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마법 바이올린의 활이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동안 루시엘은 공작의 정무실 소파에 틀어박혀 설계도를 검토하고 있었다. 공작과 키제프는 잠시 외출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보좌관실에 있던 엘링턴이 노크하더니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그녀를 불렀다.
“아가 마님. 모처럼 여유로워 보이십니다. 지금마저 일하고 계시지만요.”
“아녜요. 머릿속은 온갖 일들이 부유하고 있어요.”
루시엘은 고개를 살랑 저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에는 달콤한 생크림을 얹은 미니 크루아상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놓아두었다.
“그러실 것 같습니다. 자, 그래서 힘내시라고 좋은 소식 하나 드리죠.”
“좋은 소식?”
“네, 그때 경매로 샀던 와이번 버블이 제법 성장했다고 합니다.”
엘링턴이 제국의 신문 기사를 하나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기사와 함께 폭풍적으로 성장한 와이번 버블의 모습이 그림으로 실려 있었다.
<제국 제일의 경주용 와이번 블랙스콜피온,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 연이어 우승해 최고 인기.>
“버블이 그동안 이렇게 많이 컸다고요?”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잔뜩 커졌다. 그림으로 그려진 버블은 예전보다 두 배는 더 덩치가 커졌고, 뿔과 꼬리도 길어졌다.
수개월 만에 이렇게 자라다니 굉장한 성장 속도였다. 그럼에도 귀여움은 여전했다. 입이 더 커져서 입을 다물고 있어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때 제 명의로 후원 계좌를 만들었지 않습니까.”
“알죠. 그게 왜요?”
“이걸 보십시오.”
엘링턴이 본인 명의의 마법 통장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그때 투자했던 금액보다 무려 다섯 배가 더 불어나 있었다.
“……어어?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 그만큼의 우승을 하지는 못했을 텐데.”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추측하자, 엘링턴이 말했다.
“사람들이 전부 블랙스콜피온의 경기만 보려고 해서 경기 수를 늘렸고, 티켓이 연일 매진이라고 하네요. 인센티브 수익이랑 몸값 높아진 것도 있고요.”
“와, 생각도 못 했네요.”
“아가 마님의 보석을 먹고 자라서 그런 걸지도요. 이 수익은 전부 아가 마님 계좌로 넣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루시엘이 그의 손을 탁 붙잡았다.
“그중 4할은 제게 주시고 1할은 경매소에 후원해 주세요. 나머지 5할은 여기 이 사람들과 엘링턴이 다 같이 나누어 가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항상 제 편이 되어 줘서 고마워요.”
루시엘은 종이에 명단을 쭉 적어서 넘겨주었다.
「베시, 로즈, 에바, 세스 주방장, 시클라인, 에리카, 제르다, 하멜, 갈리우스 백작, 캐서린, 자르가 단장, 노아, 이네스, 챈들러」
루시엘이 지금의 벨슈타인으로 있을 수 있게 해 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곱씹어 보며 적었기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
류프델과 아르제온, 피닉스, 아흰, 요하네스와 클로디아도 고마웠지만 그들에겐 딱히 금전이 요긴할 것 같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거야.’
루시엘이 적어 준 명단을 확인하기도 전에 엘링턴이 말했다.
“예?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세요.”
“그럼 보석으로 드릴까요?”
“……안 받는다니까요.”
“엘링턴도 장가가야죠.”
“……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잠깐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엘링턴은 루시엘의 뜻을 이기지 못하겠다며 굽히고 들어왔다.
기분 좋은 소식에 루시엘은 뿌듯하게 설계도를 마저 검토하고는 정무실을 나섰다.
층계를 내려오는 루시엘에게 에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 마님, 독방에 갇힌 카빌 영애가 꼭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네요.”
“……무시해 주세요.”
지금은 그다지 페넬로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 좋은 기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다음 말에 루시엘은 미간을 좁혔다.
“만나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겠다네요. 꼭 사죄하고 싶다고요……. 실은 아가 마님이 돌아왔다는 걸 들은 직후부터 그랬는데, 이제야 알려 드려요.”
이벨린 할머니께 혼쭐이 제대로 났던 것일까?
사죄를 하겠다니, 분명 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겠지.
루시엘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굳었다.
“알겠어요. 에바. 제가 가서 처리할게요.”
루시엘은 올리브색 드레스 위로 흰색의 두꺼운 숄을 걸친 채, 기사에게 지하 감옥으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마침 그녀를 발견한 노아가 얼른 뒤따라 나섰다.
“저도 같이 호위하겠습니다.”
“고마워, 노아.”
어느새 페넬로페가 갇혀 있는 독방에 다다랐다.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감싸 쥔 페넬로페가 멍한 얼굴로 웅크리고 있었다.
퀭한 눈동자로 창살 밖을 내다보던 페넬로페가 루시엘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루…… 루시엘!”
“멍청하구나, 페넬로페.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고 그걸 날렸네.”
페넬로페가 파르르 입술을 떨다가 꼭 깨물었다.
“미안…… 미안해. 네게 사죄할게. 전생인지 다른 세상인지 모르지만, 내가 네게 저질렀던 일들 다 봤어……. 사, 사신이 보여 줘서 말이야.”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은 페넬로페가 흑흑 흐느끼듯 울었다.
‘사신이 보여 준 거라면 레이븐을 말하는 걸까?’
“사람 같지 않은 짓 했다는 거 알아. 하, 하지만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 한 번만…… 용서해 줘.”
페넬로페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두 뺨에는 눈물이 가득 흘렀다.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지워질 수 있는 일이었다면, 나는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았을 거야. 이제 너무 늦었어.”
페넬로페가 처절하고 처량하게 매달릴수록, 루시엘의 마음은 더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사과할 수 있었으면서 그땐 왜 그랬니, 페넬로페?
“……우리 그래도 힘을 합쳐서 카일라를 잡기로 했잖아, 그렇지?”
페넬로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루시엘의 옷깃에 매달렸다.
루시엘이 페넬로페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검은 날개의 기사가 페넬로페를 검집으로 밀어냈고, 그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한 번 더 손대면 팔이 잘릴 거다.”
기사가 차갑게 엄포를 놓자 페넬로페가 더는 팔을 뻗지 않았다.
루시엘의 진홍안이 서늘하게 굴렀다.
“페넬로페. 이제 너와 뭘 어쩌고 싶은 생각 없어.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루시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루, 루시엘! 제, 제발, 나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흑, 흐흑.”
이대로 지하 감옥에 있게 된다면 끔찍한 일밖에 기다리지 않는다는 걸, 페넬로페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에는 너무나 늦었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루시엘……!”
미친 듯이 창살에 매달려 불러도 루시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루시엘은 기사들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페넬로페의 후속 처리는 이제 공작님께 맡길게요.”
그동안은 루시엘이 그나마 보호를 해 주었기에 페넬로페는 다른 이들보다 편안히 있을 수 있었다.
그 보호가 없어진다면 페넬로페에게는 이제 지옥이 시작될 터였다.
오르비아 백작과 제 오빠인 막시무스가 그랬듯.
“살려 줘어…… 끄흑! 나, 날 버리지 마!”
페넬로페는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이지를 가진 페넬로페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빠르게 퍼졌다. 지하 감옥을 총괄하는 기사가 자르가에게 보고를 먼저 했고, 그다음은 벨슈타인 공작과 키제프, 솔리아페, 이벨린과 노공작인 길리아트에게로.
가족들은 루시엘의 결정에 기뻐했다.
―드디어 우리 새아가가 큰마음을 먹었구나.
―루시엘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서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오 년 전부터 지녀 왔던 꼬깃꼬깃한 복수 명단을 바라보며, 키제프는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벨슈타인이 악당 가문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지하 감옥에 들어가면 살아 나오는 자가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였다.
기실 그것은 꽤 정확한 사실이기도 했다.
어쨌든 키제프는 복수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흥분감이 몸을 채우는 걸 느꼈다.
자신 역시 어쩔 수 없는 벨슈타인.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준 다음, 목을 베는 것이야말로 키제프와 벨슈타인 모두가 생각하는 진정한 복수였다.
어둠 속에서도 웃고 있는 제 아들을 보며, 공작이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뇌까렸다.
한편 카빌 후작이 몰래 위조된 골동품을 내다 팔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리아트는 암흑상 길드에 수장으로 변장해 며칠째 잠입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 귀환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가주는 루이비드 너잖냐. 나는 취미 생활 겸 너구리 사냥도 할 겸해서.”
―그놈을 잡는 건 이제 너무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아버지. 그간 저와 루시엘이 다 해 놓은 농사, 수확만 싹 해 가겠다는 심보 아닌지.
“어허. 무시하지 마라. 카빌 후작은 제 부인을 버려 두고, 그 집을 나왔다.”
―그랬습니까. 정말 가지가지 하는 족속이군요.
“늙은 너구리라 이제 배를 갈라도 나올 건 없겠다만. 반드시 붙잡아 죗값은 톡톡히 치르게 해야지.”
루이비드는 자못 쉬운 것이라 무시했지만 길리아트는 나름 신경 쓰고 있었다.
후작 놈이 몰래 위조한 골동품은 문서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 정보 조직으로도 알 수 없었다.
자신도 자주 거래하는 골동품점의 물건이 위조라는 걸 알고, 그때부터 나선 거였으니까.
마탑에서는 제발 일 처리를 좀 해 달라고 빌고 있었지만, 카빌 후작 놈만큼은 자신이 붙잡고 싶다면서 길리아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일이었다.
‘루시엘의 복수를 위해서다.’
“두목, 그자가 또 왔습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암흑상의 수하가 들어와 보고했다.
거대한 흉터가 가로지른 얼굴에 안대를 착용한 길리아트는 누가 봐도 암흑상 보스 그 자체였다.
시가를 비벼 끈 길리아트가 물었다.
“게토라는 사내입니다. 또, 물건을 가져왔다고 하는데요.”
“그러냐? 어서 안으로 들여보내.”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