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루시엘은 잠자코 의자에 묶여 있는 프리다 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잘 알겠죠? 카일라의 밑에서 있었으니…….”
“……!”
공허하던 그의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가 어둡게 침잠했다. 인형사 제르다와 닮은 눈매였으나, 더 차갑고 어두웠다.
“당신의 그 눈,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았네요. 인형을 만드는 훌륭한 실력도요.”
“…….”
“당신의 동생 제르다 말이에요.”
‘제르다’라는 이름을 루시엘이 입에 담자 내내 미동도 없던 프리다 박사가 말라붙은 입술로 말했다.
“제르다를 어떻게……!”
그 짧은 한마디에 동생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도에서 가장 커다란 마법 장난감 상점을 하고 있어요. 당신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아이들을 위해서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맞아요. 황도를 떠나면서 당신은 동생도, 양심도 모두 버렸을 테니까.”
“…….”
“그럼에도 제르다 씨는 형을 만나고 싶어 했어요. 당신의 악행을 보기 전까지는.”
안타깝게 말하던 루시엘은 통신구의 녹음 기능을 툭 켰다.
―제르다 씨, 괜찮아요?
―제가 방금 본 건 제 형이 아닙니다. 그는 악마인 것 같습니다. 그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괴로움과 원망으로 가득 찬 제르다의 목소리를 들은 프리다 박사의 얼굴이 절망과 회한으로 뒤덮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끝을 보며, 루시엘은 조용히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모든 걸 되돌리기에 늦지 않았다고는 말해 줄 수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신과 카일라가 저지른 죗값의 일부라도 치르고 싶다면, 당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줘요.”
말 없는 그를 뒤로하고 쾅.
지하 감옥 심문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나오면서 루시엘은 심문관에게 일렀다.
“3일만 시간을 주세요.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예정대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면서 루시엘은 문득 내리쬐는 햇살을 손으로 가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마음을 바꾸느냐 마느냐는 프리다 박사의 몫이야.’
이틀이 지났을 무렵, 프리다 박사가 입을 열겠다는 말에 공작과 루시엘이 그를 직접 찾았다.
“지껄여 보도록.”
“……그것은 그동안 죽은 자들의 영혼으로 만든 인형 군단이 쏟아져 나올 어둠의 심장이다.”
“……어둠의 심장? 그게 어디 있는 거지?”
“이제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성스러운 땅에서 키운 그것이.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그분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희번덕 눈을 까뒤집으며 말하던 프리다 박사는 영혼이 완전히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끝내 벨슈타인은 무너질 것이다……! 크하하!”
핏대까지 세우며 목청껏 외치는 프리다 박사는 이미 동생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스릉.
공작의 검이 곧장 프리다 박사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
“……끄흐어억!”
괴로움에 발버둥 치던 프리다 박사의 숨이 이내 끊어졌다. 검에서 피를 털어 낸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루시엘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루시엘.”
프리다 박사의 죽음을 목도한 루시엘의 심장이 놀라 쿵 울리긴 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의 영혼은 이미 카일라에게 깊이 잠식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블루 익스큐션을 잃고도 카일라가 왜 그리 잠잠한가 했더니, 박사의 인형 군단이 그들의 최종 병기였던 모양이네요.”
과거에는 벨슈타인에 맞선 다른 귀족과의 연합군이 있었기에 인형까지 활용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씁쓸한 눈으로 루시엘이 말했다.
“시체로 만든 인형 군단이라……끔찍하군.”
“……그리고 방금 박사가 말하기를, 신성한 땅이라고 했어요. 아무래도 어둠의 심장이 아스트리야에 있나 봐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신전에 그런 끔찍한 것이 있었다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신전 맞이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캐서린과 아르제온에게 어서 연락해서 신전을 더 조사해 봐야겠어요.”
불안감에 젖어 다급해진 루시엘을 도닥이며 공작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인형 군단이든, 뭐든 와도 상관없을 거다. 우리에게는 검은 장벽이 있으니까. 하지만 안일함이야말로 최대의 적이지. 나도 가능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마.”
그리 말한 공작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자르가에게 명했다.
“……최고 등급 비상이다. 가신들은 모두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를 열고, 검은 날개 기사단까지 전원 비상 소집해 훈련을 시작하도록. 무기고와 갑옷 담당관도 모두 부르도록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자르가가 사라지는 걸 보며, 공작이 루시엘에게 말했다.
“키제프에게 귀환하라고 해라.”
“황성 분위기도 살필 겸, 제가 직접 가서 데리고 올게요.”
“저런.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으니 아플까 걱정이다.”
“저 완전 튼튼한걸요, 아빠. 그럼 다녀올게요.”
고개를 주억이는 공작에게 루시엘은 씩씩하게 웃어 보이면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의 보석을 어루만졌다.
이내 루시엘의 몸이 초록빛에 휩싸이며 스르륵 이동했다.
* * *
며칠째 황성의 장서관에 콕 박혀 있던 키제프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서적을 뒤졌다.
장서관의 규모가 어찌나 방대한지 구석구석 자료를 찾느라, 식사하고 잠드는 시간 외에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다른 곳은 다 찾았고, 남은 건 저 문이 있는 책장뿐인데…….”
키제프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문이 달린 책장을 훑어보았다. 굳게 닫힌 나무문은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건지는 몰라도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자물쇠가 걸려 있지도 않았다.
“……혹시 락 마법이 걸려 있나?”
그러나 언락 주문으로도 해제가 되지 않았다. 잠시 책장에 기대 한숨을 쉬는데, 환한 초록빛과 함께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키제프가 고개를 들자, 그리웠던 하얀 얼굴이 보였다.
떨어진 나날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하루가 일 년 같았다.
“……루시엘?”
알아보는 순간 키제프가 제 품으로 그녀를 와락 당겨 안았다. 힘없이 딸려 온 루시엘도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잠시 쉬는 듯 루시엘은 한참 그렇게 어린 짐승처럼 그의 품에 기댔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치고, 힘든 일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얼굴만 봐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머리칼에 입술을 누른 다음, 여린 어깨를 한참 토닥여 주었다.
“……말해 봐. 들어 줄게.”
통신구로 연락은 계속했지만, 또 새로운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루시엘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키제프가 루시엘을 데리고 장서관의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좀 앉자.”
“……고마워. 이제야 조금 쉬는 것 같아. 근데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열세 번째 보석을 만들었다고 했지.”
“맞아. 그 보석, 키제프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는데……. 꼭 달처럼 생겼거든. 무슨 힘을 가졌는지 알면 놀랄 거야. 할아버지도……!”
조잘조잘 말하는 루시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아 그치게 한 그가 싱긋 웃었다.
“지금 말하지 말고 나중에 직접 보여 줘.”
“으응. 지금은 할아버지가 그 보석을 내 지팡이에 세공하기 위해 가셨어. 그리고 이제 추기경과도 협력할 수 있게 됐어.”
루시엘이 애써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키제프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잘됐군. 황자가 거기 있으니까 도움이 될 것 같아.”
루시엘이 키제프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맑게 빛나던 눈동자에도 어딘가 불안감이 아른거렸다.
사실 조금 전 일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키제프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너를 힘들게 한 일은 뭔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던 프리다 박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어…….”
“그 해괴한 덩어리의 영상 기록 말인가?”
키제프는 잠시 엘링턴의 보고를 떠올렸다.
“응. 그게 인형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핵이었던 모양이야. 카일라가 최후의 보루로 준비해 놓은 무기였던 거지.”
“그건 어디 있는데?”
“아스트리야에 있는 것 같아.”
“……그런 미친 짓을 꾸몄다니. 신전 맞이를 일부러 벨슈타인에서 하려고 한 것 아닐까. 처음부터 모든 걸 노리고 말이지.”
루시엘의 말을 전해 들은 키제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신전 맞이가 아니라 전쟁을 할 생각이었나…….”
“아빠도 전쟁을 할 준비 태세에 들어가셨어. 그러니 키제프도 이만 귀환하자. 장서관에서 딱히 알아낸 건 없지?”
그러자 키제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이 열리지 않던 책장으로 향했다.
“전부 뒤져 봤는데 딱히 보물에 대한 정보는 없었어. 이제 저 책장만 찾아보면 되는데 문이 안 열려.”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도 눈동자를 굴리면서 책장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 정말? 왜 안 열리는 거지? 클로디아 황녀님에게 물어볼…….”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 책장의 나무문 안쪽을 쿵쿵 노크해 보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달그락거리면서, 작은 소리가 잠시 들렸다가 멈췄다.
루시엘이 한쪽 눈을 감고, 틈을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 무슨 장치가 있는 것 같은데.”
루시엘이 중얼거리면서 책장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너무 거대해서 전체를 살펴보기 어려웠다.
“키제프, 이 안에 뭔가 장치가 되어 있는데 그걸 움직이게 하면 열릴 거 같아.”
“좋아.”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가 플라이 마법으로 껑충 책장 위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 책장의 꼭대기를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자 뒷부분에 자그만 왕관 모양의 태엽이 있었다.
“여기 태엽이 있었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태엽? 그럼 얼른 감아 보자.”
“응, 잠깐만.”
키제프가 태엽을 잡고 힘껏 감기 시작했다. 이내 달그락, 달그락 태엽이 돌아가면서 책장의 문이 쿠우웅 하고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