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53)화 (253/282)

<253화>

블랙 다이아몬드를 얻자마자 부랴부랴 밤의 대장간으로 달려온 루시엘은 그의 집 대문을 쿵쿵 두드렸다.

“류프델, 류프델!”

“……루시엘? 이 새벽에 대체 웬일이냐?”

얼마 후 잠옷 차림의 류프델이 수면 모자와 안대를 벗으며, 퀭한 눈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이 늙은이가 쉬는 꼴을 못 보는구나. 녀석아.”

“……죄송해요, 류프델. 저 자수정의 비밀을 풀었어요. 이번에야말로 진짜 성공할 거예요!”

루시엘이 환하게 웃으면서 얼른 가방에서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 보여 주었다.

“……블랙 다이아몬드?! 자수정이 아니고?”

“네, 자수정을 거울에 비추니까 나타났어요. 원래는 블랙 다이아몬드였던 거예요.”

“허…… 그걸 용케도 알아냈군.”

“얼른 요정의 용광로에 넣어 볼 수 있을까요?”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루시엘이 물었다. 류프델 역시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린 기색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준비가 필요하니까.”

“네, 정말 고마워요!”

루시엘은 뚜껑을 열고 요정의 용광로 안의 눈금에 맞춰 루비부터 블랙 다이아몬드까지 열두 개의 보석을 모두 넣었다.

이내 류프델이 불을 피우고, 마법 연마제도 준비해 와서 한 방울을 똑 떨구었다.

화아악!

보석 담금질의 시작을 알리는 녹색 불길이 타올랐다. 선명하고 맑은 녹색의 불길이 용광로 위에서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타닥타닥.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라 루시엘은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으로 천천히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나를 느꼈다.

파아아아.

거대한 호수 위 수면처럼 그녀의 마나가 일렁였다. 그 압도적인 마나에 류프델도 숨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루시엘은 지팡이를 꺼내 용광로와 심장의 마나를 부드럽게 연결했다.

‘다시 감정들을 느끼면 머리가 아플지도 몰라. 참아 내자, 루시엘.’

루시엘은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머릿속으로 흘러오는 감정들을 똑똑히 마주할 생각이었다.

‘두렵지 않아.’

용광로의 불길 위로 열두 개의 보석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릿속이 여러 감정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도, 두통에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보석이 떠오르는 순서대로 감정을 느꼈던 기억들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처음 각성했던 순간 만들어 낸 다이아몬드, 설렘으로 만들어 낸 스피넬, 진심으로 사랑을 깨달은 페어리 하트와 자신감으로 만든 핑크 다이아몬드.

그 밖에도 다양한 감정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난 희로애락밖에는 느끼지 못하던 인형이었는데, 모두가 가르쳐 줬어.’

과거엔 절대로 만들어 내지 못했을 감정들을 이끌어 내 준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라 루시엘의 심장이 뭉클해졌다.

예측 가능한 기억과 감정들은 루시엘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감각에 도리어 마음이 편안했다.

두근두근.

다만 루시엘의 심장은 커다랗게 뛰고 있을 뿐이었다.

촤아아아.

이내 용광로 위의 보석들이 안에서 뱅글뱅글 돌더니, 모두 합쳐지며 곧 하나의 보석이 되었다.

용광로는 제 용도를 다했는지 소멸해 버렸고 남은 건 커다란 보석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빛을 한 줌씩 모아서 뿌린 듯,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양 끝이 뾰족하고 가운데는 둥글게 되어 밤하늘에 뜬 달 같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광채를 가진 보석은 처음이야.’

용광로 위에 둥실 떠 있던 보석으로 루시엘이 손을 뻗었다.

“……드디어 얻었어.”

커다래서 한 손으로는 붙잡기 어려웠다. 달 보석을 품에 끌어안은 순간, 새하얀 빛무리와 상쾌한 바람, 분홍색 꽃잎이 날아와 루시엘의 몸을 감쌌다.

루시엘은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가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깨끗하고 투명한 공기가 상쾌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밤의 대장간도, 류프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류프델? 어디 있어요?”

어느새 싱그러운 야외 풀밭이었다. 루시엘은 이곳이 예전에 와 본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여긴…….”

눈앞에 아름드리나무가 보였다. 할아버지가 처음 루시엘의 마력을 알아보기 위해 데려가 주었던 정원이었다.

마계와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다던 그곳.

달빛 이슬 나무는 루시엘의 손이 닿지 않아도 모든 잎사귀가 이미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보석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이유가 있을까?’

루시엘은 달 모양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삐삐 우는 병아리풀을 밟고 나무 앞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달빛 이슬 나무의 몸통에 유독 커다랗고 푸른빛이 나는 달 모양의 작은 옹이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옹이를 건드리자 나무가 통째로 뒤흔들리면서 쩌적 하고 틈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 보석을 넣으면, 딱 맞겠어.’

하나뿐인 보석이라 살짝 망설여졌지만, 루시엘은 가지고 온 보석을 나무 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자 나무의 두꺼운 몸통과 가지, 뿌리까지 우드득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나무는 한참 동안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뒤틀리면서 형태를 잡았다. 나무의 뿌리가 묻혀 있던 풀밭까지 들썩여서 루시엘은 살짝 겁이 나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된 거지?”

쿠웅.

이내 한참 소란을 피우던 나무가 잠잠해졌다.

작은 통나무 집으로 바뀐 달빛 이슬 나무에 자그만 파랑새들이 앉아서 지저귀었다.

네모난 창문에서는 노란색 빛이 쏟아져 나왔고, 지붕 아래는 루시엘이 만들어 낸 달 모양의 보석이 랜턴처럼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신기해 가까이 다가가니 문이 삐걱, 하고 저절로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책 옆에는 빗자루만큼 커다란 깃펜만이 꽂혀 있었다.

‘오늘은 온통 신기한 일들 투성이구나.’

루시엘이 투명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책장의 겉장을 살펴보았다. 펼쳐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내지에 서명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깃펜이 반짝 빛이 났다.

‘서명하라는 뜻인가 봐. 이 책은 도대체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투성이였지만, 이 모든 게 마지막 보석에 담긴 힘이 무엇인지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과정 같았다.

루시엘은 깃펜을 들어서 글씨를 쓰려다가 너무 무거워, 마법을 이용해 겨우 책에 서명을 남겼다.

그러자 책장의 하얀 여백에 글씨가 나타났다.

「 년 월 일」

이번에도 빈칸이었다. 루시엘은 진홍빛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혹시…… 하고 중얼거리면서 기억나는 날을 입력했다.

1028년 6월 1일.

이내 책장의 하얀 페이지들이 마구 휘날리며 넘겨졌다.

하얀 여백에는 글씨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루시엘의 열 번째 생일이자, 결혼식이었다.」

펜에 달린 하얀 깃털이 퐁 하고 떨어지더니, 루시엘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이내 희뿌연 빛이 시야를 가로막았고, 루시엘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1028년 6월 1일로 돌아가 있었다.

눈앞의 아름답게 꾸며진 야외 정원에서 결혼식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루시엘은 나무 뒤에 숨어서 자신과 키제프의 계약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예물을 교환하고 레오니가 두 사람에게 분홍색 꽃잎을 뿌려 주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둘을 축복하며 박수를 보냈다. 어느덧 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왈츠를 출 차례였다.

키제프가 몸을 깊게 숙이고,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왈츠 출 수 있겠어?”

“응.”

손을 맞잡은 키제프가 루시엘을 보며 싱그레 웃었다.

“……한참 자라야겠어. 아직 덜 자란 눈토끼 같잖아.”

그 말에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는 어린 루시엘이 풋풋했다. 그렇게 빙글빙글 돌며 왈츠를 추는 둘을 보면서 루시엘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러다 깃털 하나가 톡톡 그녀의 볼을 간지럽혔고, 그것을 붙잡자 다시 스르륵 빛이 나면서 통나무 집으로 돌아왔다.

꿈같은 일이었다.

책을 바라보던 루시엘이 신기함에 중얼거렸다.

“……열세 번째 보석의 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였나.”

* * *

카빌 후작을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질질 끌고 가던 길리아트는 문득 기민한 감각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벨슈타인 영지의 곳곳은 마계와 맞닿은 탓에 종종 마나의 흐름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한 번씩 가 보는 곳이 있었다.

달빛 이슬 나무가 있는 정원.

그 나무는 마나의 흐름에 민감해서 가끔 살펴보면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나무가 저절로 은빛으로 물들면 초월적으로 강력한 마나가 주변에 깔렸다는 뜻이었다.

벨슈타인을 제외하면, 루시엘이나 아르제온 정도의 강한 마나의 소유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카빌 후작을 넘겨주고는, 달빛 이슬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랐다.

달빛 이슬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통나무 집이 있었다.

그 앞에 달린 달 모양의 보석에서 아주 강력하고 순수한 마나가 느껴졌고 그는 본능적으로 루시엘을 떠올렸다.

“……이건 우리 루시엘의 보석 같은데?”

길리아트는 곧장 통나무집의 문을 열려고 해 보았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얼른 통신구를 켜서 루시엘에게 통신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급함에 류프델에게 통신했다.

―아이고, 망할 영감탱이. 이제야 연락을 해? 루시엘이 보석을 완성하고 사라졌단 말이다!

“그게 다 무슨 말이냐?”

자초지종을 전해 듣는 사이, 꿈쩍도 하지 않던 통나무 집의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길리아트가 뒤돌자 루시엘도 눈이 댕그래져 있었다.

“할아버지! 왜 여기 계세요?”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난 반가움에 루시엘이 그의 너른 품에 폭 안겼다.

“잘 있었느냐. 한데 루시엘,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니? 류프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만, 새로운 보석과 함께 네가 사라졌다고 말이다. 저 달 모양의 보석인 모양이군.”

루시엘의 등을 토닥인 길리아트가 통나무 집에 매달린 달 모양 보석을 재차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달빛 이슬 나무에 달 보석을 끼우니까 저렇게 변해 버렸어요.”

사실 루시엘도 아직 꿈꾸고 있는 듯, 믿기지 않았다.

“허, 그렇다면 저 나무는 요정의 나무였던 모양이군. 그래서,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 할아버지. 놀라지 마세요. 아무래도 제 보석에 시간을 거슬러 가는 힘이 있었나 봐요.”

“시간을 거슬러? 그런 대단한 힘이라니…… 믿을 수가 없구나.”

길리아트도 혀를 내둘렀다.

“저도 그래요. 아직 이 힘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책에 서명한 후에 날짜를 입력하니까 과거에 다녀올 수 있었어요. 아주 생생하게요.”

루시엘의 말에 길리아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루시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니?”

길리아트의 질문에 루시엘은 사실 오래전부터 종종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언니를 만나고 싶어요.”

“그건 아주 멋진 일이 될 것 같구나.”

“그리고 혹시 저뿐만 아니라 서명한 모든 사람의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또, 다른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이름도 서명할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가 봐요.”

루시엘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