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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44)화 (244/282)

<244화>

냉기와 함께 물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르제온이 나른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주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 같은데.”

“……아르제온밖에 생각이 안 나서.”

“좋아, 무슨 일이지?”

“레이놀드를 감시해서 신관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아봐 줘.”

“……보상은?”

“여기 있어.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우선 레이놀드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아낸 후에 알려 줄게.”

루시엘이 아르제온에게 보석이 든 주머니를 쥐여 주며 말했다. 아르제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지. 하지만 사실 그놈은 누구보다 너를 원하고 있을걸. 다른 희생자는 대체물일 뿐. 네 그림자만 봐도 혹할지도 모르겠군.”

“……!”

혹시 제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걸까? 언제나 생각 없이 굴던 아르제온이었기에 루시엘은 그를 다시 보았다.

“맞아. 그럴 거야. 다음 부탁도 그것과 관련이 있어.”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스스로를 미끼로 삼아서 레이놀드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잘 먹힐 거라는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걸 위해서 가넷도, 인형도 준비했어.’

루시엘은 저 멀리 걸어가는 레이놀드를 주시하며 얼른 아르제온을 재촉했다.

“레이놀드를 놓치겠어. 얼른 가.”

“알았다, 그리고 루시엘. 실은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응? 뭔데?”

루시엘은 다소 마음이 급해졌으나 아르제온은 느긋한 얼굴로 짓궂게 입가를 말아 올렸다.

“……네 심장박동 다 들린다. 키제프랑 있을 때 유독 빠르게 뛰는 것도.”

“힉, 거짓말! 어, 어째서 그게 들리는데?”

“모른다. 네 지팡이에 연결된 마나 때문일지도?”

아르제온이 싱그레 웃은 다음, 순간이동 마법을 썼는지 특유의 냉기가 감도는 공기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루시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키제프랑 있을 때 제 심장이 얼마나 높다랗게 쿵쿵 뛰는지 전부 들은 걸까?

‘아, 너무 창피한데…….’

루시엘은 저 음흉한 마탑주와 권속의 계약을 해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심히 고민이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서둘러 학술원 건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노아가 한 여성 신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노아!”

“이 사람은 잠깐 기절한 것 같습니다. 맥박은 뜁니다.”

“그래? 다행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해 주고 가야 하지 않을까.”

축 늘어진 여자를 보자 루시엘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노아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놔두면 누군가 와서 발견할 겁니다. 1시간까지 이제 5분도 안 남았습니다.”

“……잠깐이면 돼. 노아, 뒤돌아 줄래?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도울 수 있어.’

노아가 어쩔 수 없이 뒤돌자 루시엘은 얼른 손수건으로 가린 다음 다이아몬드에 성수를 부어, 신관에게 사용했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파아아, 나기 시작했다.

신관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며 의식이 돌아오려 하자, 루시엘은 안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깐. 아흰은 어디로 갔지?”

그때 구석에서 몸을 숨긴 채로 달달 떨고 있던 아흰이 야옹, 하며 네발로 걸어 나왔다.

“가야 됩니다. 진짜로요!”

“응!”

노아가 아흰을 덥석 안은 채 루시엘의 손을 잡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문이 달칵 열리며 캐서린과 챈들러가 데리러 왔다.

“아가 마님!”

“어서 가죠.”

캐서린이 다시 황금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자 건너편에는 천공선의 선실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다시 천공선의 선실로 무사히 되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던 루시엘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흰은 퐁 하고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아흰, 괜찮아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황자가 신관의 마력을 빼앗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하지만 그가 입을 떼려던 찰나 요하네스가 선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다들 숨을 죽였다.

“……공자비, 주무십니까. 목적지에 다 도착했습니다.”

“…….”

루시엘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밖에 있던 요하네스가 한 번 더 불렀다.

“공자비? 아직 주무시는 건가……?”

요하네스가 그냥 돌아서려 할 때였다. 리카라는 선원이 보고했다.

“어째 벨슈타인 공자비님의 다른 일행도 다들 조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다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요하네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차 문을 두드렸다.

쿵쿵.

지금 문이 열리면, 몹시 의심을 살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여럿이서 굳이 한 공간에 모여 있기에는 몹시 비좁은 곳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신관복을 입은 채였고 다들 달리기까지 해서 온몸에 땀까지 뻘뻘 흘린 채였다.

캐서린이 루시엘의 옷부터 먼저 바꾸어 주고는 속삭였다.

“아가 마님, 대공자 전하의 시선부터 따돌려 주세요.”

“알겠어요.”

루시엘이 살짝 문을 열고는 어느새 다시 고양이로 변한 아흰을 안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흐암!”

“공자비.”

“미안해요. 저 진짜 피곤했었나 봐요. 잠깐 사이에 아주 깊게 잠든 거 있죠.”

루시엘이 하품하는 입을 가리면서 말하자, 요하네스가 말했다.

“이런, 간밤에 영 못 주무셨던 겁니까? 최고로 아늑한 선실 컨디션을 유지하라고 일러 놓았거늘! 담당을 불러 족쳐야……!”

“아앗, 아니에요. 선실은 아주 푹신했어요. 그나저나 갑판 위로 올라가서 계곡 구경할래요.”

“좋습니다.”

“야옹.”

루시엘이 요하네스를 따돌리는 동안, 캐서린이 열쇠를 이용해서 문을 돌려 기사들과 함께 식당 칸으로 이동했다.

과일을 아그작 씹으면서 기사들이 어슬렁 갑판 위로 올라오는 걸 확인한 루시엘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럼에도 아까 아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레이놀드는 과거에도 선천적으로 약하고 적은 마나를 타고났었다. 그걸 보충하려고 다른 신관들을 노린 걸지도 모른다.

신관이든 마법사든, 심장에서 비롯된 마나를 사용해 힘을 발현하는 건 결이 같았다.

다만 힘의 근원이 다를 뿐.

성력 역시도 마나를 사용해, 기적이나 치유술을 행하는 것이다.

‘……정찰은 마쳤으니 아르제온을 기다려야겠어.’

눈앞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지만, 루시엘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검은 망토를 두른 정찰조들이 사방에 깔렸습니다. 카일라 님. 여기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창밖을 살피던 레이놀드의 부관 팔로스가 말했다.

“끄으윽. 알고 있어. 네 놈은 가서 인간이나 좀 잡아 와.”

그간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팔로스는 갑갑했다.

카일라가 강한 존재라는 건 알지만, 벨슈타인은 더욱 강력했고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소울 이터의 의식을 다시 시도하시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한참 걸리실 겁니다. 발루크 영지로 돌아가 몸을 회복하고 추후를 도모하심이 어떠십니까. 황자 전하도 황궁으로 귀환하실 테니 말입니다.”

“멍청한 놈. 발루크 영지나 황성에도 벨슈타인 병력이 이미 깔렸을 거다.”

머쓱해진 팔로스가 잠시 주변을 시찰하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속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카일라는 부산스럽게 방 안을 서성이다가 한쪽에 기대어 놓은 물건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으로 감싸 둔 블루 익스큐션.

‘지금 믿을 것은 이 보물뿐이구나.’

그래, 이 검 안에는 악마가 깃들어 있어 어려움이 닥쳤을 때 힘을 주었다.

간절히 빌어 보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카일라는 천을 벗겨 내고는 블루 익스큐션을 놓아두고, 빌기 시작했다.

“세상의 가장 깊은 어둠이시여. 제발 도와주십시오.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기도하던 카일라는 블루 익스큐션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어쩐지 제단에서처럼 더는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에서 뿜어지던 검고 푸른 아지랑이도 나오지 않았다.

“……어, 어째서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지? 이게 어떻게 된……!”

충격에 검을 놓치자 탱그랑, 소리가 울리며 손잡이 일부에 금이 갔다.

“허어, 이럴 수가! 이건…… 진짜 처형검이 아니야!”

고개를 가로젓던 카일라는 말도 안 된다면서 그날 벨슈타인에게 당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호, 혹시 이 모든 게 전부……!’

“크아아악! 아, 아니야!”

벨슈타인 놈들이 미리 바꿔치기해 두기라도 했던 건가?

그럼 진짜 블루 익스큐션은 어디에 있지?

“이럴 수는 없어!”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카일라는 실성할 것만 같았다.

“내 이놈드을……! 감히 나를 속였단 말이냐?!”

분노로 인해서 검은 손톱이 스스스 자라났고, 콱 움켜쥔 주먹의 살까지 꿰뚫었다.

사아아아!

흑주술을 사용하자 블루 익스큐션인 줄로만 알았던 검은 빠르게 녹슬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까지 저놈들이 치밀하게 움직인 것인지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다.

‘더는 놈들의 농간에 당할 수 없다. 레이놀드…… 레이놀드에게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 * *

고양이 다음은 토끼인가. 요즘 들어 부쩍 작은 짐승들이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레이놀드는 제 곁으로 와서 겁도 없이 맑은 눈망울을 굴리는 보송한 토끼의 목덜미를 잡아 붙잡았다.

바동거리는 작은 짐승의 털은 보드랍고 살은 연하다.

천천히 쓰다듬으며 레이놀드가 자안을 굴렸다. 살가죽 안의 골격이 만져졌다. 조금만 힘을 가해도 쉽게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사랑스럽다.

“……작고 어여쁜 토끼로군.”

레이놀드의 눈이 미묘하게 빛나며 비뚜름하게 고개를 꺾어, 토끼를 찬찬히 살폈다.

“루시엘을 닮았어.”

“…….”

“네 이름은 이제부터 루시엘이다.”

레이놀드는 토끼를 안아 들고, 씩 웃었다.

여자아이들은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한 마리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레이놀드는 아까 로나라는 아이도 고양이를 보고 사족을 못 쓰는 걸 떠올렸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너무 잠잠했다.

갈수록 마나가 약해지는 듯해서 무방비하게 신관들의 마나를 취했다. 그러다 실수로 둘이나 죽였고.

빌어먹게도 지상으로 시체를 몰래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실패해서, 심장마비로 꾸며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크리스털 페어리를 손에 쥐어야 할 텐데.

“후, 이 허약한 마나로는 큰일을 할 수 없어.”

레이놀드가 인상을 찌푸리다가 잠이 들었다. 잠든 그를 내려다보던 토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였다. 창문 틈으로 검은색 종이학이 비집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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