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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41)화 (241/282)

<241화>

해가 금세 떨어졌다. 하늘 저편에서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올랐고, 뒤를 이어 별들도 푸른 하늘에 총총 박혀 빛났다.

유유하게 하늘을 누비는 천공선은 순조롭게 목적지인 아스트리야로 향하는 중이었다.

“도착 예정 시간은 내일 동틀 녘입니다. 도합 열두 시간이 꼬박 넘는 장거리 비행이지요.”

요하네스가 칵테일을 건네며 말했다. 동시에 아름다운 마법 불꽃이 등불처럼 밤하늘을 잔잔하게 수놓았다.

루시엘은 칵테일이 든 유리잔을 쥔 채로,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갑판 위에 걸터앉았다.

“고마워요. 천공선의 하늘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네요.”

“바로 그 점이 제가 하늘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닮은 점이 있군요. 다음에도 진짜로 놀러 오시지요. 이번처럼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말고.”

요하네스가 슥 웃으면서 와인을 목으로 넘기자, 루시엘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라. 어떻게 안 거예요.”

“그 어설픈 연기로는 당연합니다.아스트리야에서는 무얼 살피려는 겁니까.”

요하네스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으나, 루시엘은 비밀이라고만 말해 주었다.

불꽃이 꺼지자 천공선은 다시금 고즈넉해졌다. 고도가 높은 탓에 두꺼운 숄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지만 새털구름 사이를 지나는 기분은 무척 근사했다.

잠깐의 여유가 주는 해방감에 가슴이 탁 트였다.

긴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온 배의 꼬리 쪽을 휴고 선장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엘도 슬쩍 다가가서 함께 바라보았다.

“배에도 구름 꼬리가 생겼네요. 예뻐라.”

“……마정석을 연료로 사용하고 배출된 뜨거운 공기가 차가운 대기와 맞닿아 생긴 겁니다. 배는 물길을 헤치든, 하늘길을 헤치든 항상 꼬리를 남기는군요.”

루시엘의 말에 문득 거칠고 둔탁한 목소리로 선장이 답했다. 루시엘은 새로운 지식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배는 꼬리를 남긴다. 어떤 일이든 흔적은 남기 마련이라는 뜻 같아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루시엘의 해석에 고개를 주억거린 휴고 선장이 말했다.

“평소보다 적은 양의 마정석을 사용하게 되더군요. 확실히 벨슈타인산 마정석은 가격 이상의 가치를 하는 듯합니다.”

“유용하게 사용하신 것 같아 기뻐요.”

“……공국으로 돌아가면, 대공 각하께 벨슈타인과의 마정석 공급 계약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씀드려 놓지요.”

“정말요? 벨슈타인 공작님께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실 거예요.”

“예.”

휴고 선장이 그 말만을 남기고는 쏙 사라졌다.

출발부터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가족들과도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감상하고 싶었다.

‘키제프도 돌아가서 회의에 잘 참석했겠지?’

유리온실을 건축하는 기획안은 공작과 갈리우스 백작의 마음에 들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 있었다.

레이놀드를 무너트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국 유리공예의 아름다움과 사교계를 연결 지을 다목적 공간이 될 것이었다.

공작이야 누구보다 벨슈타인의 부흥을 바라실 테고, 갈리우스 백작은 제자의 연을 맺게 된 막스 하멜이 잘되는 것을 제 일처럼 기뻐했으니까.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루시엘의 통신구가 반짝거렸다.

뜻밖에도 류프델의 연락이었다.

루시엘은 조용히 개인 선실로 돌아가서 연락을 받아 보았다.

벨슈타인은 지긋지긋하다더니, 그가 무슨 일일까?

여전히 통신석에 비친 류프델의 표정은 퉁명스러웠으나, 입가에 은은하게 맺힌 미소를 보니 내심 궁금하던 모양이었다.

“류프델! 안녕히 계셨어요?”

―인석아. 죽었냐. 살았냐! 요즘 왜 도통 연락이 없어?

그의 눈이 세모꼴이 되며, 다짜고짜 루시엘을 혼내키듯 나무랐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만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안식년을 보낸다고 하셔서 조용히 쉬시는 줄 알고요.”

―요 꼬맹이가 지금 누굴 관짝 취급하는 게냐! 좌우지간 네 지팡이 말이다. 요즘은 변화가 없었지?

그러고 보니 류프델의 말대로, 이노센트캐슬에 한 번 다녀온 이후로는 변화가 없었다.

“네, 지팡이 속 공간에 한 번 다녀온 이후로는요.”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썹을 까딱 치켜올린 류프델이 말했다.

―이번에 아주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 네 지팡이를 성장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나면 들르거라.

“꼭 갈게요, 류프델. 고마워요.”

―오냐, 다음에 보자.

그간 멈추어 있었던 지팡이를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루시엘은 내심 마음이 부풀었다.

* * *

‘답답해 죽겠어.’

시녀궁으로 방을 배정받았지만 페넬로페에게 허락된 것은 거의 없었다.

식당과 욕실, 시녀궁에 딸린 정원을 제외하고는 어디도 갈 수 없게 이네스라는 기사가 막아섰던 터였다.

‘뭐야, 루시엘. 카일라를 잡을 수 있게 협조해 달라니 이건 독방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잖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찌푸리던 페넬로페가 기사 이네스와 시녀 리아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살금살금 시녀궁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첫발을 내디딜 때였다.

“다른 곳은 출입금지입니다.”

이네스가 페넬로페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아직 발 디디지도 않았다고요!”

“헛된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방으로 돌아가시죠.”

“누가 나간댔어요? 그냥 바깥 공기 좀 맡아 보려고 한 거였다니까요.”

이네스가 강압적인 눈빛을 보내자, 페넬로페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시녀궁의 입구로 시종 하나가 달려와 고했다.

“큰 마님께서 카빌 영애를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 본성의 응접실로 가시죠.”

“큰 마님?”

“선대 벨슈타인 공작 부인을 큰 마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것 봐요. 역시 노공작 부인께서는 배려가 깊으신걸요? 제 마음도 알아주시고.”

페넬로페는 고개를 높이 든 채 우쭐해졌지만 이네스와 시종은 뜻 모를 미소를 교환했다.

이윽고 시종을 따라 본성의 응접실로 가는 동안 페넬로페는 마치 특별 손님이라도 된 양, 벨슈타인 성의 화려한 내부를 보며 눈이 휙휙 돌아갔다.

‘미친. 황성보다도 더 엄청나잖아. 도대체가 얼마나 부유한 거지?’

응접실에 도착했지만 아직 벨슈타인의 노공작 부인은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안내를 마친 시종은 물러갔고 응접실에 있던 집사장 에바가 페넬로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말했다.

“큰 마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러나 페넬로페는 아까부터 층계를 내려오는 금발의 소년을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벨슈타인 공자!’

볼수록 아까운 미모였다.

태양처럼 환한 금발에 붉게 가라앉은 눈동자.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훈훈한 어깨와 근육이 붙은 몸.

어렸을 때도 잘생긴 줄은 알았지만, 훌쩍 자라고 나니 뚜렷하게 남자 태가 났다.

저렇게 넓은 가슴으로 루시엘을 안아 준다고 생각하니 페넬로페는 미치도록 약이 바짝 올랐다.

에바는 키제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소공작님, 회의 중에 혹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는 몹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키제프가 서늘한 눈으로 페넬로페를 노려보았다.

“안녕하세요, 공자?”

“…….”

일부러 눈을 맞춰 오면서 페넬로페가 뻔뻔하게도 키제프에게 반갑게 말했다. 제정신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사람이 말을 거는데 그렇게 모른 체하기인가요?”

“꺼져. 루시엘을 괴롭힌 자와 나눌 말은 없다.”

대놓고 자신을 무시했음에도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건 저 완벽한 제 취향의 외모 때문이리라.

그러나 키제프가 보내는 살기 탓에 페넬로페는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루시엘에게 이야기 못 들었나요? 우리 이제 손잡기로 했는데요?”

“…….”

어떤 면에서는 대단할 정도로 뻔뻔한 인간이었다. 키제프는 마침 내려오고 있는 이벨린을 보자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븐의 능력을 통해서 키제프는 루시엘의 과거가 어땠는지 알고 있었다. 전생의 페넬로페가 루시엘을 괴롭히기 위해 저질렀던 악행들도.

보석을 얻어 내기 위해 루시엘을 이용하고 괴롭혔던 나날들.

그리고 그걸 어젯밤 이벨린 할머니께 넌지시 알려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페넬로페를 직접 한번 보겠다고 하신 모양이었다.

착한 루시엘은 제대로 복수하지 못할 거라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헛된 망상에 젖어 벨슈타인의 화려함에 빠져 있는 페넬로페의 허영심 어린 모습을 보자니 자못 웃음만이 나왔다.

‘사악하고 멍청하긴.’

이내 우아하게 차려입은 이벨린이 나타나서 키제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키제프, 바쁜 일이 많지 않니. 너는 그만 가 보렴.”

“예, 할머니.”

“안녕하세요, 벨슈타인 노공작 부인!”

페넬로페가 살갑게 웃으면서 스커트 자락을 사뿐 쥐면서 인사를 했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도 이벨린은 웃어넘기며 푸른 눈을 빛냈다.

“네가 바로 페넬로페구나. 벨슈타인 성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내 한번은 너를 꼭 볼까 해서.”

“어머, 저도 꼭 뵙고 싶었어요. 벨슈타인 성이 너무도 마음에 들거든요.”

“그렇니? 오늘은 내가 제대로 구경을 시켜 주어야겠구나. 우리 손주 며늘아가와는 연이 아주 깊다고 들었으니.”

“그럼요. 루시엘과 저는 보통 인연이 아니에요.”

“그래? 어디 한번 자세히 듣고 싶구나.”

이벨린이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었고, 시녀 두 명이 나타나더니 페넬로페를 데리고 갔다.

기사 이네스와 키제프는 신이 난 페넬로페를 뒤에서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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