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희미하지만 얼음의 제단에서 느꼈던 사악한 기운을 아르제온은 기억했다.
‘……이건 역시 카일라인가.’
본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검은 종이학을 낚아채며 순간이동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신전의 첨탑 가장 꼭대기에 올라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아르제온은 루시엘이 마련해 준 통신구를 꺼냈다.
“루시엘, 급한 용건이다. 황자의 방 창문으로 검은 종이학이 날아들었는데, 카일라의 기운이 느껴진다. 어떻게 하지?”
아르제온이 굳은 얼굴로 물었으나, 통신구 속 루시엘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카일라가 이제야 검이 가짜인 걸 알아챈 모양이네. 그걸 레이놀드에게 알리려고 한 걸 테고. 하지만 아르제온이 그걸 방금 가로챈 덕에 전해지지 못했으니까 타이밍이 좋았다. 그치?
“음, 내가 아는 루시엘이 맞나? 대범해졌군.”
―예측이 가능했던 일이었으니까. 우선 내용을 확인해 줘. 난 이제 공작성으로 귀환하고 있어.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말하자아르제온이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편지를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레이놀드.
블루 익스큐션이 가짜였단다. 빌어먹을 벨슈타인이 우리보다 먼저 손을 쓴 게지.
그놈들에게 놀아나지 않으려면, 주변의 모든 걸 조심해야 한다.
루시엘, 그것이 혹시 눈앞에 나타나도 믿어서는 안 돼.
검과 제단까지 꾸며 낼 정도라면 그 이상의 것도 꾸며 낼 놈들이야. 이 어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아드님 곁으로 가마.
그래, 신전 맞이. 그날이 좋겠구나. 크리스털 페어리와 검을 한 번에 손에 넣자꾸나.」”
아르제온이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도 종이는 불타올라서 재가 되어 흩날렸다.
―카일라가 신전 맞이에 나타난다니 유용한 정보야. 혹시 또 연락이 오거든 이번처럼 전달해 줘. 그리고 또 알아낸 게 있어?
루시엘의 물음에 아르제온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직. 그런데 레이놀드 놈은 확실히 네게 이상한 집착을 하는 거 같던데. 토끼로 변신했더니 내게 네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소름 끼쳐.”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줘. 황자는 아무래도 신관들에게서 자신의 부족한 마나를 채웠던 것 같아. 또 누군가를 희생시킬지 몰라.
“제 어미랑 똑같군. 아까 다른 부탁은 뭐지?”
카일라 역시 제 목적을 위해서 누구든 희생시킨 다는 점에서 똑닮은 모자였다. 아르제온은 아까 루시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선은 그가 잠결로 착각할 수 있게 가넷을 한번 사용해 줘. 그럼 내 분신이 나타날 거야. 내 분신은 나와 연결되어 있으니, 명령은 내가 내릴게.
“교란작전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인데. 놈이 자고 있다.”
―응, 그럼 부탁해.
아르제온은 방으로 돌아가서 레이놀드의 얼굴을 살폈다. 가넷을 꺼내, 방 안에 켜 있던 촛불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화륵.
가넷을 태우자 이내 루시엘의 분신이 나타났다. 아르제온은 토끼의 모습으로 돌아와, 눈을 빛내며 감상을 시작했다.
‘……이제 잠을 깨워 줄까.’
아르제온은 방 안을 냉기로 채웠다.
이내 주변을 엄습하는 추위에 레이놀드가 뒤척이며 인상을 썼다.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뜨니 곧이어 루시엘의 분신이 연기를 시작했다.
* * *
“당신은…… 레이놀드 황자 전하?”
꿈결처럼 달콤한 목소리.
누군가 제 방 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여긴 내 방이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레이놀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제게 푹 빠진 신관들이 방을 습격하는 일은 몇 번 있었기에 귀찮게 여기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알아보자마자 눈이 잘게 떨렸다.
어린 시절 마주했을 때보다 성장하긴 했으나, 이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그가 원하던 대상.
크리스털 페어리이자, 벨슈타인 공자비. 루시엘이었다.
“……루시엘?”
“…….”
“이게 어떻게 된,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 그것보다…… 아, 아니. 정말 루시엘이라고? 그럴 수는 없는데.”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은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아스트리야 신전에 있는 신관 중에 저런 미모는 없을 것 같았다.
환한 은발에 분홍색 눈을 가진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란 얼굴이었다.
레이놀드 역시 놀란 눈으로 루시엘을 빤히 보았다.
보는 순간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과연 크리스털 페어리였다.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비비적거리던 레이놀드는 제 심장이 몹시 쿵쿵 뛰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왜 여기에 있는지. 분명 공작성에서 잠들었는데…….”
레이놀드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꿈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정말 꿈인 건가.”
“꿈인가 봐요. 왜냐면 저도 지금 꿈을 꾸는 중이니까……. 갑자기 눈앞에 당신이 있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환상이든, 꿈이든 루시엘이 눈앞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는데 이렇게 곁에 있다니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간절히 원하는 상대는 꿈에서 만난다더니 정말 놀랍군.”
레이놀드의 자안이 깊게 빛났다.
“……글쎄요. 난 그냥 꿈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이만 가 봐야겠어요.”
루시엘이 방을 떠나려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놀드가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만. 루시엘! 나는 그대를 원해. 그대 역시 그렇다면 내게로 와 주었으면 좋겠군. 벨슈타인 공자는 그대를 제국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없지만 나는 가능해.”
“내가 크리스털 페어리이기 때문에……?”
“대화가 빨라서 좋군. 맞아, 하지만 그대에게 개인적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래도 다행이군. 그대는 나를 몹시 혐오하는 줄 알았는데.”
레이놀드는 속사포처럼 말했다. 꿈에서라도 루시엘을 꼬드겨서 차지하고 싶었다.
보석을 만드는 아름다운 요정.
루시엘을 가지면 원이 없을 터였다.
“……음.”
“이렇게 꿈까지 꿀 정도면, 그렇지 않다고 믿어도 될까.”
잠시 침묵하던 루시엘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만나면 대답해 줄게요.”
“……아, 그렇지. 보름 안에 아스트리야가 벨슈타인에 닿을 테니 곧 신전 맞이 행사에서 다시 볼 수 있겠군.”
“그렇네요. 그때 만나요.”
루시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꿈,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도 기억하고 기다릴 테니까.”
“그럼 안녕히.”
“자, 잠깐만!”
레이놀드가 아쉬운 표정으로 루시엘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루시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석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레이놀드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낮게 읊조렸다.
“……가 버렸군. 이렇듯 생생한 꿈이라니.”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몽롱한 기분이었다. 입술을 잘근 깨문 레이놀드는 문득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신전 맞이’ 행사에 가서 루시엘을 다시 꼬드겨 낼 생각을 하니 희열에 차올랐다.
“……이 꿈처럼 기다려 줘, 루시엘.”
레이놀드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스르르, 침대 아래 있던 토끼가 푸른빛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수면 마법에 걸린 레이놀드는 이내 침대에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잠든 레이놀드를 바라보던 아르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쨌든 단단히 착각해 넘어오긴 한 것 같은데…….’
* * *
루시엘이 천공선의 여정을 마치고, 공작성으로 귀환한 지도 이틀이 지났다.
아스트리야에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가족들과 계획을 공유하고 의논했다.
“……제 분신을 본 레이놀드의 반응이 생각보다 더 컸어요.”
“어떻든?”
공작의 물음에 루시엘은 레이놀드가 보인 반응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공작과 키제프가 주먹을 꾹 쥐었다.
“……확실히 미끼를 문 것 같아요. 어쨌든 레이놀드를 유인해 내는 건 쉬울 것 같아요. 잘됐지요, 아빠?”
그러나 생각한 반응들이 아니었다.
“……아니.”
루시엘의 말에 공작과 키제프는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분명 일은 쉬워진 듯하지만, 기분이 몹시 더러운 건 사실이군. 어쨌든 고생했다. 우리 새아가.”
“……감히 너를 담은 그놈의 눈알부터 파내야겠어. 다음은 널 건드린 팔, 심장을 마물에게 던져 주겠어.”
키제프가 이를 아드득 갈며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공작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갈기갈기 찢어야겠다.”
짐승처럼 살기를 뿜어내며 흥분하는 두 사람을 보며, 루시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분신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황성이나 아스트리야 신전을 파괴했을지도 몰랐다. 꽤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잘 먹혀들었다.
아르제온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향한 레이놀드의 탐욕은 여전했다. 레이놀드에게 미끼를 던지는 건 이제 마쳤고, 이제 다음은 뭘 해야 할까.
루시엘이 다음 일정을 생각하는 동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엘링턴과 보좌관이 함께 들어와서 고했다.
“각하, 아스트리야의 신성 통신구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보름 후에 신전 맞이를 열어 달라는 청입니다.”
“승낙한다고 전해.”
공작과 키제프는 아직도 레이놀드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키제프, 경매소에 새로운 고문 기구가 있다더군. 갈 테냐.”
“좋습니다.”
“저도 갈래요.”
루시엘이 끼어들자, 키제프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그런 거 보면 안 돼.”
“……으응? 어째서.”
“자, 루시엘은 이거부터 검토해.”
키제프가 루시엘에게 둘둘 말려 있는 설계도를 건넸다.
이내 그걸 펼쳐 본 루시엘이 반색했다.
“아…… 갈리우스 백작님의 유리 온실 설계도구나. 고마워, 키제프.”
“이상 없으면 내일 당장 황도로 가서 제안할 거야. 알현 요청은 해 두었지.”
“그래, 레이놀드에게 화려한 환영 인사를 해 주도록 하지.”
공작의 말에 루시엘과 키제프도 고개를 주억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