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58)화 (258/282)

<258화>

책장 안에는 두 개의 책이 황금빛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왼쪽 책에는 새하얀 순백의 천사 날개가, 오른쪽 책에는 새까만 어둠의 악마 날개가 겉표지에 그려져 있었다.

루시엘은 키제프의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천사와 악마를 뜻하는 걸까?”

“어서 열어 보자.”

키제프는 자연스레 악마의 날개가 그려진 책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헨드릭 황실이 소유했었던 보물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십여 가지가 넘는 보물들이 있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그중에서도 소실된 것들의 목록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그 검이 적혀 있었다.

블루 익스큐션.

“여기 있다.”

드디어 원하는 기록을 찾아낸 키제프가 외쳤다. 루시엘도 다가와서 함께 책장을 넘겨 보며 해당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소실됨.

악마가 깃들어 있는 검.

곁에 두고 잠들면 악마와 거래할 수 있다. 거래의 대가로 계약자는 검이 파괴될 때까지 영혼이 종속된다.

열둘의 제물을 희생해 소울 이터로 만들고, 열둘의 요정 보석을 모두 세공하면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성벽이나 마법 실드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마검이 완성된다.

다만 강한 마력의 소유자만이 검을 사용할 수 있다.」

내용을 거기까지 읽었을 때 루시엘이 충격에 휩싸인 듯 말했다.

“……블루 익스큐션은 악마가 깃든 검이었던 거구나. 카일라는 악마와 거래를 했던 거야.”

루시엘은 블루 익스큐션이 뿜어내는 위화감에 검을 제대로 쥘 수조차 없던 기억이 떠올랐다.

‘악마의 검이라 그랬던 걸까?’

어둠 속성인 키제프도 블루 익스큐션을 만질 수는 있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는 이미 악마였잖아. 카일라의 영혼이 검에 얽매여 있었던 거라면 애초에 육신만 죽이는 일은 소용이 없는 거였네.”

키제프의 눈이 가늘어지며 말했다.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지도 몰라. 그녀의 육신은 프리다 박사가 만든 인형,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던 거니까. 카일라를 완전히 없애려면 그 영혼을 소멸시켜야 해.”

키제프는 책의 구절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 영혼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블루 익스큐션을 파괴해야 하는 거고.”

“맞아, 결국 검은 파괴해야 해.”

루시엘이 결심한 듯 굳게 말했다. 현재 블루 익스큐션은 벨슈타인의 보물고로 옮겨진 채였다.

“봉인하는 것도 어려웠으니 파괴도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아…….”

“……책에는 뭐가 더 없는 걸까?”

루시엘이 아쉬운 얼굴로 뒷장을 넘겨 보았다. 힌트라도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검을 파괴하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입술을 꼭 깨물면서 루시엘이 말했다.

“검을 파괴하는 방법은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할 것 같아.”

“괜찮아, 루시엘. 가서 다 같이 머리를 맞대어 보면 새로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이만 돌아가자.”

“……잠깐만, 키제프.”

무심코 악마 날개 책의 맨 뒷장을 보자 그곳에도 어떠한 날개의 반쪽이 그려져 있었다.

얇은 선으로 그려져 나비나 곤충의 것처럼 투명했다. 나머지 천사 책의 뒷장에도 그것과 똑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루시엘은 이노센트 캐슬에서 얻었던 요정의 날개가 떠올라 잠시 발동시켜 보았다.

파앗.

루시엘의 마나를 머금은 투명한 요정 날개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키제프, 봐 봐. 이 책에 있는 거 꼭 내 거랑 똑같지 않아?”

“그렇네. 근데 갑자기 날개는 왜?”

키제프의 의아한 물음에 루시엘이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뭔가 더 있나 보려고.”

그녀의 날개는 인근에 강력한 마나를 감지하는 힘이 있었다. 우선은 아까 그 두 권의 책을 꼼꼼히 살폈고, 투명 날개를 단 채로 책장과 장서관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독 날개가 푸르게 빛나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서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오르간과 악보가 있어 살피니,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반투명한 책자를 찾아냈다.

그것을 펼쳐 보니 건국신화에 나오는 노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제목은 요정의 노래였다.

“어? 이건…….”

「기쁨은 초록색

슬픔은 파란색

분노는 빨간색

감동은 노란색

고통은 검정색

설렘은 분홍색

……(중략)

남을 위한 마음은 투명한 무지개,

진정한 사랑은 선홍색 하트,

열두 별이 만나면 떠오르는 달.

오직 달님만이 모든 걸 알고 있네.

나무 안에서는 시간의 책을.

지팡이에서는 세상 모든 마법을.

성에서는 번개가 담긴 사슬을.

진실한 심장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별, 악은 사라지리.」

읽으면 읽을수록 이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노래 가사는 그동안 자신이 만들어 낸 보석의 색깔을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달 보석의 힘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려 주고 있는 듯했다.

루시엘이 진홍빛 눈동자를 굴리면서 악보를 보고 있자, 키제프가 곁으로 다가왔다.

“루시엘, 뭘 찾은 거야?”

“이상한 악보를 찾았는데, 이 노래 가사. 묘하게 내가 만든 보석들과 내용이 전부 들어맞아서.”

빠르게 훑어 내려간 키제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요정의 노래라……. 그러게. 전부 너의 보석들을 노래하고 있는 거 같아.”

“응, 특히 마지막 부분을 봐 봐. 이 가사대로 정말 달 보석을 달빛 이슬 나무에 끼워 넣었더니 시간의 책을 얻었거든.”

“아하, 그럼 다음은 지팡이에서 세상 모든 마법이니까……. 지팡이에 달 보석을 세공하면, 모든 속성의 마법을 할 수 있다는 뜻 같네.”

키제프도 같이 추측하자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초롱였다.

“응, 그거까진 나도 알겠어. 그런데 그다음은 뭘까. 성에서 사슬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인가?”

“……성이라면 공작성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여기서 가리키는 나무가 일반적인 나무가 아닌, 특별한 달빛 이슬 나무였으니 성도 일반적인 성이 아닐 것 같았다.

그때 루시엘이 알고 있는 가장 특별한 성이 떠올랐다.

“……! 어딘지 알 것 같아. 내 지팡이를 통해 갈 수 있는 성이 있어. 이노센트 캐슬이야!”

“그래? 그럼 얼른 가 보는 게…….”

그러자 루시엘이 은빛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거기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어…….”

“언제 갔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아마 우리가 떨어져 있던 중이었을 거야. 너를 원하던 열망과 그리움이 어느덧 페어리 하트를 만들었던 때. ……각성을 또 했었어.”

처음으로 키제프에 대한 감정이 사랑임을 자각하고, 만들어 낸 보석이 페어리 하트였다.

부끄러움에 볼이 살짝 달아오른 루시엘을 보며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가 픽 웃었다.

“그럼 내 덕분이었네.”

“…….”

루시엘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자각했다는 사실도, 그 감정으로 두 번째 각성까지 했다는 것도 못내 가슴을 뛰게 했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한층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루시엘, 그럼 거기 다시 들어가려면 그 이상의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거야? 더 깊은 사랑을 완성해야 하나.”

어느샌가 루시엘의 코앞으로 훅 다가온 그가 은빛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자, 잠깐. 그건 아닐 거야!”

“왜 아니라고 확신하지? 나는 너와 감정을 교류하는 유일한 남자라고. 날 성장에 써먹어도 돼.”

키제프의 눈꼬리가 가늘어지며 집요하게 바라봤다.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키제프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잠깐만, 자꾸 가까이 오니까 생각을 할 수가 없잖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시엘을 놀리듯 내려다보던 그가 멈추고는 흐물흐물 풀어진 입가를 감췄다.

“이번만 봐줬다.”

“…….”

주변을 서성이던 루시엘이 지팡이 속 공간에서 지팡이 정령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이 공간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추가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래, 분명 추가 성장이랬어. 그리고 지팡이를 성장시키는 건, 마법 세공으로도 가능해!”

“……그래, 마법 세공으로도 된단 말이지.”

루시엘이 겨우 해결했다는 듯 말하자 키제프는 살짝 아쉬운 얼굴이 되고 말았다.

키제프의 그런 기색을 모른 척하며 루시엘은 속으로 안도했다.

‘둘이 있으면 자꾸 돌발 행동을 해서 안심할 수 없잖아.’

루시엘은 애써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얼른 돌아가자.”

그러나 키제프가 그녀의 손을 꽉 붙들면서 한층 진해진 눈으로 말했다.

“그래, 얼른 모든 걸 끝내고 우리는 다른 걸 시작해야지.”

“다른 거라니. 우리, 뭐 하기로 했었나?”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키제프가 이마를 콩 마주 대면서 느른하게 말했다.

“이런 거, 저런 거 전부.”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

루시엘은 정말 콕 집어서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았다. 속이 투명하리만치 잘 보이는 바보 토끼.

할 수만 있다면 이 애의 시간을 모두 제게만 묶어 두고 싶었다.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이 못내 아쉽고도 아까웠다.

키제프가 입술을 열었다.

“그동안 서로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잖아.”

“……그건 그랬지.”

“여행도 가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어.”

빠져들 듯 붉게 빛나는 키제프의 눈을 보며, 루시엘도 콩닥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너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까.”

루시엘의 진심 어린 말에 그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내 맘을 알아주는군. 자, 이제 돌아가자.”

“응.”

둘은 이동포탈을 타고 빠르게 벨슈타인으로 귀환했다. 마침 길리아트도 본성의 응접실에 와 있었다. 그에게 블루 익스큐션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도 전했다.

“악마가 깃들어 있었어요. 그 검을 파괴해야만, 악마와 계약한 카일라를 소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하지만 너희들 말을 듣고 보니 이 검의 파괴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구나.”

“맞아요, 할아버지.”

“우선 파괴가 가능한지 시도는 해 보마. 그리고 루시엘. 별궁에 가 보렴. 선물이 있다.”

길리아트가 윙크하면서 그리 알려 주었다. 선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루시엘은 그의 주름진 손을 붙잡고는 연신 확인했다.

“할아버지! 진짜요? 진짜지요? 열세 번째 보석이 제대로 마법 세공된 거 맞지요?”

“가서 직접 네 눈으로 확인해 보거라.”

“네!”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른 별궁으로 가려고, 본성의 응접실을 도도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리아트가 허허 흐뭇하게 웃었다.

“저리 좋을까.”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루시엘 대신 드리는 인사입니다.”

“그러게, 루시엘이 그 감사 인사도 빼먹고 뛰어갔구나. 그러는 키제프 너도 같이 가고 싶다고 얼굴에 써 있으니 얼른 가거라.”

자신과 루이비드를 꼭 닮은 붉은 눈이 강아지처럼 루시엘이 사라진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을꼬. 길리아트는 허허 웃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키제프가 인사를 올리고는 루시엘이 달려나간 길을 뒤따라 갔다.

어느새 루시엘의 곁에는 키제프가 함께 있는 모습이 그림자처럼 자연스러웠다.

“귀여운 것들. 봄이로군. 이제 마지막 서리를 걷어 내자꾸나.”

그런 둘을 보는 길리아트의 마음에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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