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마침내 오늘이 천공선에 오르기로 한 날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천공선에 오를 시간을 정했다.
요하네스가 말하길 천공선이 활로를 정하면, 마법 선착장이 미리 펼쳐진 후에 천공선이 지면에 정박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마법 선착장의 위치는 공작성과 제법 멀었기에 천공선의 선원들이 하루 전부터 이동식 마법 선착장을 펼칠 수 있는 봉인석을 설치해 주었다.
마법 선착장은 공작성에서도 제법 높이 솟은 언덕으로 정했다.
마법 선착장의 안정성을 위해서 가급적이면, 순간이동 대신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해 달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키제프가 선뜻 마구간으로 와서 같이 탈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태워 줄게. 언덕은 울퉁불퉁해서 마차로 올라가는 것보다 말이 빠를 거야.”
“그럼 나 프린세스를 타고 달리고 싶은데.”
항상 마구간 주변만 돌아서 한 번쯤은 제대로 달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키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루시엘, 아직은 안 돼. 승마 실력이 늘기 전에는 혼자 타면 위험해.”
“……으, 그치만 지난번에는 제법 잘 탔어. 그렇지, 노아?”
루시엘이 노아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그도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소공작님 말씀대로 아가 마님의 승마 실력이 나아지면 타시는 게 안전합니다.”
“……알겠어. 프린세스, 다음에 언니랑 달리자.”
루시엘은 푸르르, 갈기 털을 털고 있는 프린세스를 쓰다듬어 주고는 키제프가 고른 말로 다가갔다.
탄탄한 몸을 가진 늠름한 백마였다. 루시엘의 프린세스보다 훨씬 덩치도 키도 컸다.
“이 녀석으로 타자.”
“응, 엄청 잘 달리게 생겼다.”
민첩하게 백마의 안장 위로 올라간 키제프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말이 너무 키가 커서. 어떻게 올라가지?”
키가 작은 루시엘에게는 곤란한 높이였다. 노아가 얼른 디딤돌로 쓸 만한 걸 갖다주려는데 키제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루시엘의 팔을 훌쩍 잡아당겨, 가볍게 안아서 제 앞에 태웠다. 루시엘이 눈을 깜빡이던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와…….’
이렇게 빠르게 자신을 잡아끌어 올리다니. 단단하고 억센 팔 힘에 루시엘은 깜짝 놀라 눈이 댕그래졌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은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뭘 그렇게 놀라.”
“아무것도 아냐.”
등 뒤로 조금만 기대도 탄탄하고 너른 가슴과 복근이 닿았다. 루시엘이 다시 얼른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런 루시엘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키제프가 가볍게 입매를 올렸다.
“너무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편하게 있어.”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그럴 수 없었다.
부끄럽고, 모두가 쳐다보는 듯한 기분에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다행히 드래곤 마나 목걸이를 착용해서 보석은 만들지 않을 테지만.
키제프의 긴 팔이 루시엘의 몸을 지나 고삐를 붙들자, 영락없이 품에 갇힌 것만 같아서 그녀는 어쩐지 아까보다 더 두근거렸다.
‘마음이 간지러워.’
다른 기사들이나 노아가 말을 태워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
“우리 먼저 출발할 테니, 마법 선착장에서 합류하지. 천천히 오도록 해.”
“노아, 다른 사람들 잘 데리고 와 줘.”
“예, 가서 뵙겠습니다.”
“……이랴, 하!”
키제프가 고삐를 돌린 다음 말의 정강이를 가볍게 차면서 말을 출발시켰다.
등 뒤에서 키제프의 가쁜 호흡과 함께 쿵쿵 뛰는 그의 심장 박동도 들려왔다.
다각, 다각.
두 사람을 태운 말은 금세 마구간에서 기사단을 지나, 공작성의 내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내달렸다.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 짓기도 했다.
“그림 같은 한 쌍이세요.”
“로맨틱하셔라.”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왔다. 둘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것 같았다. 어느새 주변에 풀밭밖에 안 보였다.
루시엘은 뒤를 돌아서 보려고 했지만, 저보다 체구나 한참이나 큰 키제프의 가슴에 시야가 가로막혔다.
고삐를 쥐고 있던 키제프의 핏빛 눈이 살짝 굴렀다.
“뒤가 보고 싶어?”
“아, 응. 다른 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나 해서.”
순진한 얼굴로 루시엘이 말하자, 키제프는 잠깐 심술궂은 표정이 되었다.
키제프의 붉은 입술이 루시엘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나랑 있을 때는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
“……응? 그치만.”
둥근 진홍빛 눈동자가 살짝 깜빡였다.
“약속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지? 잠깐 쉬었다가 가자.”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바쁜 건 알지만 내게도 시간 좀 줘. 줄 것도 있어.”
키제프가 잠시 말의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기며, 워워 하고 말을 세웠다.
키가 큰 키제프에게는 아주 가벼운 높이인 모양인지 먼저 훌쩍 뛰어내려서 말 고삐를 잠시 묶어 두었다.
곧 그가 팔을 벌려, 루시엘을 안아서 내려 주었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태워 주겠다고 한 건데…….”
“……조금 눈치채긴 했지만 너무 노골적이다.”
“그래? 제법 눈치가 자랐군. 기특하네. 부인.”
퍽 나른해진 눈빛이 쏟아지며, 긴 눈꼬리도 휘어졌다. 금발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싶더니, 키제프가 다가와 루시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키제프가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라도 잠깐 같이 있으니까 좋다.”
“나도 좋아.”
키제프의 붉은 눈동자가 루시엘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살짝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금빛 눈썹을 까딱 치켜올린 그가 낮게 물었다.
“근데 루시엘, 왜 아무런 보석도 만들어 내지 않……. 아.”
키제프의 유려한 손가락이 루시엘의 목에 걸려 있던 줄에 닿았다. 그제야 루시엘이 보석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 이유를 알고 안도한 그가 싱그레 웃었다.
“……아, 혹시 몰라서 목걸이 하고 있었어.”
“그랬군. 다행이다.”
잠시였지만 키제프는 그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루시엘이 자신을 두고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더 나중에 그녀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키제프. 근데 나에게 줄 것이 뭐야?”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키제프가 말했다.
“오래전부터 가져온 선물이 있어. 손목 잠깐 줘 볼래?”
“여기.”
루시엘이 기대에 찬 눈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키제프가 아공간 포켓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영롱한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오팔이 박힌 한 쌍의 팔찌가 들어 있었다.
“너무 예쁘다. 고마워, 키제프. 네가 직접 채워 줘.”
밝게 사르르 웃는 루시엘을 보자, 키제프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팔찌를 채워 주려다가 마음을 고쳤다.
망설이던 키제프가 입을 열었다.
“루시엘, 이 팔찌는 서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사람만이 낄 수 있어.”
“……전설인가?”
“고대의 언령 마법이야. 두 사람을 서로 영원히 각인해 두는 거야.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이건.”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할 준비가 되었거든. 너 역시 그런 건지 알고 싶어.”
키제프의 집착 어린 붉은 눈이 일렁였다. 어딘가 위험한 듯한 눈빛에, 루시엘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그에게 물었다.
‘키제프, 그동안 집착이 강하단 생각은 했는데 어쩌면 질투 때문에 괴로웠을까? 그렇지만 나도 너뿐인데. 그걸 왜 모를까?’
루시엘은 자신에게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슬쩍 장난기가 생겼다.
“키제프, 솔직히 말해 줘. 혹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이런 팔찌로 날 묶어 두려고?”
루시엘이 혹시나 실망했을까 봐 키제프가 다급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그건 아니야.”
“바보구나. 나는 키제프야말로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엘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실망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널 믿지 못하는 건 아니고, 겁이 났어. 네 주변에는 자꾸 너를 원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널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 미안해.”
키제프가 한층 깊어진 눈으로 루시엘을 보며 말했다. 루시엘이 상자 안에서 오팔 팔찌 하나를 가져갔다.
“……이건 내 선물이니까 일단은 가져갈게. 착용은 나중에 고민해 보아야겠지만.”
그러자 잠시 풀이 죽어 있던 키제프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고마워. 받아 줘서.”
“응, 그리고 키제프. 너는 어떤 남자보다도 더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이야. 나를 믿어 줘.”
루시엘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진심을 오롯이 느끼며, 키제프가 루시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았어. 잘 다녀와.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으니까.”
“응. 레이놀드는 우리 손으로 끝내자.”
바람결이 둘을 감싸 안았지만, 그 약속만은 마음 깊이 남겨졌다.
약속 장소로 도착하니 벌써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서서히 노을이 물들어갔다.
키제프와 작별 인사를 나눈 루시엘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천공선에 같이 오르기로 한 노아와 챈들러, 캐서린, 고양이로 변신한 아흰과도 곧 만났다.
‘어쩐지 두근거려.’
마법 선착장을 둘러보면서 루시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천공선의 닻을 내리는 곳과 사람들이 배에 오르내리고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얼마 후 멀리서 커다랗고 멋진 배가 둥실 하늘을 비행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보고 있는데도 동화책을 보는 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대하고 하얀 돛과 돛대, 나무로 이루어진 선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웅장했다.
성의 첨탑 지붕보다도 더 규모가 큰 것 같았다.
이내 천공선이 닻을 내려 정박했고,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배 위에서 하얀색 사다리 같은 것이 내려왔고, 선원들의 안내에 따라 루시엘과 일행들은 배 위로 올라탔다.
“루트비히 공국의 천공선에 잘 오셨습니다. 루시엘 공자비.”
요하네스가 하얀 제복을 입고는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배의 갑판 위로는 푸른 융단이 깔려 있고, 마치 연회를 벌이려는 것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와아.”
“이쪽으로 오시죠.”
루시엘은 고양이를 안은 채 푸른 융단을 밟고서 뒤따랐다. 그 뒤로는 캐서린과 호위 기사인 노아와 챈들러가 함께했다.
“초청해 주어서 감사드려요. 벨슈타인 공작님께서 협조해 준 대가로 최상급의 마정석을 주셨어요.”
루시엘의 말에 노아와 챈들러가 가져온 마정석 상자를 요하네스 앞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