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클로디아는 루시엘의 말대로 황성 창고의 와인을 은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와인을 원산지별로 분류하고, 한 통씩 성분을 검사한 결과.
은수저나 독을 판별하는 마법으로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루시엘이 알려 준 도구 덕에 단번에 포착되었다.
‘이건 극소량의 독도 판별하는 마탑의 마도구인데, 잠시 빌려드릴게요.’
뾰족하고 길쭉한 마도구의 움푹한 곳에 의심되는 물질을 일부 넣으면, 독이 있을 시에는 마도구에서 빛이 났다.
와인 주산지인 피피아노산 와인에서는 검출되지 않았던 독이, 시칠렌산에서는 스무 통 중, 세 통에서 미량의 독이 검출되었다.
클로디아는 루시엘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발루크 상단이 관리하는 시칠렌의 와인 재배지에서도 독이 발견되었어요. 창고에서도 같은 독이 발견된다면 우선 증거를 확보해 주세요. 그간 섭취하셨을 수도 있으니 혹시 몸에 이상이 있으시면, 제게 찾아와 주시고요. 제 보석으로 치유해드릴 수 있어요.’
루시엘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니길 바랐지만 막상 사실로 드러나자, 클로디아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
‘이럴 수가……. 독이 든 와인을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먹어 온 거였다니.’
클로디아는 손을 덜덜 떨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가 겨우 진정했다. 그러곤 와인을 납품하던 관리자에게 명했다.
“시칠렌산 와인은 앞으로 올리지 말고 따로 보관해 두거라. 당분간 묵혀 둘 예정이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 두라 이르고.”
“……예, 황녀님.”
영문을 모른 채, 관리자는 명령대로 움직였다. 클로디아는 충격에 와인 창고를 빠져나와 주치의부터 찾았다.
자신과 어머니인 황후, 최측근인 라라 부인까지, 다행히 와인을 그다지 즐기지 않은 탓인지 다들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라.’
노이슈반 황제는 식사 때마다 와인을 빼놓지 않고, 마시는 편이었다.
클로디아는 주치의에게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서도 물었다.
“몇 년 전부터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하시고, 불안 증세와 근육통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심각한 편은 아니시라 치유 사제를 불러 치료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이라고요? 정확히 언제부터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록을 뒤적이던 주치의가 돋보기로 문서를 살피더니 말했다.
“오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클로디아 황녀님.”
“고마워요, 이건 제가 빌려 가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폐하께 와인 좀 줄이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기록이 된 종이를 챙기는 클로디아에게 주치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한데 갑자기 기록은 왜 찾으시는지요?”
“폐하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제가 직접 원인을 찾아보려고요.”
클로디아의 말에 자신의 무능함이 찔린 주치의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 * *
황실과 클로디아의 지지를 얻은 후로 일에 박차가 가해졌다. 클로디아가 와인 창고를 조사해 준 결과 증거를 하나 더 확보해 두었으니.
황성의 장서관은 하필이면 새롭게 내부를 정리 중이라 아직 들어갈 수 없었다.
영지를 오래 비울 수 없어 공작은 벨슈타인 영지로 귀환하기로 했다. 전날 루시엘과 키제프를 따로 부른 그가 말했다.
“난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끼리 잘 진행할 수 있겠지?”
“……자신은 있습니다만.”
그의 물음에 루시엘과 키제프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아빠. 다 잘되어 가곤 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현장 조사를 나간 날, 하필이면 황자궁을 이미 깨끗하게 허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거 공사 시에 남은 잔해 속에 증거를 묻어 두려고 했던 계획에 다소 차질이 생긴 터였다.
키제프가 자못 걱정스레 말했다.
“……황자궁을 이미 다 철거해 버려서, 증거를 조작해 놓을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이런. 난감하게 되었군…….”
공작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루시엘만이 표정이 밝았다.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요.”
“그랬지. 기억하고 있구나.”
공작이 입매를 말면서 말했다.
“방법이 있어요. 우선 갈리우스 백작님을 부를까요. 그가 일의 순서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좋겠군.”
공작이 고개를 주억였고, 키제프는 어쩐지 닮은 듯한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키제프는 곧 갈리우스 백작을 데려왔다. 짧게 고개로 인사한 갈리우스 백작에게 공작이 물었다.
“백작, 수고가 많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은 갈리우스의 이름을 걸고, 해낼 것이니 기대해 주시지요.”
“의지가 좋군. 백작이 잘해 주리라 믿어. 황자궁 터는 철거가 이미 된 상황이라던데.”
“맞습니다. 제가 남은 잔해를 미리 철거해 놓았지요.”
갈리우스 백작은 커흠, 하고 기침을 하면서 수염을 매만졌다. 그에게는 해당 계획을 밝히지 않았기에 일어난 작은 문제였다. 루시엘은 냉큼 물었다.
“그럼 궁의 철거 다음에는 어떤 순서로 진행이 되지요?”
“토지를 측량하고, 터 파기 공사를 해서 기초 공사를 해야 할 거란다. 아, 한 가지 체크할 사항이 있는데…… 유리온실이니 지하 공간은 필요가 없겠지?”
갈리우스 백작의 질문에 루시엘의 눈이 빛났다.
‘그래. 바로 이거야. 지하까지 공사를 진행하면 발견되도록 땅 속성의 마법을 이용해서 미리 공간을 만들어 두어야겠어.’
“……지하실은 필수 아닐까요? 지하 공간도 파 주세요. 깊이요.”
루시엘의 요구에 갈리우스 백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다. 기초 공사를 위한 인부를 추가로 모집하고 있으니, 모레부터는 진행할 거다.”
“네, 잘 부탁드려요. 갈리우스 백작님.”
“진행이 착착이군.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지.”
“예, 차후 뵙겠습니다. 각하.”
갈리우스 백작이 물러가자 세 사람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루시엘이 먼저 말했다.
“오늘 밤 땅 속성의 ‘어스 빌드(Earth Build)’ 마법으로 공간을 만들어 두고, 준비한 증거, 그리고 이동포탈도 만들어 두는 게 좋겠어요. 아빠.”
어스 빌드(Earth Build)는 5서클의 마법이지만, 땅의 형질을 다루는 것이라 자칫 범위를 잘못 설정하면 지진이 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도의 컨트롤을 요했기에 보통은 여러 명의 마법사가 함께 천천히 진행하곤 했다.
“루시엘, 어스 빌드를 너 혼자 구현하기에는 쉽지 않을 거다. 최소한 셋은 있어야…….”
황궁에는 마법 병력을 데려오려면 절차가 꽤 까다로웠기에 검은 날개 소속의 마법사들은 타운하우스에서 대기 중이었다.
공작의 머릿속에 땅 속성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는, 루시엘과 자신이었다. 길리아트는 다른 일로 잠입 중이라 부르긴 어려웠다.
“세 명이라면 딱 되는걸요. 저와 아빠, 그리고 키제프까지요.”
그러자 키제프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난 속성이 달라서 안 될 건데……. 네가 이터널을 주어서 얼음까지는 가능하지만.”
키제프는 본래 바람과 어둠 속성에 이터널이 부여한 얼음 속성의 마법까지 가능했다.
그래서 땅 계열의 마법은 아주 낮은 단계만 가능해, 어스 빌드를 구현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공작은 땅 속성을 가진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으니 괜찮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이게 있으니까.”
루시엘이 말갛게 웃으면서 가방에서 자신의 보석인 개나리처럼 샛노란 빛깔의 토파즈를 꺼냈다.
토파즈가 땅 속성의 속성을 가진 보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속성의 힘을 무기에 부여하려면 마법 세공이 필요했다.
“토파즈가 땅 속성을 가진 건 알지만 보석을 그대로 쓸 수는 없잖아.”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원래는 세밀한 마법 세공이 필요하지.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어. 일시적으로 땅 속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루시엘은 에리카와 함께 마탑에서 연구했던 내용이 담긴 마법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서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토파즈를 흙에 묻으면, 노란 반투명 마법진이 구동되고 그 위에 올라선 사람은 일시적으로 강한 땅 속성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던 공작의 눈도 커졌다.
“흥미롭군. 허면 다른 보석들도 가능한 건가?”
두루마리를 열심히 살펴보던 공작에게 루시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었어요. 흙에 묻어 두는 방법으로는 땅 속성만 가능했어요. 그리고 이 방법은 보석 몇 개가 소멸하게 되어서 급할 때만 사용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보석이지만, 그렇게 무분별하게 사용하다가는 금방 바닥이 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루시엘은 적은 개수로도 힘을 극대화할 수 있게 가족들과 자신을 위해 모든 종류의 보석을 넣어 만든 아티팩트를 주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류프델에게 갔을 때, 그게 가능한지 물어봐야겠어.’
루시엘이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키제프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토파즈를 가져가며 말했다.
“네 보석은 알면 알수록 많은 힘이 숨겨진 것 같아.”
루시엘도 고개를 깊이 주억거렸다.
“맞아. 아직도 풀리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언젠가는 꼭 다 알아낼 거야.”
루시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보석이야말로 곧 자신의 힘이니까. 그동안 이룬 많은 일도 보석의 지식을 연구했기에 가능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루시엘은 답답하기보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에게 또 어떤 새로운 힘을 가져다줄지 궁금해.’
기대감에 찬 루시엘의 눈이 일렁였다.
“루시엘. 그럼 토파즈 마법진에 올라섰을 때 효과는 얼마나 유지되는 거지?”
“어떤 마법이건 딱 한 번이야.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는 게 좋겠어.”
루시엘의 대답에 키제프도, 공작도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남은 건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