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루시엘이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흰을 불러 데리고 왔다.
이동포탈 가호석을 건네받고, 이리저리 살펴본 아흰의 낯이 밝아졌다.
“예, 우리 카르한의 가보인 이동포탈 가호석이 맞습니다.”
“잘됐어요, 공자.”
아흰이 모두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영영 잃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요.”
하지만 주인에게 돌려주고서도 루시엘과 가족들은 아흰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가보를 되찾았는데 바로 달라고 하기엔 미안했다.
결국 길리아트가 먼저 슬쩍 물꼬를 텄다.
“……은혜를 갚을 방법은 하나란다, 공자.”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흰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흰 공자. 우리는 친구지요?”
“물론입니다. 루시엘.”
루시엘과 아흰의 대화를 듣고 있던 키제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둘이 친구가 된 건데.”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봐 달라는 듯, 눈빛을 보내고 나서 아흰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방금 막 찾은 소중한 가보인 건 알지만, 그 가호석을 한 번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
아흰이 푸른 눈을 휘면서 흔쾌히 답했다.
“가보를 되찾아 주셨는데 당연히 빌려드리겠습니다. 대신에 무엇에 쓰실 건지 그 용도를 알고 싶은데요…….”
“어, 음.”
그 질문에는 루시엘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른들의 의향을 살폈다.
레이놀드 황자의 반역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말하기에는 아흰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는 사정이 있던 터였다.
대답을 고르던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공자의 가호석이 제국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어떠신가요?”
“……그런 이유라면 저희 카르한 가문 역시 영광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돌려주시기로 꼭 약속해 주세요.”
눈을 빛내던 아흰이 대답했다. 루시엘이 말했다.
“허락해 주어서 고마워요. 공자. 벨슈타인의 명예를 걸고 가호석은 반드시 돌려드릴게요.”
그 약조를 들은 아흰이 그제야 안심하고 가호석을 루시엘에게 건네주었다.
“저도 제국의 평화를 지키는 일에 일조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도울 일은 더 없을까요?”
아흰의 진심 어린 눈빛에 루시엘은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럼 저의 고양이가 되어 주실래요?”
그 말에 아흰이 삼각형의 두 귀가 쫑긋 튀어나와 버렸다.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한 터였다.
“루시엘 양의 고양이라니, 좋습니다만 부군의 허락도 받아 주세요. 죽기 싫어요.”
아흰이 키제프의 눈치를 슥 살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이 싱그레 웃었다.
“고양이가 되면 몰래 관찰하고 정보원을 하기 쉬우니까.”
“……아아, 맞아요. 광장에 풀어 놔도 요리조리 잘 다닐 수 있습니다.”
아흰이 그렇게 덧붙이며 자신의 쓸모를 어필하자, 키제프가 아흰에게 다가와 내려다보면서 경고했다.
“허락하지. 헛된 망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에. 그, 그럼요.”
“키제프, 너무 그러지 마. 아흰은 우릴 도와주려는 사람인걸.”
“그래서 참는 거야. 아흰이든, 아르제온이든, 노아든.”
루시엘은 속으로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다음을 위한 대비책들을 의논했다. 각자의 할 일들을 정리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정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동이 터 왔다.
* * *
순식간에 이틀이 지나 버렸다.
차후의 계획을 도모하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재정비하기에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들 한숨 돌린 느낌이었다.
그중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건 벨슈타인의 심문실과 검은 날개였다.
크루거 백작이 토설한 내용을 바탕으로 일꾼들의 출처가 황실 감옥과 부랑자들임이 밝혀졌다.
시칠렌 영지로 시찰을 나가 백작에게서 뽑아낸 정보를 토대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간 황성으로 반입했던 와인들과 여러 가지 독도 발견했고, 다른 일꾼들도 확보했다.
안타깝지만 이미 명을 달리한 일꾼들의 시체 몇 구가 와인 재배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캐낼수록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의 규모가 너무나도 커. 미안해요. 당신들을 구해 주지 못해서…….’
루시엘은 잠시 그곳에 방문해 고인들이 마지막 길을 편히 가게 해 달라고 스피넬에 기도했다.
“단장님,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기사단장 자르가에게 부탁하자 그가 고개를 주억이면서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이미 그렇게 명 내리셨습니다. 아가 마님.”
“네,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들의 죽음은 아가 마님도,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루시엘의 말에 자르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따라온 키제프 역시 그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루시엘, 그만 성으로 돌아가자.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생각해야 하잖아.”
키제프의 말이 맞았다.
한 번의 회귀로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이동 게이트를 타고 영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루시엘이 말했다.
“나는 아기 영지에 들를게. 에리카 언니와 만나기로 했어.”
“그래, 나도 다시 정무로 복귀해야 하니까. 나중에 봐. 루시엘.”
벨슈타인의 마차는 얼마 후,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 도착했다. 둘은 가볍게 볼을 비비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영지에 도착한 루시엘은 과수원 사이를 거닐면서 생각에 잠겼다. 싱그러운 오월의 과수원은 단내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에리카 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따야지.”
별장에 들어가 바구니를 가져와서 블루베리와 산딸기를 가득히 따고 몇 알은 제 입안으로 넣었다.
갓 따 낸 신선하고 달콤한 과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사이 영지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루시엘, 미안해. 제르다 씨랑 같이 왔어.”
에리카와 제르다가 함께였다. 제르다의 낯은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루시엘 님,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형의 일로 걱정이 되어서 그만. 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그는 지금 벨슈타인 공작성의 지하 감옥에 구금되어 있어요.”
심문은 끝났지만 끝내 입을 열지도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빼낸 후, 지하 감옥의 독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제르다가 충격을 받을 것 같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찾아왔으니 그에게도 알리는 것이 맞았다.
“그의 면회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작님께 여쭈어보고, 허락을 구해 볼게요. 제르다 씨에게는 소중한 형이겠지만…… 그의 죄는 여실히 드러났어요.”
루시엘은 씁쓸함에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그러자 제르다가 무언가 생각한 것이 있는지 자신의 뜻을 전했다.
“……형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그저, 그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어서 온 겁니다.”
제르다의 말에 루시엘은 마도사들이 프리다 박사의 머릿속에서 빼낸 기억을 마법으로 기록한 영상석들을 떠올렸다.
“아, 그렇다면 그의 죄가 담긴 영상석을 잠시 볼 수 있게 빌려와 볼게요. 전대 공작이신 길리아트 할아버지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시거든요.”
길리아트와 공작, 검은 날개의 마법 단장의 허락 등 여러 절차를 거친 후에야 프리다 박사의 악행들이 담긴 영상석을 빌려올 수 있었다.
영상을 확인한 제르다는 주먹을 꾹 쥐었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짓을.”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공작가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영상구에서 흘러나왔다.
프리다 박사가 그동안 일삼았던 악행들을 목도한 제르다는 충격으로 털썩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카일라와 맞는 영혼석을 찾기 위해서,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고 실험체로 쓰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인형의 재료로 쓰이는 건 다반사였다.
살인, 시체 훼손. 사람을 공격하는 병기 인형 제작까지.
어렸을 적 알았던 프리다는 이 정도로 악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제르다는 방금의 참사를 전부 보고 들은 제 눈과 귀를 씻고 싶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던 제르다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꿋꿋이 끝까지 영상을 보았지만 어느새 차갑게 식은 눈이 되었다.
평생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 온 선량한 그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루시엘과 에리카가 혼자 있던 제르다에게 다가갔다.
“……제르다 씨, 괜찮아요?”
“제가 방금 본 건 제 형이 아닙니다. 그는 악마인 것 같습니다. 그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굳게 다짐한 제르다의 얼굴을 보자,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요. 제르다 씨는 누구보다 강하고 선량한 분이니 이겨 내시리라고 믿어요.”
“고맙습니다. 에리카, 나중에 만나요.”
제르다는 마음을 정리한 모양인지 그리 말하고는, 곧장 돌아갈 의사를 전했다.
연인이 걱정된 에리카가 제르다를 위로해 주려고 했지만, 그는 혼자 돌아가겠다고 해 루시엘이 이동포탈을 만들어 황도로 보냈다.
“에리카 언니, 제르다 씨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
“으응, 그런 것 같네.”
“그는 이겨 낼 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자. 우린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까 연구소로 들어갈까? 아니면 다음에 올래?”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바쁘게 움직여야지. 루시엘이 도모하는 일에도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맞아. 고마워, 언니.”
두 사람을 손을 잡고, 연구소 건물로 들어섰다. 루시엘은 가방에서 새로 만들어 낸 자수정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만들어 낸 자수정은 고작 네 개.
다른 보석들이 영롱하고 화려한 광채를 가졌다면, 자수정은 우아한 빛을 머금은 보석이었다.
마치 달빛을 품은 것처럼.
“자수정, 그윽하게 아름답다.”
에리카가 감탄하자 루시엘이 말했다.
“응. 이건 진짜 오묘했어. 질투와 동경의 감정에서 만들어 낸 거거든.”
“호오, 그렇단 말이지? 흥미가 당기는걸. 우선 마력 측정부터 해 보아야겠다.”
그러나 에리카가 마력을 측정하는 도구에 올려놓자, 바늘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음…… 자수정도 연구가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좋아, 이것저것 다 해 보겠어.”
에리카가 소매를 걷고는 활기차게 말했다.
“응, 그리고 페어리 하트의 연구는 어떻게 됐어? 쉽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응, 확실히 어렵더라. ……루시엘의 사랑이 담긴 보석이라서 그런지 한참 걸렸어. 하지만 내가 누구니. 페어리 하트의 연구를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쳤지.”
루시엘은 궁금해서 진홍빛 눈을 빛내며 에리카에게 매달렸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요, 에리카 팀장님?”
“음, 루시엘. 지난번 핑크 다이아몬드와 가넷의 힘도 대박이었지만 페어리 하트가 더 굉장한 것 같아.”
“……!”
그녀의 말에 루시엘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더욱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