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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54)화 (254/282)

<254화>

루시엘이 길리아트와 함께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책의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 제 이름이 지워졌어요. 할아버지 이름을 적어 볼까요?”

“오냐.”

두리번거리면서 내부와 책을 살피던 길리아트가 깃펜을 들어 서명을 마쳤다. 그러자 루시엘이 했을 때와 똑같이 여백에 연월일을 적는 곳이 나타났다.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돌아가고 싶은 날짜를 적으면 되는 거로군.”

“맞아요.”

길리아트는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으음, 정확히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데.”

“언제인데요? 머릿속으로 떠올리다 보면 기억이 나실지도 몰라요.”

루시엘의 말대로 길리아트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렸을 때였다. 책자 옆으로 자그만 하늘색 끈이 툭 삐져나왔다.

“할아버지, 저건 뭐예요?”

“책의 읽은 부분을 표시하는 북마크처럼 생겼구나.”

“혹시 이걸 잡아당기라는 게 아닐까요?”

길리아트가 북마크를 잡아당기자, 책장이 사락사락 넘겨지더니 여백에 글씨가 채워졌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정원으로 나간 순간, 길리아트의 눈앞에 진짜 마법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발견하고 말았으니까……」

당황한 길리아트가 자신의 몸으로 슥 책 내용을 가렸다.

“……아, 아니! 잠깐. 이, 이게 다 적히는 거였니?”

“할아버지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누구예요?”

“……비밀이다.”

큼큼, 헛기침하던 그의 몸을 어느새 깃털과 바람이 살랑 감싸더니 뿅, 루시엘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천사를 만나러 가신 모양이네.”

루시엘은 살풋 미소를 지으면서 책에 채워지는 글씨를 몰래 엿보았다.

「그녀는 정원 호숫가에 발을 담가 찰방찰방 발장구를 치는 중이었다.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의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곧 이성을 찾은 길리아트가 다가가 주의를 주었다.

“……레이디, 그 호수는 제법 깊어 위험하니 나오는 게 좋겠소만.”

“걱정하지 말아요. 이래 봬도 수영은 배웠으니까. 근데 그쪽은 누구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의 눈망울은 맑고도 신비로웠다. 그 속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빠르게 채워지는 글씨에 루시엘이 채 눈으로 읽기도 전에 책장이 넘어갔다.

얼마 후 길리아트가 다시 돌아왔다. 그 시절 기억 속에 다녀와 아련해진 눈동자가 된 그였다.

“루시엘! 이건 정말 대단한 힘이다.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니.”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을 가진 자도 구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기적에 가까웠다.

“……저도 설마 했는데 서명하면 누구나 과거에 다녀올 수 있나 봐요. 혹시 여기 없는 사람의 이름도 적으면 가능해질까요?”

루시엘이 그리 가정하며, 깃펜으로 키제프의 이름을 대신 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적어야 효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은 써도 소용이 없네요. 아쉽게도.”

“그게 가능하면, 자칫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있겠구나. 다른 사람의 과거를 함부로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길리아트 말대로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꿈같은 일이니까요.”

루시엘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소중한 추억의 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서명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할아버지.”

“루시엘, 네 언니는 아직 만나 보지 않고?”

길리아트의 물음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있으니까요. 모든 걸 끝내고 마음 편하게 언니를 만날래요.”

그래야만 언니를 보고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루시엘이 말하는 일이 레이놀드와 카일라를 해치우는 것이라는 건 길리아트도 잘 알고 있었다.

“곧 신전 맞이로군. 신전의 요구대로 준비는 이벨린과 솔리아페가 하고 있다고 들었다. 모든 건 우리 뜻대로 될 거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네, 그런데 할아버지, 카빌 후작의 일은…….”

카빌 후작을 입에 담자, 내내 평온하던 길리아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놈은 아까 지하 감옥에 처넣고 오는 길이다. 카빌가의 세 버러지가 모두 모이게 되었구나. 혹, 그 후작 부인도 죄가 있더냐?”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나서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방관자였을 뿐.

“후작 부인은 아니었어요. 카빌 후작을 가장 악독하게 처리해야 해요……!”

루시엘의 눈동자에 잠시 벨슈타인의 서늘함이 드리워진 걸 보며 길리아트가 기특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루이비드에게 맡기고 이만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통나무 집을 나오자, 길리아트는 지붕 아래 매달려 있는 달 모양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데 루시엘, 이 보석은 가져가는 것이 좋지 않겠니? 아주 귀한 것이니 말이다.”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은 아무 생각 없이, 빛을 내는 달 모양의 보석을 떼어 냈다.

그러자 맨 처음 달빛 이슬 나무가 통나무 집으로 변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통나무 집이 쪼그라들더니 다시 나무로 되돌아갔다.

“……어라. 나무가 원래대로 되돌아갔어요.”

보석을 나무에 부착하면 통나무 집으로 되돌아갔고, 집에서 떼어 내면 나무로 돌아갔다.

“허허, 정말 신기하구나.”

같은 걸 두 번 반복해 본 루시엘과 길리아트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잠깐, 루시엘. 그렇다면 이 보석 말이다. 네 지팡이와도 결합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마법 세공을 하지 않고요?”

루시엘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하자, 길리아트가 일러주었다.

“우선 해 보기라도 하는 것이지. 네 지팡이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잖느냐.”

“맞아요. 지팡이가 보석을 만나 성장할지도 모르니까요.”

루시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긴장감이 아닌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동안 만들었던 보석들 역시 하나하나 다 강한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 보석에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능력 말고도 다른 속성들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몰라.’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노센트 지팡이를 소환해 보았다. 길리아트 역시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루시엘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

그러나 지팡이 앞에 보석을 닿게 해 보아도 변화가 없었다. 마나도 흘려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안 되나 봐요, 할아버지.”

“……이런.”

루시엘이 아쉬운 듯 씩 웃었다. 그때였다. 루시엘의 통신구가 여러 번 깜빡였다.

“엇…… 저 이만 성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통신 연락이 잔뜩 쌓여 있어요.”

키제프와 캐서린, 엘링턴, 클로디아 황녀와 류프델, 에리카 등. 열 건도 넘게 와 있었다.

“네가 저 안에 있을 때는 통신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나도 네게 통신했는데 연결되지 않더구나. 그런데 말이다, 루시엘. 네 지팡이와 보석을 류프델에게 다시 가져가 보는 건 어떨까 싶구나. 네 보석을 지팡이에 세공하는 게 가능하다면, 모든 속성의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까.”

“……모든 속성의 마법.”

무속성이었던 루시엘에게는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드는 단어이기도 했다.

길리아트 역시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루시엘에게 마법을 알려 준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오래전 그날 기억하고 있지? 네 속성이 무속성으로 측정되었을 때 말이다.”

루시엘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날은 실망을 조금 하긴 했지만, 결코 마법을 배우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단다. 루시엘, 너는 내 생각보다도 더 뛰어난 아이였고 말이다. 무엇보다 너의 가장 빛나는 점은, 네가 요정이라서가 아니라 주어진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지.”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제가 처음으로 만난 가장 멋진 어른이셨어요. 제가 한 발자국씩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벨슈타인의 마법의 덤불 숲에서처럼요.”

루시엘은 사르르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 열세 번째 보석과 지팡이를 넘겨주었다.

“그럼 지팡이를 부탁드려요.”

“오냐. 류프델을 괴롭혀서 얼른 완성된 지팡이를 선물로 가져가마.”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루시엘은 이동포탈 속으로 사라지는 길리아트에게 미소로 인사해 주고는 통신구를 얼른 열었다.

마침 캐서린에게서 다시 연락이 도착했다. 그녀는 아스트리야를 좀 더 조사 중이라고 했었다.

―아가 마님, 이제야 통신 연결이 되었네요.

“미안해요, 캐서린.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아닙니다. 실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쩐지 통신구 너머의 캐서린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캐서린이 말했다.

―그게 말이지요. 아스트리야에 조사차 황금 열쇠를 이용해 넘어갔다가, 역추적을 당했습니다. 신전의 빈 기도실에 갔다가 되돌아오는데, 알고 보니 저를 눈치채고, 기척을 숨긴 채 따라왔더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캐서린은 이 방면에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니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척을 읽고, 또 자신은 감출 정도라면, 상대는 보통 인물이 아닐 터였다.

‘설마 레이놀드는 아니겠지?’

루시엘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데룩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캐서린이 당할 정도면, 보통 위인은 아닌 모양이네요.”

루시엘의 말에 이내 통신이 살짝 지직거렸다.

―예, 맞습니다. 그는 안드레아 추기경이에요. 아직 제가 벨슈타인의 소속으로 움직이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추기경이라면……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그럴 만해.’

루시엘은 안드레아와 다른 고위신관들, 레이놀드가 나누었던 지난번 신전 맞이의 대화를 떠올렸다.

‘다른 신관들과 달리, 공명정대한 사람이었어. 그라면 벨슈타인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동안 레이놀드를 지켜봐 왔다면 뭔가 알지 않을까…….’

그렇게 빠르게 판단을 마친 루시엘이 그녀에게 말했다.

“캐서린, 차라리 잘된 것 같아요. 안드레아 추기경에게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벨슈타인의 공자비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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