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크르르르.
캄캄한 지하 저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대체 여긴 어디예요?”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더니 아까부터 계속 기분 나쁜 지하로 데려가고 있었다. 자못 불안해진 페넬로페가 물었다.
이벨린이 푸른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면서 뒤돌았다.
“네 오라비를 만날 수 있을 거다.”
“……네?”
“보고 싶지 않니? 하나뿐인 가족이잖니. 바로 저기 있다.”
이벨린이 차갑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어둠 속에 무언가 있었다.
목에 무거운 구속구를 매달고 있던 산발의 더러운 남자는 짐승에 가까운 꼴로 창살 안에 갇혀 있었다.
“저, 저게 마, 막시무스 오빠라고요?”
이벨린이 페넬로페를 그쪽으로 휙 밀었다. 그러자 막시무스가 발작하듯, 창살 건너편에 있는 페넬로페를 향해 손을 마구 뻗었다.
“크르, 크르르르!”
“끼야아아악!”
막시무스의 손톱에 할퀴어져 페넬로페의 팔에도 상처가 났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 페넬로페가 발버둥 치며 달아나려 했다.
“시, 시, 시, 싫어! 아악! 사, 살려 줘요! 살려 주세요!”
페넬로페가 이벨린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일말의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눈을 한 이벨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루시엘도 그렇게 말했다더구나. 하지만 막시무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지. 루시엘에게 저지른 건 인간만도 못한 짓이었다. 그러니 짐승으로 사는 것이 마땅하지.”
스스스!
푸른 눈을 굴리며 이벨린이 드래곤 마나를 방출하자 발악하던 막시무스와 겁에 질린 페넬로페가 섬뜩하고 두려운 기운에 짓눌려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얘야. 너도 네 오빠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네, 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페넬로페가 그제야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울먹였다.
“너도 만만치 않더구나. 페넬로페. 루시엘을 언제나 짓밟고 괴롭힐 일들만 꾸몄지.”
“……아아, 아뇨.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꾸미긴 했지만 당하는 건 오히려 나였다고요…….”
페넬로페가 억울한 얼굴로 부정했다. 그러나 이내 레이븐이 어두운 기운을 흩뿌리면서 지하 감옥에 나타났다. 그 뒤에는 씁쓸한 눈을 한 키제프가 보였다.
이벨린은 예전부터 키제프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기민한 드래곤의 감각은 때로는 모든 비밀도 들춰내곤 하니까.
몇 년 전 레이븐과 마주쳤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이벨린은 그가 사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키제프가 더 강한 힘을 기르기를 바랐다. 사신의 힘에 덜 기대면서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리고 지난밤 키제프는 루시엘을 위해서, 사신과 계약을 했던 것을 뒤늦게 고백했다.
‘고생했다, 키제프. 힘들게 짊어지고 왔던 사신의 굴레마저도 루시엘 앞에서는 무겁지 않은 듯해 다행이구나.’
그리하여 레이븐과도 협력이 가능했던 거였다.
레이븐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씩 웃으며, 페넬로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아.”
“…….”
페넬로페가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자, 레이븐이 와서 강제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봐. 네가 전생에 저지른 업보들을.”
이내 페넬로페의 영혼과 연결된 루시엘의 예전 생의 기록들이 페넬로페의 눈앞에 펼쳐졌다.
루시엘을 한없이 짓밟고 괴롭히면서 웃음 짓는 사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페넬로페의 초록빛 동공이 커다래졌다.
사악하고 악마 같은 표정이었다.
“저렇게까지 했다고? 아, 아니야! 거짓말, 저건 내가 아니야! 아니, 이번 생에는 저지르지 않았는데, 그것까지 내가 벌 받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페넬로페가 머리를 쥐어뜯은 채 절규했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이번 생에서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넌 똑같았을 테니까.”
레이븐이 씁쓸한 얼굴로 말하며 아스라한 검은 연기가 되어 스륵, 사라졌다.
바르르 떠는 페넬로페 앞으로 다가온 이벨린이 푸른 눈을 굴렸다.
“이제 조금은 알겠니? 네가 얼마나 악독한 아이였는지. 나였다면 몇 번이고 네 목을 졸랐을지도 모르겠구나.”
“…….”
“네가 살길은 하나란다. 루시엘이 돌아오면 그 아이에게 사죄하고 평생 그 애의 발밑에서 속죄하렴.”
페넬로페가 입술을 꾹 깨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참회인지 원통함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는 페넬로페를 보며 이벨린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두 번 다시는 루시엘이 가진 것을 탐내지 말렴. 우린 참을 만큼 참았단다. 그 애만큼의 자비심도, 인내심도 없거든.”
이벨린이 그 말을 남기고는 슥 돌아갔고, 병사에게 명했다.
“이 아이는 원래 자리로 보내는 게 맞겠구나.”
호의를 보여 주니 주제넘게도 자꾸 기어오르니까 말이지. 이벨린의 말에 페넬로페는 다시 독방에 갇혔다.
지하 감옥을 벗어나면서 이벨린은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루시엘에게 통신을 걸었다.
“그래, 루시엘. 비행은 잘하고 있니?”
* * *
―페넬로페가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지 뭐니.
“할머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혹시 페넬로페를…….”
루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져선 물었다.
―아니, 죽이진 않았단다. 그저 가족끼리 만나게 해 주었는데, 한 명이 빠져 조금 아쉬워서 말이다. 카빌 후작가의 재산이 남아 있지 않다면, 이제 그놈도 더는 쓸모가 없는 거 아닌가 해서.
루시엘은 과거 공작에게 넘겨주었던 카빌 후작가의 불법 사업 계획을 정리한 문서를 떠올렸다.
그 계획들의 대부분은 무산되었다. 카빌 후작은 이제 무언가를 더 꾸밀 여력이 없을 것이다.
와이번 경매에 그나마 남은 집마저 투자했고, 그야말로 쫄딱 망했으니까.
본래는 사일런트 섬에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법 농장을 운영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그건 벨슈타인에서 먼저 매수해서 막았고, 후작이 마지막으로 사들인 땅도 다시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카빌 후작에게 단죄를 내려도 상관은 없었다.
“맞아요, 할머니. 레이놀드와 카일라에 집중하느라고 잊고 있었는데, 그 역시 간교한 자예요.”
―알았단다. 후작 놈의 처리는 잠깐 어른들에게 맡기고 루시엘,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렴.
“그럴게요, 할머니.”
순간 이벨린의 눈빛이 몹시 서늘해져서 루시엘은 그녀 역시 과연 벨슈타인의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느꼈다.
그보다 서서히 동이 터 오면서 천공선의 뱃머리가 아스트리야에 조용히 접근 중이었다.
선장에게 최대한 조용히 접근해 달라고 요청을 해 둔 터였다.
캐서린은 이미 난간에 기대며 망원경으로 아스트리야를 살피고 있었다.
루시엘도 다가가서 이윽고 배 아래 펼쳐진 아스트리야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새하얀 첨탑의 건물들이 우뚝 솟은 아스트리야는 대륙의 날개라는 별칭을 가진 곳답게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작은 마을이 통째로 하늘을 둥둥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였다.
“아가 마님, 저 가장 높은 첨탑이 바로 레트라논 신전이고, 그 외 둥근 지붕을 가진 건물은 교황청인 것 같습니다.”
망원경을 통해 들여다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문까지는 볼 수가 없네요. 그래도 대충 전경은 파악했어요.”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캐서린이 가져온 망원경을 만지작거리면서 아스트리야를 살펴보자, 요하네스가 다가왔다.
“과연 살아 있는 성지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경건해지는군요. 아, 그것 말고 제 망원경을 써 보십시오.”
요하네스가 건넨 망원경은 무척이나 크기가 컸다.
망원경을 통해서 보니 가까이 있는 것처럼, 건물이 자세히 보였다.
“와, 이거 잘 보이는데요?”
“마법 망원경이니까요. 아, 더 확대도 가능합니다.”
“고마워요. 그럼 잠깐 볼게요.”
루시엘은 캐서린에게도 망원경을 건넸다. 그녀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집중해서 관찰했다.
그런 다음 루시엘에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가 마님, 저기 저 문의 문양이 아주 훌륭하네요.”
이동 가능한 ‘문’을 찾았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의 황금 열쇠는 소유자가 실제로 본 적이 있는 문을 떠올리며, 열쇠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망원경을 통해서 레트라논 신전 건물에 딸린 문을 눈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진짜 탐색을 가 볼까. 레이놀드가 있는 곳으로.’
루시엘이 캐서린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걸 읽은 캐서린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가 마님, 조금 출출하지 않으세요? 식당 칸에 가서 배를 좀 채워야겠는걸요.”
루시엘이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하는 척 연기했다.
“흐아암……. 조금요. 하지만 그 전에 저는 한숨 더 자야겠어요.”
“네. 그럼 전 먼저 내려가 준비해 두겠습니다.”
루시엘의 신호에 캐서린이 미소 지으며 먼저 식당으로 내려갔고, 기사들도 출출하다면서 어슬렁대며 따라나섰다. 루시엘은 요하네스에게 걸어갔다.
“대공자님, 덕분에 구경 정말 잘했어요. 여러모로 고마워요. 저는 선실로 내려가서 조금 더 쉴까 해요.”
“이런,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거대한 계곡이 여기서 멀지 않은데. 사실 저는 아스트리야보다 그곳이 더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조금만 쉬었다가 이동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몇 시간 정도 쉬실 겁니까?”
“……으음. 그건…….”
아스트리야에 잠깐 다녀오는 것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만 눈 붙이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멋진 풍경을 놓치지 않도록 한 시간 후에 선실을 노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한 시간 안에는 꼭 돌아와야겠어.’
사실 아스트리야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대비는 해 두었다.
루시엘은 목에 걸고 있던 드래곤 마나 부적 목걸이를 매만졌다.
오래전 그날 레이놀드를 처음 맞닥뜨릴 때처럼, 두려움에 기절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루시엘은 고양이 아흰을 데리고, 캐서린과 함께 식당 칸에 들러 사과를 한 입 아삭 깨물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캐서린은 마법 매거진을 통해 루시엘과 함께 신관복으로 갈아입고, 눈동자 색과 머리 모양을 바꾸어 변장도 마쳤다.
챈들러와 노아도 신관복을 입은 채로 따라나섰다.
캐서린은 식당 칸의 문에 달려 있는 손잡이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문 건너편에는 레트라논 신전의 예배당이 펼쳐져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가자 마침 합창단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