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아스트리야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벨슈타인 공자비를 만나 주겠다니 너무 무른 거 아닌가?”
안드레아 추기경의 호위 기사이자, 막역한 친우인 성기사 하인델이 인상을 구기며 고했다.
“꼭 다른 고위 신관들처럼 말하는구나, 하인델.”
제 목에 걸린 하늘색 보석, 성물 루미티어스를 만지작거리던 안드레아가 호박색 눈동자를 빛내면서 온화하게 웃었다.
“벨슈타인이 신전을 위협할 일을 꾸미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게다가 곧 신전 맞이도 있는데, 굳이 미리 살필 이유가 없잖아.”
안드레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제 의견을 말했다.
“……벨슈타인은 신전에 관심이 없어. 그들은 철저하게 이득을 계산하며 움직인다고 들었네. 하지만 신전에 해를 가해서 얻는 이득이 없는데, 굳이 그럴까?”
“……그럼 여길 왜 염탐한 거지? 당장 그 여자를 심문해서 목적이 뭔지 캐내야 한다고.”
하인델이 흥분해서 말하자, 그를 진정시키며 안드레아가 답했다.
“하인델, 주신 레트라논의 성소에서 진실의 서약을 한 자는 심문할 수가 없네. 그녀 자신은 고용되었을 뿐이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해 신전에 왔다고 했지.”
“……허 참, 답답하긴. 그게 누군지 알아냈어야지.”
“그건 공자비에게 직접 알아낼 거야. 무엇보다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확인하고 싶은 것이라니?”
“자네는 아직 몰라도 돼. 어쨌든 만나겠다고 전해. 되도록 빨리.”
뒷짐 지으면서 안드레아가 답하자, 하인델이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캐서린에게 해당 사실을 전하기 위해 물러갔다.
지난번 예배당에서 루미티어스가 반응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군지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신전 내부에 있는 신관이었다면 애초에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혹여 착각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신관 내부인이 아니라면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최근 신전에 들어온 외부인이라면 캐서린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루미티어스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은 진실의 서약에서 혼자 움직였냐는 질문에 주인과 함께인 적도 있다고 실토했다.
‘어쩌면 벨슈타인 공자비가 내가 찾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신의 눈물이라는 별칭을 가진 루미티어스는 소유자의 신성력을 극대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루미티어스는 대대로 가장 맑고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자들의 손에 넘어가야 그 힘을 제대로 발휘했다.
그런 루미티어스가 깜빡거린다는 것은, 현재 소유자인 자신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상대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 * *
신전 내부에 알리지 않는 대신에 이 만남도 은밀하게 진행하기로 정했다. 안드레아 추기경은 캐서린을 감금해 놓지도 과도한 심문이나 추궁을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물론 무시무시한 외양의 성기사가 그녀를 감시했고,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하는 진실의 서약을 마쳤다.
‘흔쾌히 아가 마님을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루시엘도 혹여 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캐서린을 따라서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새하얀 로브를 두르고 있던 루시엘이 도착하자, 문 앞에 선 성기사 하인델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구릿빛 피부에 옅은 회색 머리칼을 가진 그는 추기경의 직속 호위 기사인 모양이었다.
하인델이 가만히 서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이 느껴졌다.
커다란 덩치의 은빛 갑주를 입은 남자가 가로막으면, 누구든 저절로 몸을 움츠릴 터였다.
“대체 신전에 온 목적이 뭡니까.”
“무례하시군요, 이분은……!”
캐서린이 불만을 표했지만 루시엘은 그저 충성스러운 기사구나 싶었다. 노골적으로 반기지 않는 성기사의 태도에 루시엘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캐서린. 신전에서 우리에게 불쾌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다만 추기경님을 만나 뵙고, 직접 오해를 풀고 싶어요.”
“……끄흠, 일단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하인델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 주었고, 루시엘은 캐서린에게 우선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안쪽으로 혼자 들어갔다.
추기경의 집무실 내부에는 주신 레트라논을 상징하는 종교적 물건들이 유리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성수가 졸졸 흐르는 작은 수로와 성수를 담아 놓은 커다란 유리병도 있었다.
이내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에메랄드색의 긴 머리칼을 가진 안드레아 추기경이 보였다.
그는 일어나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그의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신기한 것 같았다.
“안드레아 추기경님,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 공자비라고 해요.”
한편 안드레아는 커다래진 눈으로 눈앞의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나에 쉬이 입술을 떼지 못했다.
지난번 신전의 너른 예배당에서 느낀 마나의 소유자가 바로 그녀였다.
제 예상이 들어맞았다.
‘……이렇게 순수하고 강한 마나라니.’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목에 걸려 있던 루미티어스가 깜빡깜빡 푸른빛을 냈다. 잘 보이도록 일부러 의복 밖으로 꺼내 놓은 참이었다.
뒤늦게 아무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안드레아가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벨슈타인 공자비.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날 기다렸다고?’
무슨 뜻일까 싶었지만 루시엘은 개의치 않고, 본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아요. 하지만, 신전을 노리고 염탐하려던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건 맹세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듣던 안드레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벨슈타인이 신전과 척을 져서 얻을 이득이 없으니, 그건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뭐였습니까? 고용한 정보원은 그걸 밝히지는 않더군요.”
“……그녀의 죄를 깊이 추궁하지 않은 건 감사해요. 벨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신 점도요.”
루시엘이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이유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신전에 있는 레이놀드 황자를 감시하기 위해서였어요.”
“……레이놀드 황자라. 확실히 신전과는 관계가 없긴 합니다만. 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답입니다.”
벨슈타인에서 황족을 감시하겠다니, 확실히 그 의중이 궁금한 일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해 드릴 수 없지만, 황자의 그릇된 행동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피해자이고요.”
“공자비가 피해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레이놀드 황자는 다른 사람의 신성력이나 마나를 탐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신전에 오게 된 것도,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라는 의미로 보내졌던 거였죠. 하지만 그가 돌아오게 된다면…….”
루시엘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안드레아 역시 그간 의구심을 품어 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레이놀드 황자는 대외적으로는 모범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제 정보원에게 듣기로는 황자가 어린 신관들과 가까이 지낸다고 했어요. 혹시 그녀들 중, 크게 다치거나 한 사람은 없었나요?”
“……잠깐.”
루시엘의 이야기를 들은 안드레아가 미간을 좁혔다.
“실은…… 건강하던 신관 두 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요? 두 명이나 그렇게 죽었다면 정말 이상한 일인데요.”
“저 역시 우연치곤 기이한 일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럼 그 신관들이 황자에게 마나나 신성력을 빼앗기고, 희생되었단 뜻입니까?”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황자는 선천적으로 마나가 약하게 태어났어요. 그가 도모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강한 마나가 필요했고요. 힘을 키우기 위해 신관들의 마나를 빼앗으려다가 해친 걸 거예요.”
“허…… 그런.”
“저에게 강한 마나와 힘이 있는 걸 알고 노리고 있고요.”
“그래서 황자가 당신을 원했던 거군요. 이제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안드레아는 루시엘의 말을 납득했다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더니, 이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목에 걸린 성물 루미티어스를 보여 주면서.
“이 성물이 깜빡인다는 건 제가 가진 신성력에 버금가는 강하고 순수한 마나를 가진 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방 안에는 저와 당신밖에 없습니다. 벨슈타인 공자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기경의 요구에 루시엘은 자못 놀랐다. 성물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나게 생긴 탓이었다.
하지만 아직 초면인 그를 믿고 모든 걸 밝히기는 어려웠다.
루시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직 추기경을 믿을 수 없어요. 추기경님 역시 그렇겠지요?”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 이유로 아직은 추기경님께 저의 모든 사정을 밝힐 수 없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우리는 레이놀드 황자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죠.”
언뜻 연약해 보이는 소녀로만 보였던 그녀를 다시 보면서 안드레아가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입니까?”
루시엘은 올 때부터 하려고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제 편이 되어 주시겠어요? 추기경님께서도 아스트리야의 평화가 깨지는 걸 원하지 않으시리라 믿어요.”
“……손을 잡자는 겁니까?”
추기경인 제게 손을 잡자고 하는 소녀라니,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그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루시엘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을 이어 갔다.
“그는 신관을 계속 희생시킬지도 몰라요. 저에게 접근해 왔듯이, 추기경님의 강한 신성력을 탐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루시엘이 살살 들려주는 말에 안드레의 귀가 팔랑거렸지만, 이내 그는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편이 쉽게 되는 건 아닙니다. 공자비께서는 제게 무얼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벨슈타인과의 우호적 관계를 우선 약속드릴게요. 신전에는 물자가 아주 귀하다고 들었어요. 신전 맞이뿐 아니라 평소에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공작님께 간청드려 볼게요.”
아스트리야를 조사한 캐서린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신전 맞이를 다들 기대하는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루시엘은 그의 집무실에 흐르는 맑은 수로를 바라보았다.
신성력을 가진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투명하고 맑은 물.
성수는 다이아몬드를 사용하기 위해서, 필수였다.
“그리고 저기 있는 성수를 비싼 값에 사 드릴게요. 제가 성수가 조금 많이 필요하거든요.”
“…….”
사실 성수는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이었기에, 헌금을 제외하면 이걸로 돈을 받기는 어려웠다.
전부 끌리는 제안이긴 했지만, 그가 가장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루미티어스를 어떻게 깜빡이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음…… 그건 제가 추기경님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 때,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황자의 본모습을 밝히기 위해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어요.”
루시엘이 하얀 손을 내밀었다.
교황이 없는 지금, 신전에서 가장 높은 자인 추기경을 제 편으로 만들어 둔다면, 레이놀드를 무너뜨리는 일에 도움이 될 터였다.
캐서린과 아르제온이 레이놀드를 감시하는 일도 그의 협력하에 좀 더 자유로울 테고. 다가오는 신전 맞이에서도 함께 계략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레이놀드는 추기경의 신성력도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추기경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해야 한다.
이제 그 누구의 희생도 없기를 바라니까.
루시엘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