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기사 석상의 내부에 몰래 설치된 영상구를 통해, 루시엘은 카일라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약간의 변수로 당황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예상 궤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가짜 처형 의식이 진행되겠지. 그래, 열심히 해 봐, 카일라.’
예상 시나리오도 몇 가지 잡아 놓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1순위 목표는 이동포탈 가호석, 2순위 목표가 카일라를 사로잡거나, 해치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루시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카일라는 이미 한번 죽은 몸이니, 죽여도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과 벨슈타인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
‘진짜 블루 익스큐션은 벨슈타인의 보물고에 잠들어 있으니까.’
그 사실이 안정감은 주었지만 끝까지 긴장을 지워 낼 수는 없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루시엘은 자꾸만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루시엘이 진홍빛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잠시 회의실 밖에 다녀온 이벨린이 테이블 위로 따듯한 찻잔을 내려놓았다.
“루시엘, 차라도 마셔 보렴.”
“네, 감사해요. 할머니.”
이벨린의 배려에 루시엘은 맑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향이 무척 좋아요.”
내음을 깊게 들이마신 루시엘이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가 체내에 들어오자 확실히 긴장과 불안감이 가셨다.
그러나 영상구 속 카일라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루시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 * *
눈앞의 마검이라는 목표를 생각하면서 카일라는 비로소 흡족한 얼굴로 거대한 홀 안의 기사 석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게 반짝이는 마검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굉음을 내면서 거대한 문이 닫혔다.
쿠구궁.
‘이제 피의 축제가 시작되겠구나.’
짜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아 그녀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사이 일꾼들은 하나둘 정신을 차렸지만 카일라는 그들이 순종하도록 세뇌를 시켰다.
그 탓에 카일라의 숨은 다소 거칠어졌다. 너무 많은 힘을 썼으니, 무리가 뒤따를 수밖에.
문이 완전히 닫히자 카일라는 일꾼 중 하나인 마야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야, 카펫을 들추고 푸른 돌을 들어 올리렴.”
“예, 카일라 님.”
쿠구구궁.
이내 뽀얀 먼지와 함께 검은색의 커다란 양팔 저울과 처형대가 드러났다.
기사 석상의 투구 속에서 푸른 안광이 탁 밝혀졌다.
쿵. 쿵.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얼음 제단의 집행자. 죄인은 저울에 올라라.”
기다렸다는 듯 카일라는 일꾼 여자들 틈을 헤치고, 아직 눈을 뜨지 않은 페넬로페를 소름 끼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 페넬로페야. 내 딸.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고 했었지? 이제 때가 왔구나.”
그녀는 페넬로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깨어나지 않은 척은 그만하지 그러니.”
이내 카일라가 페넬로페의 뺨을 검은 손톱으로 쿡 찔러 피를 냈다. 그 따가움에는 페넬로페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얏!”
페넬로페가 두려움에 찬 초록 눈으로 카일라를 바라보며, 덜덜 떨었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정녕 모르겠니. 저 위에 올라가렴. 네 죗값을 치러야지.”
페넬로페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양팔 저울과 처형대를 번갈아 보았다.
제단의 구조와 처형 의식은 페넬로페도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제물들에 자신도 포함이 된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피가 거꾸로 솟았다. 누구보다 카일라를 믿었다. 부모를 버리고, 와인 재배지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흑주술로 꾀어내 납치에 일조했다.
‘근데 돌아온 건 배신이라고?’
“농담이죠? 저더러 죽으라고요? 이, 이럴 순 없어요!”
“그래, 나를 위해 죽어 줘. 날 보렴. 죽었지만 이렇게 다른 몸을 얻어 살아났잖아. 너도 이렇게 다시 살려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긴 아니었지만, 이미 한번 자신을 속이고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그녀를 믿을 순 없었다.
“시, 싫어! 살려 줘! 아악! 나, 난 죄가 없어!”
두려움에 찬 페넬로페의 턱을 움켜쥔 카일라가 말했다.
“죄가 없긴. 너도 사람을 죽였잖니?”
카일라의 말에 문득 페넬로페는 제 흑주술로 장난삼아, 사람을 죽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 그건 당신을 위해서였어.”
“거짓말인 거 안단다. 페넬로페를 저울 위에 올려 주렴. 마야.”
마야가 영혼 없이 다가오더니 발버둥 치는 페넬로페를 강제로 저울의 왼쪽 위에 올려놓았다.
“죄인의 죄만큼 무게 추를 추가하겠다.”
끼이익.
이내 기사의 갑옷 건틀릿에서 무게 추가 떨어지며 저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쿵. 쿵.
기사 석상이 움직이며 처형대 위로 움직이고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죄인 페넬로페의 처형을 시작한다.”
“마…… 말도 안 돼.”
파랗게 질린 페넬로페의 얼굴이 현실을 부정하며 일그러졌다.
끼이익, 저울이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처형대 위로 페넬로페를 밀어 넣었다.
카일라는 세상 가장 기쁜 낯으로 페넬로페를 보며 웃었다.
“다시 보자꾸나. 페넬로페.”
기사 석상이 처형검을 높이 쳐들기 시작할 때였다.
데구르르, 톡.
검은색의 무언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주위로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거짓말처럼 기사 석상도 움직임을 멈췄다.
기다리던 처형이 멈춰지자 카일라는 답답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처형을 계속해! 죽이란 말이다!”
카일라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 마검이라도 강제로 탈환해서 자신이 페넬로페를 직접 죽여야겠다고.
그러나 사방이 짙은 어둠으로 아무것도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기사 석상의 뒤에서 새빨간 보석 가넷이 불에 타올랐다.
이내 그토록 카일라가 염원하던 은발의 소녀가 석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너, 너는. 크리스털 페어리?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이지?”
“이건 당신의 꿈이자 환각이에요. 강렬한 욕망에 블루 익스큐션의 마력이 반응한 것이죠.”
“……뭐라고? 갑자기 이게 무슨.”
느닷없이 환각이라고?
카일라가 날카롭게 루시엘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저는 블루 익스큐션의 힘으로 만들어진 환상이에요. 당신이 원하는 건 페넬로페를 포함한 모두를 죽이고 블루 익스큐션을 얻는 거예요. 소울 이터로 완성된 완벽한 마검은 당신의 시간을 되돌려 완전히 부활시킬 거고요.”
“너, 네가 어떻게……!”
제 속내를 전부 들켜 버리자, 카일라가 놀란 동공을 굴렸다.
루시엘이 빙긋 웃었다.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쉬운 일이에요. 마검은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자, 제가 만든 보석을 받아서 파괴하면, 이제 멈춰진 의식이 다시 진행되고 모든 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카일라 님. 저는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일라 님의 인형이 되기를.”
“잠깐!”
카일라가 건드리자마자 눈앞에서 뿅 사라져 버렸지만 루시엘이 남긴 보석은 그대로였다.
“믿을 수가 없구나. 블루 익스큐션에 이런 힘이 있었다니.”
이게 마검이 만들어 낸 환각이라면 속는 셈 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이토록 영롱하고 아름다운 보석은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골렘을 소환해서 핑크 다이아몬드를 파괴했다.
파사사.
파앗!
그러자 루시엘이 일러 준 대로 기사 석상이 움직이며 처형이 집행되었다.
그제야 카일라는 만족한 듯 미소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보석의 환상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
* * *
환상에 빠진 카일라를 관찰한 지, 십여 분이 지났다.
페넬로페와 일꾼들은 자신들이 처형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괴로움에 울부짖기에, 공작이 슬립 마법으로 잠재우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환상에 빠진 카일라는 은신을 풀고 곁으로 다가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짜 블루 익스큐션을 석상에서 분리해 낸 공작이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역겹군.”
공작이 낮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에 미친 괴물만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기에 참담한 현장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이었다.
광기에 물든 그녀가 가짜 마검을 들고 기뻐하면서 드디어 아공간에 감춰 놓았던 빛나는 큐브 모양의 돌을 꺼냈다.
이동포탈 가호석.
드디어 목표물을 포착한 키제프가 기민하게 카일라에게로 접근했다. 그녀를 바로 죽이고 싶었지만 카일라를 건드리는 순간, 루시엘의 핑크 다이아몬드가 구현해 낸 이 환상은 깨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팔목부터 잘라 내서 목표물을 얻는다.
키제프가 조용히 검을 다시 뽑았다. 이터널의 찬란하고 성스러운 빛이 제단의 어둠을 밝혔다.
키제프의 칼날이 팔목을 갈랐다.
스윽!
서걱.
“아악!”
카일라가 내지른 비명이 들려왔으나, 피가 흐르지 않는 거무죽죽한 팔이 인형처럼 나뒹굴었다.
그 손에 들어 있던 이동 포탈석을 키제프가 주워서 안전하게 포켓에 넣는 동안 이번엔 공작이 카일라를 상대했다.
“크윽…… 이,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 베, 벨슈타인 놈들? 내, 내 검은!”
상황 분간이 아직 되지 않는 모양인지, 카일라는 눈을 휘둥그레 굴리면서 한 팔로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안간힘을 쓰면서 바닥에 떨어진 마검에게 기어가는 카일라의 몸을 공작의 발이 턱 짓눌렀다.
“그 많은 사람을 전부 죽일 생각을 하다니, 과연 대단하군. 이제 네 죗값을 받겠다.”
“이, 이거 놔.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냐. 감히 나를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날 죽일 수 없을걸.”
“죽이지는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고통은 느끼는 모양인데. 순순히 보내 줄 수 없다.”
공작의 붉은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카일라의 눈이 번뜩이자, 그녀의 주변으로 뿌연 안개가 차오르며 뱀과 쥐 떼들이 몰려왔다.
그에 잠시 물러난 공작은 바닥에 충격을 일으켰다.
쩌저적!
덕분에 뱀과 쥐 떼들은 그들을 성가시게 만들지 못했다.
마검을 끌어안은 채 적갈색 눈동자를 굴리던 카일라는 자신이 불리해지자, 도망칠 방법을 궁리했다. 그런 카일라를 보며 키제프가 입매를 비틀었다.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겠어.”
루시엘의 지난 생을 괴롭게 한 원흉.
그녀가 아파한 것의 수백, 수천 배의 고통으로 돌려줄 것이다.
키제프는 형장에 묶여 괴롭게 죽어 가던 루시엘을 떠올렸다.
사아아.
키제프의 살기가 뒤섞인 드래곤 마나가 카일라를 짓눌렀고, 그의 한 손에 소환된 어둠이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크으윽! 벨슈타인 애송이 주제에 벌써 이런 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