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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43)화 (243/282)

<243화>

예배당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자못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나 가장 구석에서 노래하고 있는 레이놀드를 본 안드레아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간밤의 자신이 목격한 그 일 때문일까…….

레이놀드가 어린 신관과 함께 다정하게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 어린 신관은 신전에 나오지 않았다.

최근 몇 달 사이, 신관이 둘이나 죽은 탓일까. 모종의 음모가 있는 듯, 나쁜 예감이 느껴졌다.

젊고 건강하던 그들이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신전의 주치의도, 교황 다음으로 제일간다는 자신의 성력으로도 그들의 병을 고칠 수도, 이유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레이놀드 주변에는 언제나 신관이나 추종자들이 넘쳤는데 죽은 신관들도 그와 퍽 가까운 사이였다.

‘……뭔가 이상해.’

안드레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레이놀드를 바라보았다. 레이놀드의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원하는 듯한 저 불쾌한 시선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었다.

신전의 모든 예배가 끝나고 안드레아는 주신 레트라논께 빌었다. 이 불안감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안드레아가 기도를 마치고 나자, 누군가 그를 불렀다.

“추기경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에 병적으로 보일 만치 창백한 흰 피부, 레이놀드가 퀭한 보랏빛 눈을 굴리면서 공손히 말했다.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아스트리야가 곧 벨슈타인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전 맞이를 열어 달라는 서신을 속히 보내 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예정된 일이니, 그리하지요.”

“예, 가능하면 성대한 신전 맞이로요. 우리 아스트리야는 그간 오랫동안 하늘을 누비며 제국을 보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벨슈타인에서도 마땅히 신의 은총에 보답해야지요.”

레이놀드는 주변의 다른 신관들도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른 예배당 곳곳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신관들과 신도가 있었다.

“레이놀드 황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벨슈타인은 제국의 큰 부호이니, 마땅히 우리가 편히 쉬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끔 해야지요.”

일부 신관들도 레이놀드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에는 고위직 신관도 있어 레이놀드의 목소리에 힘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의 생각은 달랐다.

“벨슈타인이 권세 높은 부호라고 하여, 신의 은총을 특별히 더 받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더욱이 공작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자 다른 고위 신관이 딴지를 걸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는 말씀이시오?”

“그런 뜻이 아니라 과도한 요구는 괜한 문제만 일으킨다는 겁니다. 신전 맞이는 아스트리야와 닿는 땅에서 잠시 쉬어 가는 예를 갖춘 행사이지, 그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요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섯 번째 추기경인 그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지만, 오랜 시간 지상의 달콤한 향락을 맛보지 못했던 신관들에게는 고깝게 들리기도 했다.

자급자족이 어려운 아스트리야에서는 당장에 빵 한 조각도 아쉬운 지경이었다.

콴드라 사막 지역을 지나 오면서 교황을 따라 피신한 두 명의 추기경과 이국으로 고행을 떠난 넷째를 제외하면, 아스트리야에는 현 시점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추기경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젊고 강한 신력을 가진 안드레아는 고위급 신관들과 반목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배당에 감도는 싸늘한 정적에 레이놀드가 얼른 분위기를 무마하려 말을 꺼냈다.

“제가 기대에 들떠서 괜한 말을 꺼냈나 봅니다. 추기경님 말씀대로, 신전 맞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지요. 그래도 지금쯤이면 벨슈타인에 알려야 할 시기라 생각합니다.”

레이놀드가 그리 말하자 딱딱하던 분위기도 다소 풀렸다.

수십여 명의 군중들 틈에서 루시엘과 노아, 챈들러도 각각 귀를 기울이며 신전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신전의 예배당을 미리 빠져나가, 다른 건물의 지형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루시엘은 오 년 동안 달라진 레이놀드를 천천히 살필 수 있었다.

전생의 레이놀드에 가깝게 성장한 모습이었지만, 과거와는 달랐다.

과거에는 황성에서 자유롭고 방탕하게 자랐을 테지만, 지금의 레이놀드는 이곳에 유폐되었기에 어딘가 더 병약하고 말랐다.

그러나 저 만들어 낸 가면과 광기에 찬 눈빛은 그대로인 듯했다.

이렇게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저만큼이나 제 입지를 다져 놓은 레이놀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레이놀드…… 여기서도 적응을 하고 있었구나. 과연 끈질긴 생명력이야.’

추기경과 대화를 마친 후, 레이놀드는 신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신전을 빠져나가 학술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루시엘은 아흰과 함께 몰래 뒤쫓아 학술원까지 들어갔다.

루시엘은 아흰을 보내 레이놀드의 감시를 맡긴 후에 아무도 없는 빈방을 찾아서 키제프에게 통신했다.

“듣기만 해 줘. 아스트리야에서 곧 벨슈타인으로 신전 맞이를 요구하는 서신이 갈 거야.”

그렇게 말을 전하고 루시엘은 통신구를 닫았다. 방을 나가자 문득 방울 소리가 들려와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흰인가……?’

딸랑.

벽에 몸을 붙이고 다가가니, 목에 방울을 달고 있던 아흰이 종종종 네 발로 걸어 한 방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루시엘도 따라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손잡이가 잠겨 있었다.

‘레이놀드가 안에 있나?’

루시엘이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좀처럼 안에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아직은 조심해야 하기에 주위를 살피며 몸을 뗐다. 때마침 신관 두 명이 복도를 지나면서 말했다.

“……오늘 로나가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갔지? 예배에도 안 나오고, 다음 교리 시간에 로나가 발표인데.”

“그러게. 혹시 어디 아픈 건지도 몰라. 기숙사실 관리자에게 가서 안부라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이야기를 나누던 신관 중 한 사람이 루시엘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너도 학술원 출신이니? 못 보던 얼굴이네.”

“……어? 어어. 나도 몸이 안 좋아서 그간 기숙사실에서 쉬느라고 그럴 거야.”

루시엘이 대충 얼버무리면서 미소 지었다.

“그럼 로나가 괜찮은지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신전에서 지내서 기숙사실은 잘 몰라.”

“아, 아. 나중에 만나게 되면 알려 줄게. 나도 그 애는 못 봐서.”

“그래, 수고해.”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의 평범한 소녀 신관으로 위장한 루시엘은 조용히 안경을 들어 올렸다.

신관들이 지나가면서 저희끼리 꺄르륵 떠드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근데 저렇게 예쁜 애가 있었나? 이름을 물어볼걸.”

“그러게. 내가 저 정도 되면 레이놀드 황자님이 복귀하기 전에 꼬실 거야.”

“……야, 넌 안 돼.”

그들이 완전히 지나가는 걸 살핀 후에 루시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음…… 레이놀드, 여기서 다른 신관들을 만난 걸까?’

루시엘은 과거의 레이놀드가 했던 행동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그는 여자에는 큰 관심을 갖긴 했지만, 연애 감정이나 사랑에 관심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증스러운 세 치 혀를 굴려 진심을 꾸며 내는 것은 누구보다 잘했다.

‘루시엘, 그대를 처음 본 순간 난 첫눈에 빠졌어. 내가 구원해 줄게, 내 사랑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순진한 소녀에게는 먹힐 만한 사탕발림들.

바보같이 과거에는 그 말들을 믿었다.

그를 사랑하진 않지만 자신을 진창에서 구해 줄 진짜 ‘왕자’라고 믿었었다.

루시엘의 눈이 깊이 침잠했고, 목이 까끌까끌하고 따끔거렸다.

‘지금도 자신의 목적 때문에 누군가를 그렇게 위험에 빠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에게 여자는 단순히 이용할 도구일 테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신관들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루시엘은 괜스레 조금 전 들은 말이 거슬렸다.

‘로나’라는 아이. 괜찮은 걸까?

그렇지만 더 무언가를 캐내기에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제 캐서린과 합류해서 돌아가야 할 터였다.

루시엘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강한 힘을 가진 상대가 나타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가 마님, 접니다. 노아.”

“노아, 챈들러는 어쩌고 혼자 여기 있어?”

“……그야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셔서 불안해서 찾으러 왔습니다. 챈들러 선배는 성기사단 건물을 둘러보러 간 것 같습니다. 요 앞 분수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니, 이제 돌아가시면 되실 겁니다…… 어?”

속삭이던 노아가 갑자기 시선을 빼앗긴 듯 눈을 돌렸다.

어느 방 창문 너머로 레이놀드가 멀거니 서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던 노아가 루시엘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저깄네요.”

“맙소사. 저 방에 아흰도 같이 들어갔었는데…….”

“일단 저자가 나온 후에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응. 그게 좋겠어.”

루시엘은 아흰이 무사하길 바라면서 레이놀드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이내 레이놀드가 서늘한 표정으로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루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대로 그냥 가기엔 아까운데. 레이놀드가 뭘 꾸미는지 알아내야 해.’

하지만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부탁할 사람이 있기는 했다.

이동이 자유롭고, 자신과 전언을 나눌 수도 있는 존재가.

루시엘은 아르제온을 떠올렸다.

“노아. 방으로 가서 안을 살펴 줘. 나는 잠시 후에 뒤따라갈게. 알겠지?”

“예? 아가 마님, 단독 행동은 금지인 거 아시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1분 내로 따라갈게.”

“……알겠습니다.”

루시엘의 단호한 말에 노아도 얼른 학술원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루시엘은 주위를 살피고는 조용히 지팡이를 꺼내 사파이어에 깃들어 있는 아르제온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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