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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66)화 (266/282)

<266화>

‘덫이나 주문이 통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유리관을 제작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시간이 없거든요.’

뜨거운 유리 가마가 있는 공방에서 나와, 잠시 더위를 식히던 막스는 루시엘이 건네준 스케치와 설명을 다시금 떠올렸다.

‘……근데 이것 너무 위험한 물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최선을 다해볼 요량이었다.

루시엘은 그에게는 은인과 같은 사람이었으니.

‘루시엘 님처럼 선량한 분이 이유도 없이 다른 이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아. 분명 목적이 있으시겠지.’

도면 설계는 마쳤고, 유리를 만드는 것은 장인 길드의 제자들이 와서 매일 도와주고 있었다.

유리관 제작은 모레까지는 빠듯하지만, 무리한다면 가능했다.

마침 공방을 둘러보다가 나온 벨슈타인의 소공작이 막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둘러보셔도 됩니다.”

막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루시엘의 남편이기도 한 키제프 소공작은 어린 나이임에도 실로 두려움과 위압을 느낄 만한 기세를 내뿜었다.

“안은 적당히 둘러봤다. 그보단 자네에게 이 유리관에 특별한 트랩 설치를 제안하고 싶어서.”

이어서 그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말을 입에 담았다.

“기왕이면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유리관이 필요한데. 바닥에 쇠가시가 튀어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예?”

“사지가 잘리는 쇠고랑을 숨겨 놓는 건 어떤가?”

“…….”

곱상한 얼굴로 턱가를 문지르며, 그런 말도 서슴지 않아서, 심약한 막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죄송하지만 누, 누구를, 아니 용도가 어떻게 되십니까. 쇠가시나 칼날이 달린 쇠고랑은 숨기기엔 조금 어려울…….”

막스가 숨을 꼴깍 넘기면서 조심히 묻자, 그가 서늘한 붉은 눈을 굴리며 답했다.

“아주 간악한 죄인을 가둘 물건이지.”

“그, 그렇군요. 간악한 죄인을 가두려면 어, 얼른 작업해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옛.”

그의 무서운 살기에 짓눌린 막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뜨거운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혼자 남은 키제프는 고민에 빠졌다.

‘……유리관은 어찌 제작이 빠듯하게 될 것 같지만, 내부에 마법 트랩이라도 숨겨 두어야만 할 텐데.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얼마 후 벨슈타인의 마차가 이브나크의 하멜 공방에 당도한 터였다.

연보랏빛 양산을 쓴 귀부인이 내렸다. 사랑스러운 손주의 얼굴을 확인한 이벨린이 드레스를 끌고 흐뭇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심각하게 굳어 있던 키제프의 뾰족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키제프, 네가 이쪽으로 향했다고 하기에 부지런히 왔단다. 나도 마침 신전 맞이를 위해, 그릇을 사려고 했거든. 너와 루시엘은 유리관을 제작 중이라고 들었다만.”

에바에게 듣긴 했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그녀였기에, 마침 볼일도 있으니 겸사겸사 찾아온 터였다.

“……네. 황비를 가둘 유리관이 필요해요. 레이븐이 악령을 유리에 가둔 후, 깨트리면 처치할 수 있다고 해서요.”

“흐음, 그건 고대 주술적인 방법이구나. 고대 주술하면 또 드래곤이 아니겠니.”

이벨린이 밝게 웃은 후, 이채가 도는 푸른색의 눈을 빛냈다.

“그럼 유리관이 더 강력한 주술을 발휘할 방법이 있을까요? 눈에 띄지 않게 트랩을 장치하려면 주술이든 마법이든 필요해요.”

이벨린이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다, 다만 유리관을 깨트리는 주술을 완성하려면 재료가 하나 필요한데……. 그건 드락카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야.”

“…….”

그 말을 듣자 키제프의 금빛 눈썹이 축 늘어지며 흐려졌다.

“드락카를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긴 하지. 나도 알아보도록 하마.”

“근데 그게 무슨 재료입니까?”

“드락카의 고대 예언이 적힌 석판이란다.”

그녀의 말을 들은 키제프는 잠시 아공간 포켓을 개방해, 뒤적거렸다.

“혹시…… 이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이게 맞구나. 이걸 어떻게 갖고 있었니?”

“저의 시련이 나타났던 석판의 일부인데, 기념으로 가지고 있었어요.”

이벨린이 석판 조각을 받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고오오.

보랏빛 드래곤 마나를 흘리자, 석판이 잠시 손바닥 위에서 떠올랐다. 확실했다. 고대의 강력한 드래곤의 힘을 품은 석판이었다.

“이걸 가루로 빻은 다음, 유리를 제작할 때 넣어 달라고 해야겠구나. 그리고 나머지 가루로는 여러 가지 주술이 담긴 투명 부적을 만들어 보도록 하마!”

이벨린의 말에 키제프가 깊이 감사하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할머니께 진즉 도움을 청할 걸 그랬어요.”

“너희들의 행복을 위협하는 황자와 그 어미인 황비를 잡는 일은 내게도 가장 중요한 일이지. 도움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나의 기쁨이다. 키제프.”

“감사합니다, 할머니.”

이제야 겨우 방법을 찾았단 생각에 키제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순간 느껴진 불빛에 키제프는 손목에 끼고 있던 오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루시엘에게 선물했지만 아직 그녀는 착용하지 않았던 거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빛이 나다니 무슨 일이지? 착각인가? 그게 아니면 루시엘이 착용했을지도 몰라.’

드디어 제 선물을 허락해 준 듯해,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이제 이로써 루시엘은 영원히 자신의 반려가 될 것이었다.

혼자서 헤벌쭉 귀를 붉힌 채 웃고 있는 키제프를 보며 이벨린이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이니?”

“아뇨, 아닙니다.”

“……그건.”

그러나 이벨린은 그 오팔을 알아보았다. 자신 역시도 길리아트와 사랑의 증표로 나누어 꼈던 물건이었다.

쑥스러운 듯 소매를 내려 팔찌를 감추는 손주의 듬직한 어깨를 보며, 등을 두들겼다.

“……우리 키제프, 이제 그야말로 장성한 남자가 되었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놓치지 않는 집착이 아주…… 드래곤과 마족의 핏줄답다고 해야 할까.

‘철저하구나. 우리 루시엘을 놓치는 일 따위는 없겠어. 바람직한 일이지. 암.’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키제프가 힐끔 그녀를 보았다.

“할머니, 왜 그러시는…….”

“응? 아니 기특해서 그런 거란다.”

이벨린은 곱게 눈을 접으면서 부채질을 하며, 마차로 다시 올랐다.

* * *

번쩍!

이내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거대한 빛줄기가 찰나 눈부시게 빛났다.

천공섬의 지면이 살짝 흔들리자 차단막을 유지하는 일에 힘쓰던 하인델도 수 초 빛나던 오벨리스크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저건 안드레아 추기경이 퓨리피케이션을 성공한 건가?’

하인델은 차단막을 보다 높이 강화했다.

제 방 집무실에서 오벨리스크 쪽을 내내 주시하면서 그 번쩍이던 빛을 보던 안드레아도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성공했구나!”

안드레아는 기쁜 낯으로 집무실 안을 뒷짐 지며 서성거렸다. 변장해서 근처라도 가 볼까도 싶었으나, 루시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참이었다.

파아앗.

마법진이 사라지고, 거기서 뿜어지던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천공섬의 전체로 뻗어 나갔다. 깨끗하고 맑은 정화의 힘은 섬의 뿌리 깊은 곳까지 닿았다.

“……으.”

그러나 루시엘은 홀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비명을 토해 내기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다.

과도하게 혼신의 힘을 쓴 탓일까.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거렸고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평소 넘치던 마나가 전부 소진될 만큼 힘에 부친 일이었다.

‘히, 힘이 안 들어가.’

루시엘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느꼈다. 그래도 어떻게든, 퓨리피케이션의 주문은 완성해 낸 것 같았다. 오벨리스크의 끝까지 타고 올라간 그 빛을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해, 해냈어. 이제 그 효과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데에.”

마나가 이렇게까지 바닥이 난 건 처음이었다.

‘……마나가 없어서 권속도 불러낼 수가 없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루시엘은 소매를 걷었다.

어느새 그녀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손목에 오팔 팔찌가 드러났다.

“………누, 누가 도와줘. 키제프……!”

웅얼거리던 루시엘은 이내 털썩,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성기사 하인델은 안드레아가 쓰러진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다가가려고 했으나, 그의 앞에 누군가 와 있었다.

바로 오라클의 고위 신관 중 하나인 카인이었다.

하인델의 건장한 체구와 짙은 차단막 덕분에 카인의 시야는 가로막힌 채였다.

“……하인델, 자네는 예서 뭘 하고 계시는가?”

“추기경께서 잠깐 오벨리스크에서 기도를 드리고 계시오.”

“방금 빛 같은 것이 근처에서 빛나지 않았던가?”

하인델이 앞을 턱 가로막고는 말했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어허, 이 사람 보게. 누굴 장님으로 아는 건가. 오벨리스크 쪽에서 분명……. 그리고 나도 안드레아 추기경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네.”

그러자 하인델이 방패와 창을 더욱 높이 쳐들었다.

“추기경님께서 직접 혼자 있게 해 달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이 이상 접근은 허락지 않겠습니다.”

눈에 힘을 주고 내쫓자 카인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칫, 그럼 끝나는 대로 알려 주시게.”

카인 신관이 사라지는 걸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하인델은 차단막 안에 있어야 할 추기경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오벨리스크 앞에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어디로 간 거지? 안드……!”

추기경이 사라진 긴급 상황에 놀란 하인델이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참고는, 서둘러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그가 다른 성기사를 부르기 위해서 오벨리스크 앞을 벗어났다.

루시엘을 안은 채, 인근에 기척을 숨기고 숨어 있던 키제프는 그제야 겨우 그녀를 살폈다.

의식을 잃은 루시엘은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루시엘!”

어느새 그의 붉은 눈에 물기가 서렸다.

신전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환하게 웃던 루시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루시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응?”

그러고 보니 그녀의 넘치던 요정의 마나가 체내에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채 되지는 않았지만, 키제프는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오팔 팔찌가 붉은색으로 빛나 놀라서 결혼반지를 사용해 이동해 보니, 아스트리야의 탑이었고 루시엘은 이미 기절한 채였다.

“이건 뭐지.”

루시엘이 손에 쥐고 있는 하늘색의 보석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때였다. 다시 아까의 그 성기사를 비롯해 다른 기사들이 돌아다니면서 누군가를 찾는지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키제프는 몰래 별궁으로 가는 포탈을 열었다.

지금은 그저 제 품에 안긴 이 소녀가 무사하길 기도하면서.

키제프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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