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페넬로페가 넘어오다니,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영악한 페넬로페를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자신의 뒤통수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곁에 두기로 한 이유는 카일라의 마음을 처음으로 움직인 대상이 저 애였기 때문이었다.
종국에는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서였지만, 아마도 다른 대체할 제물이 있었다면 페넬로페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페넬로페에게 흑주술을 직접 가르쳤겠지.’
악마 같은 카일라의 맹목적인 애정의 대상은 레이놀드겠지만, 그중의 아주 약간은 페넬로페가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페넬로페가 보챘다.
“우리 손 잡은 거라며. 내 방은 어디야? 안내부터 해 줘. 루시엘, 씻고 옷도 갈아입고 싶어. 너처럼.”
페넬로페가 루시엘의 드레스며, 장신구를 힐끗거렸다. 저렇게 대놓고 탐을 내다니, 안 보이는 곳이라면 훔쳐 가고도 남을 듯했다.
물론 루시엘은 소지품에 전부 도난을 방지하는 마법을 걸어 두었다.
“글쎄 그건 내 권한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면서 루시엘이 페넬로페의 방에서 나왔다. 공작은 살벌하게 말했다.
“더 깊은 지하 감옥에 가 보면 여기가 얼마나 살 만한 곳인지 알 수 있을 텐데…….”
공작의 차가운 말에 페넬로페는 대신 루시엘을 보며 말했다.
“날 계속 독방에 둘 거야? 난 여기 싫어……!”
루시엘은 사정을 봐주는 척 공작에게 말했다.
“아빠, 페넬로페를 그래도 계속 독방에 둘 수는 없으니, 조금은 더 나은 방을 주는 게 좋겠어요.”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사용인들의 방이 하나 비었다더군.”
그러나 페넬로페의 얼굴이 만족하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저는 귀족인데 사용인들의 방이라뇨?”
“……아래층 감옥으로 보내 줄까.”
그 말에 페넬로페는 얌전히 사용인들의 건물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훌륭한 방에 감탄하면서도 손님 방을 내어주지 않은 것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모든 건 리아와 이네스가 잘 알려 줄 거야.”
그리고 시녀 리아와 기사 이네스를 붙여 주었다. 감시를 위해서였지만 선 넘는 행동을 한다면 말해 달라고 일러두었다.
그러자 페넬로페는 입이 벌어졌다.
“내게 호위 기사까지 붙여 주다니 감동인걸.”
“명심해. 넌 여기에 손님으로 온 게 아니야. 개인행동은 할 수 없단 거 알아둬.”
“알겠어. 얌전히 지낼게.”
‘정말 얌전하게 지내는 게 좋을 거야, 페넬로페. 벨슈타인의 모두가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수틀리면 목이 꺾여도 나는 도와줄 수 없어…….’
사용인 건물을 나와서 본성의 식당에 다다르자, 가족들은 정말 다들 벼르고 있는 얼굴로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카빌가의 여식과 손을 잡아야 할까.”
루이비드가 속이 뒤틀리는 듯 말했고, 키제프도 형형한 눈을 빛내며 식기용 나이프를 꾹 쥔 채 말했다.
“저도 동감입니다. 루시엘, 말만 해.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
“무슨 준비?”
루시엘의 그 물음에는 키제프와 공작을 비롯해 길리아트 할아버지와 솔리아페, 이벨린 할머니까지 모조리 같은 답을 했다.
“……그야 복수지.”
“그러고 보니, 지하 감옥에 짐승이 두 마리 더 있지 않으냐.”
길리아트의 말에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이 모두, 지하 감옥으로 향한 건 루시엘이 모르는 일이었다.
오르비아 백작과 막시무스의 괴로워하는 신음만이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 * *
오늘따라 가족들이 조금 이상하게 굴었다. 평소에는 저녁을 함께 먹은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와 디저트까지 함께 나누고 싶어 하거나 체스, 낱말 퍼즐 게임 따위를 하곤 했는데…….
‘루시엘, 오늘 좀 피곤하지 않아? 일찍 자는 게 좋아 보이는데.’
‘에바가 새로운 차를 들였다는구나. 가서 베시에게 우려 달라고 하렴.’
‘루시엘, 그 악독한 것을 상대하느라 고생했다. 잘 자라.’
오늘은 뭔가 루시엘을 빨리 별궁으로 보내 버리려는 듯, 다들 하나같이 말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아니면 안색이 나빠 보였을까?’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이었지만 왠지 아이처럼 서운해졌다. 마침 본성의 다른 식당에서 나오는 아흰과 마주쳤다.
“루시엘, 정말 사랑받고 있으시군요.”
“네, 과분할 정도로요.”
“저 엄청 견제당하고 있다니까요.”
“응, 무슨 일 있었어요?”
아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이것 좀 보세요.”
아흰이 종이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이상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단둘이 1시간 이상 대화 금지.
단둘이 식사 금지.
무릎 위에 올라가기 금지.
선물 함부로 금지.
댄스 신청 금지.
안기기 금지.
꼬리 살랑 금지.
……(중략).」
종이에 마지막 하단에는 가족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윽, 이 숨 막히는 규칙들은 뭐예요?”
“루시엘의 고양이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데요. ……제가 이대로 루시엘의 고양이가 되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그냥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아흰, 미안해요. 이건 그냥 찢어 버리죠. 제가 가족들에게 잘 이야기해 둘 테니까요.”
하지만 루시엘이 서류를 찢으려 하자 아흰이 허무하게 푸른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거 사본이고, 마법 서류에 고양이 발바닥 찍었어요.”
“……그랬구나.”
“괜찮습니다. 어떻게 요리조리 피해서 잘 해 보도록 하죠.”
아흰이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안해요. 부탁을 한 건 나인데.”
왠지 영혼이 털린 얼굴로 돌아온 루시엘을 베시가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아가 마님, 오늘따라 유독 지쳐 보이시는걸요.”
“응, 여러모로 일이 많았어.”
“달콤한 것이 당기는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맞아.”
루시엘이 가볍게 어깨를 풀며 고개를 주억였다.
“세스 주방장이 새로운 디저트를 만들었대요. 준비하라고 할까요?”
“좋아.”
페넬로페를 자극하기 위해 차려입었던 화려한 드레스를 벗고, 루시엘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테이블에 앉았다.
부드럽고 얇은 밀빵 위에 생크림과 딸기가 겹겹이 놓여서 삼각 꼴로 접힌 것이었다.
“처음 보는 거야. 그치만 딸기랑 생크림이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겠다.”
“크레페라고 한대요. 맛있게 드세요.”
“응, 고마워. 베시도 먹고 가.”
밤에는 단 음식을 안 먹는다며 사양한 베시는 루시엘의 잠자리를 살펴 주고는 얼른 별궁을 나섰다.
루시엘은 입을 크게 벌려서 가득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달달하게 혀를 녹였다.
하루 중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또롱, 또롱.
즐거움에 페리도트가 허공에 두 개나 맺혀졌다.
크레페 하나를 해치운 다음, 황도에 머무르고 있는 요한 대공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용건은 짧았다.
「안녕하세요. 요하네스 대공자 전하.
루트비히 공국의 자랑인 천공선에 초청하신 일 기억하시지요?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일정을 잡아 주시면 좋겠어요.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 루시엘 폰 벨슈타인」
서신을 마무리한 루시엘은 기다리는 며칠 동안 황궁에 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답신이 돌아왔다. 생각보다도 더 답이 빨리 와서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천공선이 직접 공작령 근처로 마중을 오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천공선을 방문해 아스트리야를 살피고 옛 황자궁 터의 개조 사업을 진행하는 것.
일의 순서는 상관없을 것 같았다.
둘 다 레이놀드를 견제하기 위한 일들이었으니까.
다만, 카일라가 연락을 취했다면 레이놀드가 그 일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커어, 흑, 큿……!”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해 내면서 카일라가 까드득 제 손톱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벨슈타인 놈들의 검에 그대로 끝이 날 뻔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은 무너지고, 망가져 있었다.
그 당시 남아 있는 기운이 별로 없었기에 카일라의 이동 주술은 그녀를 멀리 이동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벨슈타인에서 리카르도 영지로 가는 접경 지역에 버려진 작은 폐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가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제 수족이 되어 주었던 프리다 박사와 크루거 백작까지 잃어버렸다.
벨슈타인에 붙잡혀 있거나,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신처럼 들러붙어 저를 방해하던 벨슈타인.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처형을 마쳐 블루 익스큐션도 무사히 얻어 냈다.
“그래…… 이것만 있으면 돼. 나의 보물, 나의 하나뿐인 황자를 위한 검. 그렇지, 페넬로페?”
정신이 희미해진 탓인지 카일라는 습관처럼 페넬로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처형장에서 죽었다. 카일라는 큿, 하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나를 꼭 닮은 아이…… 였는데.”
막상 그 애가 죽고 나니, 이상한 허전함이 가슴을 채웠다.
수많은 붉은 머리 계집애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도구로서 곁에 두었던 제물.
그럼에도 페넬로페가 자꾸 생각났다. 소리치던 그 애의 목소리도.
‘살려 주세요, 어머니. 무서워요!’
그러나 카일라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나약해진 때문이겠지.
그녀는 흉흉한 갈색 눈을 번뜩이며, 좁다란 문밖을 살피며 몸을 겨우 일으켰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했다.
이윽고 폐가에서 뛰쳐나간 카일라가 나그네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커헉! 으아아악!”
그리곤 그대로 덮쳐, 그의 피를 마셨다. 잔뜩 피를 마신 카일라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