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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34)화 (234/282)

<234화>

제 목을 옭아매는 어둠의 힘에 카일라의 동공이 커졌다.

‘이 힘은 분명 어둠?’

벨슈타인의 핏줄이 마족과 닿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팔이 잘린 뒤로 점차 시커멓고 흉측하게 변했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아름답던 얼굴도 징그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몸을 짓누르는 살기와 위압감에 카일라는 오한이 들면서도 이를 바드득 갈면서 소리쳤다.

“끄허, 읍. 베…… 벨슈타인 네 이놈드을……! 내 이번 일은 반드시 갚아 줄 것이야!”

저벅, 저벅.

간격을 좁히면서 키제프가 서늘한 붉은 눈으로 이터널을 든 채 다가갔다.

찬란한 금발 아래 자리한 붉은 눈이 형형했다.

“진짜 처형받아야 할 자는 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의 드래곤 마나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키제프뿐만이 아니었다.

벨슈타인 공작의 냉기 섞인 압도적인 마나는 닿는 순간 소름 끼치게 차가워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여유로운 미소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짜 힘의 절반도 드러내지 않은 것이라고.

양쪽에서 두 초월자가 다가온다.

궁지에 몰리면서도 카일라는 핏줄이 다 터진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커흑, 윽! 네놈들의 살점을 조각조각 내서 씹어 삼키고, 이 제국에서 벨슈타인을 아예 도려낼 것이다. 짓밟아 줄 것이야……!”

파아아.

뒤에서 느른하게 얼음 마법진을 구동하던 공작도 그녀의 말을 비웃었다.

“그 지독한 패기만큼은 칭찬해야 할까. 같잖은 소리는 치워라. 벨슈타인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새아가가 있는 이상.”

“……광기와 욕망에 미친 괴물이 되더니 헛꿈을 꾸는 모양입니다.”

키제프가 미간을 좁히며, 이터널을 카일라의 목에 겨누었다. 공작이 구현해 낸 날카로운 얼음 가시와 칼날도 동시에 모두 카일라를 향해 겨누어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포위되었음에도 카일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죽어라.”

“……쿡, 쿠쿠쿠.”

키제프가 검을 치켜든 순간 카일라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 흑주술을 사용했다.

파앗!

시커먼 박쥐 떼들이 몰려와 시선을 끄는 사이, 그녀는 파스스 시커먼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쿡쿡쿡.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 몸이 죽겠느냐. 어찌 되었든 나는 내 아들 레이놀드와 행복한 끝을 맞이할 것이지. 이 검, 그리고 루시엘도 곧 내가 가져갈 것이야!”

제단의 빈방으로 카일라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장내를 채우던 어두운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공작은 곧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어리석은. 예상대로 검을 가지고 달아났군. 뭐 당분간은 행복한 꿈을 꾸게 하는 것도 좋겠지.”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곧 검이 가짜란 걸 알아차릴 겁니다.”

키제프가 이터널을 검집으로 거두고 나서 짙어진 눈으로 말했다. 그런 제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관없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우린 돌아가도록 하지.”

“예. 아버지.”

“다른 가족들은 제단에서 모두 귀환한 걸로 알고 있다. 나가면서 가볍게 정찰하도록 하지.”

잠시 복도로 나가 난간을 붙잡고 텅 빈 제단을 돌아보던 키제프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했다.

손안에 들어왔던 카일라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모든 것들이 벨슈타인이 무너지는 미래를 막고, 사악한 카일라와 레이놀드 황자를 몰아낼 시작점이자, 의미 있는 원정이었다.

그들을 심판할 날이 가까워졌음에 키제프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루시엘, 너를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싸울게.’

키제프는 그리 결심하면서 먼저 가고 있는 공작의 뒤를 따랐다. 앞장서던 공작 역시 마찬가지로 굳게 마음먹은 듯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루시엘이 있었기에 성공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키제프. 우리가 벨슈타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두 부자는 서늘하게 눈동자를 굴리면서 이를 갈았다.

* * *

“아빠! 키제프!”

도도도.

루시엘은 소식을 듣고 응접실로 내려왔다. 돌아온 공작에게로 달려가 너른 품에 와락 안겼다.

두 사람의 활약을 통신구로 보는 내내 그녀의 양손에도 땀이 나서 혼났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아빠. 너무 멋졌고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 거지요?”

“물론이다. 루시엘, 너의 계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공작이 보송한 은발을 쓰다듬으려다가 더러워진 행색 때문에 다가가던 손길을 멈추고 내렸다.

“일단 좀 씻어야겠군.”

“……네, 오늘은 푹 쉬세요. 제가 모두에게 전할게요.”

“아니다, 일의 마무리는 지어야지. 회의실에 가 있으렴.”

공작이 곧 자릴 떠나자, 제 차례를 기다리던 키제프도 이내 제 옷자락을 살펴보았다.

그런 키제프의 손을 잡고는 루시엘이 다감하게 눈을 맞추며 안아 주었다.

“키제프, 고생했어.”

“……루시엘.”

그의 몸이 더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루시엘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 너무 멋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우리 남편,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지?”

“……어어? 뭐야.”

심신이 지쳤음에도 루시엘이 주는 말에는 기운을 북돋아 주는 힘이 있었다.

키제프는 어느새 그녀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는, 뺨과 귓불을 붉혔다.

“우선 나 씻고 올게.”

“잠깐.”

긁힌 듯한 팔뚝의 상처가 루시엘의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발버둥 치던 카일라에게서 입은 상처인 모양이었지만, 정신이 없어 그는 자신이 다쳤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다.

“……다쳤는걸. 하지만 깨끗이 씻고 치유하는 게 좋겠어.”

“응…….”

땀에 젖은 금발이 내려와 붉은 눈을 약간 덮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로 모든 걸 짓누르던 짐승이 루시엘 앞에 서니,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별궁으로 향하는 복도로 가려는 키제프의 옷깃을 루시엘이 붙잡았다.

“본성의 빈방에서 씻는 게 낫지 않을까? 많이 지쳤잖아.”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루시엘이 안내를 부탁했고 그는 키제프를 본성의 빈 손님 방으로 안내했다.

“난 여기서 기다릴까?”

루시엘이 졸졸 뒤따라오면서 걱정스레 말했다. 키제프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너, 이미 나 따라오고 있는걸. 같이 가서 기다려, 그럼.”

“응.”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제프를 따라가다 뒤돌았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이벨린과 솔리아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동그래져서 되돌아오려는 루시엘에게 그냥 가라고, 이벨린과 솔리아페가 손짓했다.

이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어쩜 저리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꼬. 우리는 다시 회의실로 올라가 있도록 하자꾸나.”

“네, 어머님.”

* * *

말갛게 씻은 키제프를 기다렸다가 다이아몬드로 상처를 치유해 주고 난 루시엘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다 됐다.”

“벌써?”

나른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린 키제프는 못내 아쉬웠다. 자신을 치료해 주는 루시엘의 손길이 포근해서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얼른 회의실로 다시 가자. 모두 기다리실라.”

“잠시만……. 나 아직도 심장이 쿵쿵거려. 어쩌면 완전히 끝낼 수도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카일라를 상대할 때 싸늘하게 심장이 식은 사람처럼 굴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쉬운 표정의 그를 위로해 주듯 루시엘이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키제프는 충분히 잘한 거야. 그 여잔 사람이 아니잖아.”

“맞아. 알고 있어.”

그저 지금 루시엘의 위로를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 해 본 말이었다.

그럼에도 조금 화가 났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카일라가 악령이든 뭐든, 끝낼 방법은 반드시 있을 테니까.

붉은 눈은 사뭇 더 진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테니까.’

키제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시엘의 뺨을 어루만지고 말했다.

“루시엘, 먼저 회의실로 올라가. 나는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갈게.”

“……알겠어. 금방 와.”

키제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깊은 시각까지 공작성의 마법 랜턴은 꺼지지 않았다.

얼마 후 가족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회의실로 다시 모였다.

카일라는 가짜 마검을 들고 달아났지만 이번 작전으로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가족들이 무사히 귀환했고, 이동포탈석도 되찾았기에 루시엘은 무척 기뻤다.

게다가 카일라 황비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크루거 백작과 프리다 박사, 그리고 페넬로페까지 손에 넣었다.

크루거 백작과 프리다 박사는 각각 지하 감옥의 심문실로 옮겼지만, 아직 어린 페넬로페는 홀로 독방으로 보내졌다.

증인이 되어 줄 일꾼들까지 무사히 구출한 것도 잘된 일이었다.

“모두 애써 주신 덕분에 카일라와의 싸움이 1차적으로 끝났어요. 무엇보다 크게 다치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에요.”

루시엘의 말에 모두 고개를 주억였다.

“루시엘 말이 맞구나. 모두 무사해서 일단 다행이로군.”

의자에 푹 기대어 있던 길리아트 역시 깊이 공감을 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카일라가 가만있지 않겠지만, 프리다 박사가 없는 데다 부상까지 입은 몸이니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렇지. 루이비드?”

공작이 지하 감옥의 포로들을 떠올리며 악마처럼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예,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놈들이 뭘 가지고 있을지 내심 기대 중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빠 말씀대로 조급하게 굴지 않고, 우리의 방식대로 대책을 강구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루시엘. 마지막까지 힘을 합쳐보도록 하자.”

“네, 저는 클로디아 황녀님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어요.”

그 전에 아흰에게 가호석을 돌려주고, 가호석 사용에 대해 그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이동포탈 가호석은 누가 가지고 있어요?”

루시엘의 물음에 키제프는 아공간 포켓에 들어 있던 가호석을 꺼내 들었다.

“여기 있어.”

이동포탈 가호석은 신비로운 푸른 빛을 머금은 정육면체의 돌이었다. 신기하게도 손바닥 위에 놓아두면, 살짝 떠올랐다.

‘이걸로 황자궁이 있던 자리에 레이놀드의 죄를 증명해 줄 증거를 만들어야 해. 독이 있는 와인을 빼돌리고, 황궁의 죄수들을 빼돌린 이동포탈을…… 그 외에도 가능한 건 모두.’

이렇게 강력한 이동포탈을 몰래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인데, 황궁에 독이 든 와인을 반입한 것과 죄인들을 빼돌린 것 역시 중죄.

그 모든 것이 황자가 반역을 꾸몄다는 걸 뒷받침해 줄 것이다.

이것을 잘 이용해서 레이놀드 황자를 무너뜨릴 기회의 발판으로 삼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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