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천공선의 주 연료가 마정석인데 반가운 선물입니다. 벨슈타인 공작 각하께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 주십시오.”
요하네스가 반색하면서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푸른색의 투명한 마정석을 하나 꺼내 보았다. 광택이며 뿜어내는 빛과 머금고 있는 마력 역시 천공선의 주 연료로 쓰는 중급이나 하급 마정석에 비해서 훨씬 뛰어났다.
벨슈타인산 마정석은 특히나,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었다.
“물론이에요. 천공선에는 마정석이 많이 필요할 듯하네요. 부디 잘 사용해 주세요.”
루시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공작은 루트비히 공국과 마정석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오래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루시엘은 이번 기회에 마침 천공선을 방문하니 마정석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만한 규모의 천공선이 움직이려면 어마어마한 대량의 연료가 필요할 거야. 기존 마정석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무게도 가볍고, 머금고 있는 마력 수치도 높은 벨슈타인산의 마정석을 직접 사용해 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루시엘이 그런 속내를 감추고 있는 동안, 요하네스는 키가 큰 남자를 불러 마정석 관련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요하네스가 선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남색의 짧은 머리와 갈색 피부가 다소 무서운 인상이었다.
짤막한 목례로 그가 인사했고, 루시엘과 다른 일행들도 인사를 나누었다.
“오 분 내로 출항할 겁니다. 그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서 구경하시면 좋겠습니다. 리카, 공자비님과 일행들에게 선실을 안내해드리도록.”
요하네스가 명령하자, 리카라는 청년 선원이 아래층의 선실로 안내를 해 주었다. 선실은 넓지는 않았지만 제법 아늑한 방과 욕실도 꾸며져 있었다.
루시엘과 캐서린의 방은 바로 붙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기사들의 객실이 있어서 그들과 나눠졌다.
“냐옹!”
자기 선실은 없어서 아쉬운 모양인지 아흰이 한번 울더니, 노아를 따라서 도도도 가 버렸다.
캐서린도 선실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가방을 놓고 루시엘의 외투를 걸어 놓았다.
“이렇게 잘 꾸며진 배는 처음 봅니다. 지내는 데 큰 문제는 없겠어요, 아가 마님.”
캐서린의 말에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배를 처음 타 보아서 비교는 못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네요.”
“진짜 배보다 천공선 쪽이 더 멋진걸요. 그나저나 아가 마님, 아스트리야 쪽을 살피려면, 꽤나 가까이 접근해야 할 거예요.”
캐서린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일단 말은 해 보겠지만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면 황금 열쇠를 이용해서, 이동이 가능할 텐데 말이죠.”
“……정말요? 그럼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과연 테일러의 황금 열쇠는 대단했다. 하지만 문이 보일 만큼 가까이 접근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루시엘이 고민하는 사이 출항을 알리는 피리 소리가 들렸다.
뚜우-!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가 보니, 요하네스와 기사들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해 질 녘이라 어디를 보든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고,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루시엘은 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난간을 붙잡고 구경했다.
배의 앞머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높이에 아찔했다.
노아가 뒤따라오면서 주의를 주었다.
“아가 마님, 조심하세요. 조심.”
“노아도 나를 너무 과보호하는걸.”
“그도 그럴 게, 아가 마님의 안전이 저희들 목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챈들러가 뒤에서 슥 나타나 말했다.
공작이 단단히 주의를 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루시엘은 웃음 지었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요하네스가 걸어오면서 물었다,
“공자비. 휴고 선장이 항로를 정하기 전에 알려 달라고 묻더군요.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 말입니다.”
루시엘이 슥 뒤에 서 있던 캐서린과 눈을 맞추었다.
“있어요. 신성지구 아스트리야를 전부터 보고 싶었어요. 천공선은 그보다 더 높이 난다고 하니까 내부도 볼 수 있겠죠? 너무 멋질 것 같아요.”
“아스트리야는 높이 떠 있으니 좀처럼 신비롭고 베일에 싸인 곳이죠.”
캐서린도 우아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근처까지 가 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대공자 전하?”
루시엘은 정말 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다소 과장하며 양손을 붙잡고 눈을 초롱였다.
볼 가득히 홍조를 띄우면서 설레하는 루시엘의 모습을 보니,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거야 물론입니다. 게다가 아스트리야라면 최근 이쪽으로 이동 중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아스트리야를 향해 항로를 맞추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선장님께도 감사 인사 부탁드려요.”
그러자 루시엘의 기쁜 목소리를 들었는지 휴고 선장도 모자를 들어 보였다. 말수가 적은 그만의 인사인 모양이었다.
“전속력으로 아스트리야에 접근하도록 할까. 좋아, 모두 돛을 펼쳐라!”
요하네스는 망토를 일부러 늘어뜨리면서 외쳤다.
촤르륵.
돛대 세 개에 달린 돛들이 일제히 펼쳐지면서 거대한 천공선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웅장한 풍경을 올려다보면서 모두가 감탄을 자아낼 무렵, 루시엘은 속으로 되뇌었다.
‘레이놀드, 이제 다음은 네 차례야.’
* * *
루시엘이 천공선에 다녀오는 동안, 벨슈타인의 모두가 바삐 움직였다.
공작과 자르가는 검은 날개 기사들과 정찰조를 풀어서 여전히 카일라를 추적 중이었다.
루이비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일라를 최종 공격했던 당시를 생각했다.
카일라의 몸은 무너져 엉망이 되었고, 도망치기 전까지 제단에서 기운을 많이 소진했다.
‘……제아무리 카일라라도 이동포탈 가호석도 없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다 박사에게서 빼낸 정보에 의하면, 그가 카일라에게 만들어 준 가짜 몸은 인간의 피를 마시면 약간의 회복과 재생을 한다고 하였다.
게다가 와인 재배지에서 나왔다던 수많은 시체들 중에도 희생자가 있는 듯했다.
그동안 카일라를 도왔던 크루거 백작이나 박사까지 없으니, 혼자서 인간의 피를 노리면서 다닐 것이다.
그때 정찰조 한 명이 공작에게 와서 보고했다.
“각하, 벨슈타인에서 리카르도 영지로 가는 접경 지역의 숲속에서 기이한 시체가 연신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기이한 시체?”
“예, 온몸의 피가 전부 빨렸고 신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흔적이 있었습니다. 짐승이나 마물에게 희생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손톱이라. 카일라가 희생자를 공격하는 방식 역시 그 길고 검은 손톱이었다.
“수하를 잃더니 뒤처리가 안일해졌군. 리카르도 쪽으로 인원을 더 배치해서 다른 지역에서도 시체가 발생하는지 계속 추적해라.”
“예, 각하.”
비뚜름하게 입매를 틀며 웃던 공작은 공작성으로 이동포탈을 이용해 귀환했다. 황자궁 개조 사업의 제안 건으로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실에 다다르니, 엘링턴과 갈리우스가 이미 만나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각하. 갈리우스 백작님이 벌써 건축 설계 기획안을 가져오셨습니다.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엘링턴이 건넨 기획안을 살펴보던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냥터로 쓰던 황자궁의 빈터를 다른 공간으로 활용해 본 기획안이었다.
“진행이 빨라서 좋군. 과연 백작이야.”
“……일이 있을 때마다 불러 주시니 고맙습니다. 엘링턴 보좌관 말로는 실현 가능성만 있다면 전부 좋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성의 건축물이 될 테니 여러모로 고민해 보았지요.”
그 결과물이 황성의 예술품을 전시해 놓을 수 있는 미술관과 정원이었다.
어차피 기획안이야 그럴듯하게만 보이면 되긴 하지만, 정성 들여 생각해 온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특히 헨드릭 황실의 상징인 월계수 나무를 모티브로 잡아, 황제나 대신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월계수가 돋보여서 좋군. 황가에는 이걸로 제안해 보지.”
“예, 그런데 루시엘 공자비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갈리우스 백작의 말에 공작이 의외라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만큼 루시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며, 다른 보좌관이 들어와 고했다.
“소공작님께도 회의에 참석하시겠다고 요청하셔서 여쭙겠습니다.”
갈리우스 백작의 의향을 물은 공작이 말했다.
“들어오라고 전해.”
키제프가 코트를 걸치고는 들어와서 공손히 인사했다.
“회의에 참석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엘 공자비와 나눈 의견에 제 상상을 보태서 그림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건축 쪽은 잘 모르지만, 검토 부탁드립니다.”
키제프는 둘둘 말려져 있던 스케치를 갈리우스 백작에게 건넸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갈리우스 백작이 벨슈타인과 진행했던 건축물의 설계도를 참고할 겸 검토해 두었다.
그러자 갈리우스 백작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흠, 하고 키제프를 다시 보았다.
“유리온실이라…….”
거대한 돔 형태의 유리온실은 이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내부에는 정원과 분수, 수로 등을 꾸며, 작게는 티타임 크게는 연회나 댄스홀 등의 다용도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기획안이었다.
“여기에는 창문을 대신해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해서 유리공예의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면 좋을 듯합니다.”
“호, 이렇게 하면 이브나크의 유리공예까지 같이 끌고 들어갈 수 있겠군.”
공작의 말에 갈리우스 백작도 반색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유리를 강조한 디자인이라 조형학적으로도 아름답고 활용도도 높겠습니다. 제법 쓸 만한 걸 가져오셨소, 소공작.”
“루시엘이 의견을 준 덕분입니다.”
“의견도 훌륭하지만 그림으로 소화해 낸 솜씨가 퍽 훌륭하군. 이걸 가져가서 본격적으로 내가 설계도로 만들어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공작 각하께선 어떠십니까?”
갈리우스는 영감이라도 받은 양, 신이 나서 떠들었다. 천재라 칭송받는 예술가에게 칭찬받으니 키제프도 내심 기뻤다.
“이거 백작의 예전 성미가 다 죽은 모양이지. 그래, 허락하겠소. 결과물만 좋다면야. 그리고, 이 사업은 소공작이 주도하는 걸로 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레이놀드를 무너뜨리는 데 더해서 벨슈타인의 유리공예까지 더욱 번창하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며 키제프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분명 루시엘도 기뻐하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