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그러나 루시엘은 제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을 말했다.
“다 좋은데 지팡이에 달 보석을 세공해 버려서, 어쩌면 시간의 책을 다시 못 볼지도 몰라.”
“……그건 네 보석 열두 개를 모아서 다시 만들면 되지 않을까?”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왜냐면, 보석을 합성할 수 있는 요정의 용광로가 없어졌거든.”
“……다시 구하면 되지.”
“그것도 안 돼. 난쟁이 경매소에서도 엄청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고 했단 말이야.”
“그렇군. 하지만 아쉽지 않잖아. 모든 속성의 마법을 하게 되었으니까.”
“응. 그치만 키제프에게 시간의 책을 보여 주지 못했는데. 그리고 언니도 아직 만나지 못했어…….”
루시엘이 아쉬운 얼굴로 말하면서 흐린 표정을 지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키제프가 루시엘의 보드라운 은발을 쓰다듬어 줄 때였다. 루시엘의 통신구가 빛났다.
“엇, 할아버지시네.”
지팡이를 받아 본 루시엘의 반응이 궁금했던 모양인지, 길리아트에게서 통신이 왔다. 활기찬 목소리로 루시엘이 물었다.
“할아버지, 직접 오셔도 되는데 통신으로 하셨어요?”
―음. 그거야 너희 둘의 알콩달콩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지! 어쨌든 지팡이를 써 본 소감이 어떠냐, 루시엘.
그 역시 루시엘에게 지팡이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져서 유쾌해 보였다.
“최고예요, 할아버지. 갑자기 대마법사가 된 기분이에요. 사랑해요!”
루시엘은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애정을 담뿍 담아 말했다. 그러자 잠시 놀란 듯하던 길리아트가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나도 우리 손주 며느리를 사랑한다. 그 정도로 만족감이 큰 지팡이인 모양이군. 류프델과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보석의 힘은 측정 불가인 듯하더구나.
류프델이 삼 일을 꼬박 밤을 새워 가면서 제작할 정도로 다루기 어려웠지만, 완성한 후의 강한 힘을 확인하고는 둘 다 입을 틀어막을 정도였다.
“근데요, 할아버지. 이제 이 보석을 지팡이 세공에 사용해 버렸으니, 지난번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는 없겠지요?”
루시엘의 아쉬운 목소리를 들은 길리아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런. 내가 그걸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구나. 루시엘, 달 보석의 이음새에 있는 드롭 형태의 결정이 있지 않더냐?
길리아트의 설명에 루시엘이 얼른 자신의 지팡이를 살펴보면서 답했다.
“잠시만요, 아 있어요!”
―거길 꾹 눌러서 회전시켜 보렴.
이내 길리아트의 말대로 보석을 꾹 눌러서 회전시키자, 딸깍 소리가 나면서 지팡이에서 달 보석이 분리되었다.
“엇…… 지팡이에 세공했던 게 아니에요?”
―자세히 보면 달 보석 이음새에 세공 장치가 부착되어 있단다.
그의 말대로 달 보석의 하단을 살피자 은색의 금속 장치가 있었다.
“와, 새로운 세공 방식이었군요. 할아버지! 이제 다시 시간의 책에도 가 볼 수 있겠네요.”
영영 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는데, 보석을 손상시키지 않고 다시 다녀올 수 있을 듯해서 다행이었다.
―옳지. 류프델이 그걸 꼭 설명해 주라고 했는데 잊었군. 이제 고민은 해결되었구나, 루시엘.
“네, 감사해요. 고민이 크셨을 것 같아요. 류프델에게도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죠?”
늘 투덜거리면서도 루시엘이 원하는 건 모든 뚝딱뚝딱 만들어 주는 난쟁이 류프델이 항상 고마웠다.
―류프델도 그걸 만들면서 행복해하더구나. 루시엘, 네가 좋아할 거라면서 말이지.
“정말로 좋아요. 다음에 보답으로 제가 직접 구운 쿠키를 구워 가야겠어요.”
고개를 깊이 주억거린 루시엘은 류프델을 기쁘게 할 방법을 떠올렸다.
―험험, 그 난쟁이 놈보다 이 할애비가 먼저 아니냐. 루시엘.
섭섭한 듯한 투로 길리아트가 농담 삼아 말하자 루시엘이 얼른 그를 안심시켰다.
“물론 할아버지께 가장 먼저 가져다드린 다음에요.”
애정 어린 인사와 함께 길리아트와 통신을 끊고는 루시엘이 키제프와 눈을 마주쳤다. 기쁜 마음이 서로의 눈에 비치며 호수처럼 맑게 일렁거렸다.
“달 보석이 분리되어서 다행이야. 이제 지팡이 속 공간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성장을 안 한 걸까?”
“……이리 와. 내가 성장시켜 줄게.”
키제프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짓궂게 말했다. 루시엘은 못 말려, 하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내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다시 레비테이션을 이용해서 별궁의 입구로 사뿐 내려왔다.
“나는 마검을 파괴하거나 카일라를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볼게.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알겠어. 나는 우선 아스트리야를 조사해 보라고 연락을 해야겠어.”
“아, 그리고 지팡이와 친해지는 방법을 더 찾아봐. 어쩌면 이미 성장이 되었는지도 모르니까.”
“응.”
별궁의 문을 열어 준 키제프는 루시엘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곤 등을 돌렸다.
키제프의 조언을 되새겨 보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루시엘은 눈동자를 굴렸다.
하긴 마법 세공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루시엘 본인이 없었으니, 이미 지팡이가 성장을 마친 후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는걸.”
혼자 남은 루시엘은 지팡이를 내려놓고는 생각에 젖었다.
우선은 지팡이를 성장시켜 달 보석의 마지막 힘을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둠의 심장이 아스트리야의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먼저 아스트리야에 있는 안드레아 추기경과 아르제온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어…….’
루시엘이 통신구를 꺼내려다가 별궁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베시와 눈이 마주쳤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쩐지 오랜만에 마주치는 기분이라 더 반가웠다.
“아가 마님, 분주해 보이시지만 잠깐 디저트를 내어드려도 될까요? 세스 주방장이 꼭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요.”
별궁에서 두 사람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길리아트의 명이 있었지만, 마침 그곳을 나서는 키제프를 보고 달려온 베시였다.
“베시! 왜 그렇게 숨이 차게 달려왔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스 주방장님의 디저트는 거절할 수 없지.”
루시엘의 말에 베시는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디저트 테이블을 차려 주었다.
새하얀 우유맛 아이스크림과 생크림, 딸기를 넣고 돌돌 말려 있는 하얀 롤케이크. 접시에는 귀여운 토끼 모양 초콜릿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윽…… 너무 귀여워서 못 먹겠어. 나 혼자 먹으려니 키제프에게는 조금 미안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루시엘은 오물오물 야무지게 포크로 롤케이크 두 개를 순식간에 먹었다.
사르르 입 안을 채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생크림의 조화는 진정한 행복이 틀림없었다.
“세스 주방장에게 너무 잘 먹었다고 전해 줘. 베시도 챙겨 줘서 고마워. 그리고 본성에 쉬고 있는 캐서린을 불러 줘.”
“알겠어요.”
* * *
루시엘은 캐서린과 함께 안드레아의 허락을 받고, 몰래 추기경실로 황금열쇠를 이용해 이동했다.
“추기경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루시엘은 차분하게 프리다 박사에게 들었던 어둠의 심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형 군단이 소환될 사악한 것임을 알리자 안드레아의 호박색 눈동자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추기경 홀을 꾹 쥐었다.
“어떻게 그런 사악한 짓을!”
“그리고 그걸 레이놀드 황자가 아스트리야에 숨겨 놓은 모양이에요.”
루시엘의 말을 전해 들은 안드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천공섬은 성스러운 빛의 결계가 쳐져 있는 신성한 영역입니다. 한데 어찌 그런 흉물스럽고 사악한 힘이 응축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요?”
“예, 그 결계는 고위 신관이 관리하고 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추기경의 입장에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결계 관리에 소홀하지 않다면, 다르게 생각해 봐요. 결계가 닿지 않는 영역이 아스트리야에 단 한 부분이라도 없나요?”
루시엘의 물음에 안드레아가 잠시 망설였지만 곧 대답했다.
“일단 지상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기경이 직접 그렇다고 대답하니, 루시엘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따로 더 조사해 보는 수밖에.
“하지만 심각한 사안이니, 조사할 수 있도록 협조는 부탁드려요.”
“물론 협조하겠습니다. 공자비의 정보원의 조사를 돕고, 내 쪽에서도 따로 움직이지요. 그리고 레이놀드 황자의 동향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딱히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아르제온도 요즘 잠잠한 걸 보니, 그런 듯했다. 안드레아의 대답을 들은 루시엘은 골똘히 고민했다.
‘아스트리야 지상이 아니라면……어디에 있는 걸까. 지하? 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추기경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예, 무엇입니까.”
“아스트리야의 땅은 지하를 깊이 파낼 수 있나요?”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아스트리야는 말 그대로 부유하는 땅입니다. 지하를 깊이 파낸다면, 부유하는 힘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고 균형이 사라질 수도 있어서 지하를 파면 섬이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루시엘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군요. 지상도, 지하도 아니라면 한 군데밖에 없지 않나요?”
“예?”
“섬 아래에 있는 지반 표면 말이에요. 그곳도 결계가 닿고 있나요?”
“!”
루시엘의 지적에 안드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거긴 닿지 않을 겁니다. 빛의 결계는 지상의 표면에서 발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거길 조사해 주시겠어요? 그쪽으로 탐사가 가능한 배를 한 척 알고 있으니, 소개해 드릴게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요하네스 대공자가 태워 주었던 천공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