 마탑의 치유 마법사들에게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고 다그쳤다.
제 아버지가 날뛰는 걸 본 키제프는, 마탑에 있던 길리아트와 하멜의 공방에서 유리 제작을 돕고 있는 이벨린에게는 차마 알리지 못했다.
슬픔에 잠긴 키제프와 번갈아 가면서 루시엘의 상태를 살피던 솔리아페는 몸소 약제사 시클라인을 데려왔다.
곧장 신선한 마나 영양제를 수저에 덜어서 루시엘의 입안으로 흘려보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루시엘의 마나 상태를 진찰하던 시클라인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가 마님의 마나는 최근까지도 안정적이었고 마나량도 넘쳤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시클라인의 말을 듣던 솔리아페도 고개를 주억이며, 상심에 빠진 키제프에게 물었다.
“……키제프, 루시엘이 신전에서 쓰러진 것이니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구나. 누구 정확한 상황을 아는 이가 없니?”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키제프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별궁에 이네스가 남아 있었고, 캐서린도 루시엘이 아스트리야에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루시엘은 웬 탑 앞에서 이걸 쥔 채 마나가 말라 쓰러져 있었고요.”
목에 걸린 보석이 어찌나 소중한지, 루시엘은 여전히 주먹을 꼭 쥔 채였다.
“아, 루시엘이 어둠의 심장을 정화하러 간다기에, 위험하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고 가라고 했는데……. 이네스의 모습으로 간 것 같아요, 어머니.”
키제프의 이야기를 듣던 솔리아페가 추측했다.
“아무래도 저 하늘색 보석이 뭔지 알아내야 할 것 같구나.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인걸.”
“……네, 아무래도 이게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때마침 캐서린과 노아, 챈들러가 귀환했다. 루시엘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놀란 그들은 신전의 소식도 곧장 전했다.
“어째서 아가 마님께서 쓰러지신 겁니까……?”
충격에 싸인 노아가 급격히 어두운 얼굴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캐서린의 얼굴도 덩달아 흐려졌다.
“……기쁜 소식을 가져왔는데 웃을 수가 없네요.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시길 정화의 주문이 완성되었고 그 결과 어둠의 심장이 껍데기만 남았다더군요.”
“……잘됐군. 루시엘이 바라던 바야.”
분명 좋은 소식이었으나, 쓰러진 루시엘을 보니 키제프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이내 캐서린이 루시엘의 손안에 있던 하늘색 보석을 보았다.
“저건, 추기경님의 성물 루미티어스인데……. 설마!”
캐서린의 반응을 보니 키제프는 역시 제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정황상 추기경이 아니라, 루시엘이 어둠의 심장을 정화한 주문을 완성한 것 같군. 저 성물의 힘을 빌려서 말이지……. 루시엘의 거대한 마나는 그 주문을 위해 소진된 것이고…….”
키제프가 그리 말하자, 시클라인이 말했다.
“그럼 저 성물 때문에 아가 마님이 지금 마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신지도 몰라요.”
키제프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성물 루미티어스를 루시엘의 손에서 빼내 협탁 위로 올려놓았다.
시클라인은 마나 영양제를 비롯해, 챙겨 온 약초 상자를 열었다.
“자, 이제부터 아가 마님의 마나 회복과 안정을 위해 다들 나가 주시겠어요?”
시클라인의 말에 키제프와 솔리아페, 구석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기하던 베시만이 남고 모두 물러갔다.
“아, 베시는 한 시간 후쯤 치료 사제 한 분만 불러 주세요.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신 분으로요…….”
모두가 나간 틈을 타서 키제프와 솔리아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루시엘이 맡겨 두었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마나를 품은 보석을 내놓으며 부탁했다.
“시클라인, 이걸 사용해 주게. 우리 새아기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아깝지 않으니.”
“이것도. 어쩌면 사제의 치유 마법보다 효과가 더 강력할지도 몰라.”
* * *
루시엘은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기운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는 별궁의 침실이었다. 그녀의 침실 주변에 가득 쌓여 있는 것들을 발견한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바라면서 도착한 여러 가지 선물이나, 명약, 마도구 같은 것들이 쌓여 있던 터였다.
싱그럽게 핀 생화나, 향긋한 재스민과 허브 화분, 달콤한 사탕이나 디저트, 귀여운 인형과 책도 있었다.
그리고 바구니에는 쾌유를 바라는 편지와 카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누가 보면 한 달쯤은 아픈 줄 알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걱정 끼쳤다니.”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이 뭉클 솟았다.
‘그러고 보니 나 어떻게 여기 온 거지?’
퓨리피케이션을 완성한 다음, 기절해 버려서 그 뒤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트리야의 어둠의 심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루시엘의 상태를 살피려고 들어오던 시클라인이 깨어난 루시엘을 보고는 놀라 냉큼 들어왔다.
“아가 마님.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다행이에요.”
“어라, 시클라인. 왜 여기 와 있어요?”
평소에도 무척 바빴던 그녀였기에 루시엘은 자못 의아했다.
“왜긴요, 아가 마님의 마나 건강은 누구보다 제가 책임져야죠. 약제원은 잠시 다른 약제사들에게 맡겨 두고 와 있어요.”
“아……. 고마워요.”
“뭘요. 마나가 그렇게나 전부 소진이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지금은 어떠세요? 마나의 흐름이 한결 편해졌지요?”
시클라인의 말대로 그녀의 심장을 도는 마나가 가득 채워졌고, 흐름도 정상이었다. 심장박동도 정상이었다.
“맞아요, 마나가 바닥났었던 건 처음이었어요.”
루시엘은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목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없었다.
성물 루미티어스.
당황한 루시엘이 흠칫 놀라서 시클라인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하늘색 보석 못 봤나요?”
“아, 그건 소공작님께서 지니고 계세요.”
“키제프가 가지고 있었구나.”
“네, 소공작님께서 아가 마님을 데려오셨다고 들었어요.”
시클라인은 그리 말하며, 트레이를 끌고 와 루시엘에게 먹일 약을 준비했다.
그사이 진홍빛 눈동자를 굴리던 루시엘은 신전 맞이까지 삼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키제프를 만나러 가야겠어.’
몸을 일으킨 루시엘이 침대에서 내려와 폭신한 슬리퍼를 신었다. 그날과는 다르게 확실히 몸도 가뿐해지고, 마나 상태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기존 마나 영양제보다 조금 더 진하게 우렸는데 이것 좀 드셔 보실…… 잠깐만요, 아가 마님! 어디 가시려고요?”
“키제프를 만나려고요.”
“약 드시고 누워 계시면 제가 불러다 드릴게요. 아직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아요.”
마음은 급했지만 일단은 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완벽히 회복해야만 하니까.
“……!”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던 루시엘에게 시클라인이 웃으며, 딸기 사탕을 건네주고는 나가기 전 물었다.
“밖에 아가 마님을 뵙고자 하는 분들이 줄을 서 계시는데, 그럼 소공작님만 불러드리면 되지요?”
“네, 우선은요.”
빈 그릇이 담긴 약 트레이를 가지고 시클라인이 나간 후, 얼마 뒤 키제프가 들어왔다.
잔뜩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자,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키제……!”
그러나 루시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키제프가 그녀를 눈에 담으며, 꽉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없이 긴 포옹을 마친 키제프가 신음을 토하듯 말했다.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누워 있는 동안 난 죽어 가고 있었어.”
“……설마 한숨도 못 잔 거야?”
“당연하지. 부인이 기절해서 깨어나질 않는데…….”
보아하니 눈도 퀭하고, 낯빛도 파리한 게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보야. 아무리 내가 안 깨어나도,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너라도 몸을 잘 돌보아야 남은 일도 도모하고, 가족들도 챙길…….”
그러나 갑자기 별궁의 침실 앞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문이 달칵 열리며 눈이 퀭해진 가족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공작과 솔리아페, 레오니까지.
덕분에 방 안이 금방 떠들썩해졌다.
“우리 딸! 네가 깨어나다니 아빠는 이제 소원 없다.”
“……누나아! 도무지 수업이 머리에 안 들어와서 내 눈으로 직접 보러왔단 말이야. 인제 괜찮아?”
뒤늦게 알고 헐레벌떡 달려온 길리아트도 가슴을 퍽 치며 할아버지 자격이 없다고 울분을 토했다.
다들 못 말리겠다며 루시엘이 자신의 멀쩡히 나은 몸을 보여 주며 일어나서 한 바퀴 몸을 돌자, 가족들이 어어, 하면서 혹여 쓰러질까 조바심을 내며 지켜 주듯 둥글게 모였다.
‘……고작 기절한 거로 다들 이렇게 크게 걱정해 주다니, 너무 과분해.’
그렇지만 그들의 과하고 커다란 사랑이 너무나 감사했다.
가족들과도 한 번씩 포옹을 나눈 루시엘이 감동으로 토파즈를 또롱, 또롱 만들었다.
“고맙고 사랑해요. 그치만 조금 부끄러운 걸 사실이에요. 이렇게 야단날 만큼 아프진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 루시엘. 네가 아픈 것만큼 벨슈타인의 큰일은 없다.”
공작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고, 레오니도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요, 아버지!”
“레오니,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얼른 학술원으로 돌아가야지.”
루시엘이 레오니의 금발을 흩뜨려 놓으면서 말하자, 레오니가 진한 눈썹을 꿈틀대면서 새빨갛고 통통한 볼을 붉히며 말했다.
“누나가 아프면 공부도 할 필요 없다구!”
“그래도 공부는 해야지. 레오니가 멋진 사람이 되길 기대하고 있어.”
루시엘이 따뜻한 눈길로 레오니에게 말해 주었다.
가족들의 애정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루시엘이 말했다.
“근데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 키제프였어? 어떻게 알고?”
“그야 너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지.”
키제프가 미소를 보이며 루시엘의 손목을 들어, 팔찌를 보며 말했다.
“……팔찌 착용했더군. 이거 덕분에 알 수 있었어. 고마워, 루시엘.”
두 사람에게는 서로의 운명을 묶어 주는 의미가 남다른 팔찌였던 터라, 루시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아스트리야에 떠나기 전 착용하고 갔었다.
그런데 이게 도움을 줄 줄은. 팔찌가 없었다면 정말 큰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참, 이건 너에게 돌려줄게. 추기경 대신에 정화의 주문을 완성하느라 고생했어…….”
키제프가 루미티어스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아, 알았구나. 미리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미안.”
“기절했는데 어떻게 말하겠어. 그보다는 효과가 굉장하다던데…….어둠의 심장이 껍데기만 남았다고 해.”
“정말? 다행이다……. 효과가 있어서.”
루시엘이 안도하며 말했다.
“근데 이틀을 몽땅 허비해 버려서. 신전 맞이까지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유리관 제작은 이벨린 할머니가 드락카의 고대 석판을 이용해 만들면, 더 강력한 주술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셨어.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야.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는데…….”
“열흘만 더 빨리 막스씨에게 유리관 제작과 재료를 전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루시엘은 제 손가락에 끼고 있던 페어리 문을 보았다. 그러자 어쩐지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키제프,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어. 시간의 책으로 돌아가 막스 씨에게 유리관 제작에 대해서만 미리 전달하고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