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이네스, 오늘 하루 기사단에서 쉰다고 해 둘 테니, 제 방에서 시간 좀 보내 줄래요? 아, 그리고 갑옷도 빌려줘요. 이유는 묻지 말고요.”
별궁으로 미리 불러 놓은 이네스에게 루시엘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부탁했다. 루시엘이 영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거기에 다른 기사들과 따로 불러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측한 이네스였다.
“아가 마님의 안전을 위한 일입니까?”
“정확해요.”
“그렇다면 명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만 푹 쉬고 있어요. 별궁을 통째로 써도 좋아요. 5분 동안은 밖으로 나오지 말고요!”
루시엘의 요구에 이네스가 대답하고는, 갑옷을 벗어 주었다. 루시엘은 그녀가 갈아입을 옷과 갑옷을 교환해서 드레스룸으로 갔다.
블랙 다이아몬드를 손에 꼭 쥔 채로 눈을 감고, 화장대 거울 앞에 선 다음 이네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루시엘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갈색의 짧은 머리, 큰 키를 가진 이네스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큰 키와 시원시원한 팔다리는 늘 부러운 점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얼른 검은 천으로 거울을 뒤덮은 다음 이네스가 준 갑옷을 입었다.
근데 입고 보니, 뒤늦게 생각이 났다. 처음부터 갑옷을 입은 이네스를 상상하면 된다는 걸.
‘……바보 루시엘, 다음엔 그렇게 해야겠는걸.’
배시시 웃은 루시엘은 캐서린과 노아를 만나기 위해 별궁의 입구로 나갔다.
그러자 노아가 그녀를 발견하곤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네스 선배, 일찍 오셨네요?”
“응, 아가 마님께서 따로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그렇군요. 근데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신 겁니까?”
“……아니, 왜?”
루시엘이 날렵해진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노아가 유독 자세히 보는 게 느껴졌다.
‘혹시 이네스가 아니란 게 티 나나?’
“이네스 선배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실없긴.”
노아의 말을 들은 루시엘은 아차 싶었다. 이네스는 평소에는 무표정을 고수했는데, 저도 모르게 웃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 챈과 캐서린까지 도착했다.
“안에 아가 마님께서 계신가요?”
캐서린이 별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 루시엘이 서둘러 막아서며 말했다.
“우선 우리끼리 아스트리야에 가서 신전의 상황과 추기경님의 안전을 확인해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내 네 사람은 캐서린의 열쇠를 이용해 함께 안드레아 추기경의 회의실 앞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성기사 하인델이 기다렸다는 듯, 맞아 주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이었다.
“벨슈타인 공자비님께서는……?”
캐서린이 대신 나서서 말했다.
“벨슈타인 본성에 계십니다. 우리가 먼저 시찰을 나왔어요. 추기경님은 안에 계시지요?”
“오라클의 신관들과 정화 작업을 시도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시오. 방문을 알리겠소.”
돌아온 하인델이 문을 열어 주었다. 캐서린과 함께 모두 들어가니 안드레아 추기경은 자못 파리한 안색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서들 오시지요. ……기다렸던 공자비는 안 오셨군요.”
“아스트리야의 상황을 먼저 알아보고 오라는 명이 있으셨답니다.”
그리 말한 캐서린은 자못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실은 추기경님의 안전을 염려하셨어요. 다른 신관들에게 알리셨다고 하니, 혹시 정보가 새어 나갔을지 모르니까요.”
“……믿을 만한 자들에게만 알렸습니다만. 어쨌든, 그 어둠의 심장이라는 걸 발견하고 정화 작업을 시도하다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습니다.”
안드레아가 일어나 안내했다.
그의 집무실 탁자 위에 검붉은 덩어리가 있었다. 루시엘은 그걸 보자,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프리다 박사의 기억에서 빼낸 영상석 속 어둠의 심장. 그것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잘 보십시오. 성수가 닿으면……이렇게 되더군요.”
안드레아가 어둠의 심장 위로 성수를 부었다. 그러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무언가에 달궈지기라도 한 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살점 같은 것이 푹 터졌다.
“……저게 효과가 있으니, 성수를 사용해 파괴하면 되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노아도 말을 보탰다.
“이걸로는 어둠의 심장을 완전히 뿌리까지 뽑아 내기에는 부족합니다. 성수를 전부 사용한다 한들, 어둠의 심장 하나를 없애기에도 모자랄 겁니다.”
안드레아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공자비님께 여기까지 전달해 드리고, 해결책을 위해 같이 고민해 주시길 간청드리겠습니다.”
캐서린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래도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럼 얼른 통신을 해서 알려드릴…….”
“잠깐만요. 아가 마님, 아니 공자비님께서 제게 따로 일러주신 말이 있습니다. 잠시 추기경님과 단둘이서만 대화할게요.”
이네스의 모습을 한 루시엘이 말했다.
비로소 안드레아와 둘만이 남게 되자, 루시엘이 품 안에서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이걸 내어주셨어요. 강한 치유의 힘을 가진 물건입니다. 성수를 부어 사용하는데, 그렇게 하면 치유력이 커져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내민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건네받은 안드레아는 깜짝 놀랐다. 다이아몬드에서 뿜어지는 강한 힘은 실로 성물에 버금갈 정도였다.
“성물도 아닌데 이렇게 강력한 치유력을 가진 물건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공자비님의 기사가 아니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호박색 눈동자가 빛났다. 아까부터 그의 목에 걸린 성물 루미티어스가 계속해서 푸른 빛을 내며 반응했던 터였다.
“……역시 눈치채셨군요. 맞아요, 지금 마법으로 모습을 잠시 바꾸었어요. 제가 루시엘이에요. 황자가 저를 노려서 일부러 모습을 바꾸고 왔어요.”
“처음엔 저도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성물이 빛을 깜빡이는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요. 그 점은 이해가 됩니다.”
안드레아가 고개를 주억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정체를 밝히셨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죠. 아스트리야를 도와주십시오.”
“……다이아몬드의 힘으로는 부족할까요?”
아까 출발하기 전에 아스트리야를 위해서 기도를 올리자, 루시엘은 다이아몬드를 생성할 수 있었다. 준비한 다이아몬드는 꽤 개수가 많아서 더 줄 수도 있었다.
“보석에 성수를 부어서 쓰는 것 말고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 말고 아스트리야에서 지금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세 번째 추기경님도 계시지 않은가요?”
“그분은 연로하신 데다 애초에 신성력보다는 학식으로 그 자리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그렇군요.”
잠시 고민하던 루시엘이 말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저는 마법을 꽤 다룰 줄 아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지요.”
“신전의 문제는 신전이 알아서 해결하시겠다고 들었지만요.”
캐서린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들은 것이 생각나서 루시엘이 농담하자, 안드레아가 민망해하며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하는 신성 마법은 고작 결계를 더 강화하고, 치유하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면, 저보다 나을지도요. 무엇보다 이 루미티어스가 반응하는 당신을 믿고 싶기도 합니다. 이걸 잠시 빌려드릴 테니, 사용해 보겠습니까?”
안드레아가 제 목에 걸린 루미티어스를 풀어서, 루시엘에게 건넸다.
이런 중요한 물건을 자신이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건가 싶어서 망설여졌다.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게 왜 나에게 반응하는 걸까……?’
루시엘이 눈을 깜빡이며, 안드레아에게서 루미티어스를 받아 목에 걸어 보았다. 그러자 하늘색의 보석이 깜빡임을 멈췄다.
두근, 두근.
파아앗!
휘오오!
루시엘의 심장을 채우던 거대한 마나와 루미티어스가 품고 있던 강한 신성력이 만나서 작은 바람을 일으키더니 일순 주변이 밝아지는 듯, 은은한 빛의 물결이 퍼졌다.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안드레아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역시 루미티어스의 힘은 공자비와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성물과의 공명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공명이요?”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안드레아가 대답해 주었다.
“성물과 파장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강력한 마나를 지니고 있어도 튕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대마법사라도 성물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그는 신성력을 가지지 않은 자가 성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좀 신기한 모양인지, 루시엘을 전보다 더 친근하게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한번 마나를 모아 보시지요.”
고개를 주억거린 루시엘이 제 심장으로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나와 더불어 따뜻하고 맑은 기운도 같이 모여들었다.
“마나와 함께 신성력도 같이 모일 겁니다. 그동안 마나만 사용하던 체내가 성물로 인해, 기존의 마나도 신성력으로 치환해 준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구나. 너무 신기해요! 그럼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요?”
“우선 이것부터 외워 주시지요. 하루 성녀님.”
안드레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성스러운 빛의 두루마리를 하나 펼쳤다.
“이게 바로 신성 마법 중에서 강력한 정화의 힘을 가진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입니다. 결계와는 달리 지반까지 효과가 있을 테지요. 부끄럽게도 저는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만, 강한 힘을 가진 당신이라면 다를 겁니다.”
거기엔 제국의 고대어로 아주 길고 긴 주문이 적혀 있었다. 장장 3페이지에 달했다.
“……이걸 전부요?”
성녀 체험을 하는 건 좋았지만, 신성 마법의 주문 길이를 보니 낭패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 생의 기억도 차곡차곡 떠올린 자신이었다. 루시엘은 골똘히 집중한 채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완전히 집어넣으셔야 합니다.”
“……네, 하고 있어요.”
삼십 분 후, 그걸 달달 외운 루시엘이 답했다.
“다 됐어요, 추기경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로 변신하는 일도 가능합니까?”
“……네, 허락해 주신다면요.”
“좋습니다. 그럼 이제 저로 변신해 오벨리스크로 가셔서 퓨리피케이션을 외워 주십시오.”
“알겠어요.”
고개를 주억인 루시엘이 거울과 블랙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안드레아로 모습을 바꾸었다.
루시엘은 하인델에게 가서 명했다.
“……오벨리스크로 안내를 부탁해. 호위는 자네만.”
“……오벨리스크로 말입니까?”
“그래, 은밀히 퓨리피케이션에 도전할 것이다. 자네는 주변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차단막을 생성해 줘.”
“알겠습니다.”
하인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무릎을 꿇고 명에 따라 움직였다.
이내 신전과 교황청을 이어 주는 중앙 통로로 다다랐다. 그곳에 세워진 길쭉하고 새하얀 오벨리스크가 보였다.
주신 레트라논을 찬양하는 기도문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오벨리스크는 아스트리야의 중심이 되는 탑입니다. 그곳에서 마나를 펼쳐 기도하듯이 아까 알려드린 축문을 외우시면 됩니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며, 오벨리스크 앞에 무릎을 꿇고 제 품에서 반짝이는 루미티어스를 손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루시엘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페어리 문과 루미티어스가 맞닿으며, 더욱 강력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마나를 펼치자 심장 안에 마나와 신성력이 함께 사르르 휘돌면서, 루시엘의 몸이 잠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내 어마어마하게 강한 두 힘이 만났다. 그러나 충돌하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 듯이 팽그르 돌아 융합되는 것 같았다.
‘성공할 수 있을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연신 두근거렸다.
아니,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모든 걸 구원할 수 있어.
아스트리야도, 벨슈타인도.
루시엘은 눈을 감고 기나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에 새하얀 빛의 신성한 마법진이 물결치며 생성되었다.
“만물의 천지를 만드는 위대한 신이시여. 하늘을 여는 천상의 힘을 이 몸에 담아, 축복의 날개를 빌려주시옵고……. 어둡고 추악하고 삿된 것들을 몰아내시어 이 땅에 안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옵나이다.”
퓨리피케이션의 축문을 모두 외우고 자신의 진심이 담긴 기도도 더했다.
‘……신이시여, 제발 어둠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루시엘의 발밑에서 둥글게 빛나던 소환진의 신성한 빛이 오벨리스크의 끝까지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