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홀로 남은 카일라가 손톱을 짓씹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일행들은 조용했고, 프리다 박사의 통신구는 아예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화염 골렘에게 마물을 계속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잠시 흑주술을 사용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자욱하게 낀 안개는 제단의 구석구석까지 닿으며 탐색했다. 그러자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자들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보였다.
백금발의 마법사,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검사……. 그리고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더 있는 듯했다. 이내 그녀는 곧 불청객들이 제단에 들어왔음을 알아차렸다.
“설마……!”
이토록 위압적인 감각은 처음이었다. 이건 마치…… 문학 살롱에서 그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감각이었다.
벨슈타인.
마족이나 드래곤과 비등할 정도로 초월적인 기운을 가진 자들.
‘하지만 그들이 여기 올 리가 없는데. 착각일지도…….’
카일라가 예측한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하, 함정입니다! 도망치십시오!”
크루거 백작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카일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벨슈타인의 함정이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쯤 황도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
‘가만…… 프리다 박사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벨슈타인 놈들이 여기 온 게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여기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벼르고 별러서 온 것이 아닌가.
‘빨리 블루 익스큐션을 탈환해서 나가야겠다.’
마음이 급해진 카일라는 화염 골렘을 데리고 서둘러 더욱 면밀하게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이동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까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벽면에 있었다. 손바닥만 한 마법진이었다. 위층으로 향하는 화살표가 반짝였다.
“그래, 여기가 바로 길이었구나.”
화살표에 손을 대자, 쿠구궁 바위벽이 열렸고 카일라는 그걸 타고 이동했다.
* * *
“이런, 그걸 외쳐 버리다니 방심했네.”
“컥!”
올가미에 걸린 크루거 백작의 목이 솔리아페의 발차기에 의해 우둑 꺾여졌다. 추가로 검의 손잡이를 이용해 기절시켰다.
퍼억!
자신보다도 더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발로 굴려 뒤집어 완전히 기절했는지 확인한 솔리아페는 검을 짚고는 주변을 살폈다.
다른 기척은 없었다.
크루거 백작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솔리아페가 중얼거렸다.
“입부터 틀어막았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눈이 마주쳤다. 놈이 외치는 것을 페넬로페나 카일라가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솔리아페는 얼른 통신구를 켜서 루시엘과 이 사실을 공유했다.
“크루거 백작은 붙잡았단다. 루시엘.”
―엄마, 크루거 백작을 사로잡으셨군요. 멋져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구나. 놈이 나와 마주쳤을 때 함정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카일라나 페넬로페가 우리가 왔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어.”
솔리아페의 말에 루시엘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카일라라면 그럴 공산도 있어요. 그렇담 작전을 변경해야겠어요. 할아버지께 요청해서 크루거 백작은 밖으로 옮기고, 엄마는 이제 페넬로페를 사로잡아 주세요.
“그래, 페넬로페라면 언젠가 혼쭐을 꼭 내 주고 싶은 애였지.”
솔리아페의 푸른 눈이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리아트가 도착해 크루거 백작을 넘겨받았다.
“솔리아페, 벌써 한 건 해냈군. 고생했다. 네가 크루거 백작을 따돌려서 일꾼들도 감시망에서 벗어나긴 했다만, 작전 변경 소식을 들었지.”
“예, 조용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우선 크루거 백작을 좀 제단 밖으로 부탁드려요, 아버님.”
“충분히 잘했다. 앞으로도 조심하거라.”
“예.”
길리아트는 며느리에게 실드 마법을 재차 걸어 주며 건투를 빌었다.
제단의 다른 길로 가는 솔리아페를 보던 그는 축 늘어진 크루거 백작의 몰골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응? 죽었나? 허, 우리 며느리의 솜씨가 대단하군.”
흡족하게 웃은 길리아트는 이동포탈을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공작성에서 이 모든 걸 전해 듣고 있던 루시엘은 아르제온에게도 작전 변경 소식을 알렸다.
“아르제온, 전략을 바꾸기로 했어. 그 일꾼들 데리고 있는 거지? 그들을 아직 구출하지 말고, 우선 기사 석상의 방이 있는 길목에 데려다 놓아 줘. 카일라의 눈에 띄도록.”
―알았다.
아르제온은 루시엘과의 통신을 마친 후 얼음 감옥에 가두어 놓은 일꾼들에게로 돌아와 그들을 살폈다. 겁을 먹은 그들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어, 얼음의 마녀. 우리를 풀어 주시오.”
“음, 매우 시끄럽군. 자, 다들 나를 따라오도록 해. 내 말만 잘 들으면 곱게 풀어 줄 거야. 오호호호.”
아르제온은 저음으로 말하다가 뒤늦게 여자인 척 가느다란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
아르제온의 협박에 일꾼들이 서로를 얼싸안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얼음 감옥을 해제하자마자, 한 여자가 뛰어나가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르제온이 표정을 구기면서 푸른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이내 푸른 얼음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창이 소환되어 여자의 앞길을 막았다.
아이스 스피어(Ice spear)였다.
“우리 좋게, 좋게 가자니까.”
아르제온이 그리 말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겁을 먹었다. 이내 아르제온은 일꾼들 틈에서 넝마를 뒤집어쓰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루시엘 또래의 예쁘장한 아이였는데,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인상착의를 봐 둔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페, 뭐라더라. 뭐 어차피 인질들을 데려가야 하니까 우선 모른 척 내버려 둬 볼까.’
* * *
제단을 복원한 건 공작의 마법이었기에 그는 내부에 훤했다. 그래서 작전이 바뀌자마자 곧장 키제프와 함께 기사 석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잔챙이를 처리하고, 제물을 미끼로 카일라를 유인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몫.
기사 석상이 있는 가장 중앙의 홀에서 하이드 마법으로 기척을 숨긴 두 사람은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라, 그 여자가 오기를.
‘계획을 조금 변경할게요. 카일라라면, 어떻게든 기사 석상이 있는 방을 찾아서 제물을 바치고 검을 가져가려고 할 거예요. 그걸 노리고, 석상 근처에서 그녀를 공격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카일라는 중앙의 가장 커다란 방을 찾아서 왔다.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는 거대한 석상. 석상의 허리춤에는 푸른색의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마검, 블루 익스큐션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제단의 장치들과 마검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오오, 드디어 찾았구나. 나의 보물. 나의 마검!”
카일라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내 기사 석상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지척에서 숨은 채로, 카일라의 목소리를 들은 키제프는 조소했다.
‘왔군. 이 모든 일의 원흉, 사악한 마녀 카일라.’
키제프가 석상 뒤편에 은신한 채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면서 붉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카일라는 검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퍽 감격스러운 모양인지 감상이 길었다.
“아아! 그래, 어서 저 석상에게 제물을 바쳐야 해! 잠깐만 기다려 주렴. 곧 돌아와 너를 가져갈 줄 터이니……!”
반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황홀하게 검을 보면서 떠들던 카일라가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공작은 복도 기둥 뒤에 은신한 채로 카일라를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슬슬 얼음의 마녀 역할을 맡은 아르제온이 제물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나타날 때였다.
이윽고 카일라가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였다.
휘오오오!
새하얀 눈보라를 일으키면서 얼음의 마녀가 또각또각 긴 드레스 자락을 이끌고 나타났다.
마녀의 뒤로 제물이 될 일꾼들이 조로록, 뒤따르고 있었다. 얼음의 창이 여전히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때, 페넬로페가 넝마를 버리고는 얼른 카일라의 곁으로 달려가려 했다.
“어허. 어딜…….”
“꺄악!”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얼음의 마법진이 나타나며 페넬로페의 발목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덜덜 떠느라 말도 못 하는 페넬로페의 모습에도 카일라는 오히려 반가운 듯 말했다.
“네가 얼음의 마녀인가? 고맙게도 내 아이들을 네가 데리고 있었구나.”
카일라의 말에 아르제온이 코웃음을 쳤다.
“……뭐, 고마울 건 없고. 그래, 내가 바로 얼음의 마녀다. 넌 누구지?”
아르제온이 우아하게 머리를 늘어뜨리며 말하자, 카일라가 그의 오만함에 오만상을 썼다.
“말은 필요 없으니, 제물들을 내놔.”
“감히 내 제단에 발을 들이다니, 살아서 나갈 줄 아느냐?”
카일라의 눈이 번뜩이면서 잽싸게 화염 골렘을 소환했다.
쿵쿵!
거대한 화염 골렘이 주먹을 휘두르자, 아르제온은 슬쩍 비켜나면서 골렘에게도 마법을 걸어 얼려 버렸다.
‘슬슬 퇴장 시간인데…….’
아르제온의 역할은 제물들을 기사 석상 방 앞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는데, 카일라와 하필 마주친 터였다.
‘화려하게 퇴장해야지.’
아르제온은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얼음의 마녀로 끝까지 연극을 마치려면, 블리자드(Blizard) 정도는 써야 할 것 같았다.
거대하게 일렁이던 마나는 이윽고 장내에 커다란 눈보라를 몰아치게 만들었다.
‘블리자드를 쓰려는 건가.’
알아챈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기사 석상의 방 내부로 피신했다.
휘오오오.
제단의 바닥이 얼어붙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털썩 주저앉으며 추위에 떨었다.
카일라는 안개를 흩뿌려 제 몸을 보호했으나, 한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그녀 역시 파르르 떨며 주저앉았다.
이내 정신을 잃은 카일라가 눈을 떴을 때는 얼음의 마녀는 사라지고, 쓰러진 일꾼들과 페넬로페뿐이었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몸은 오래지 않아 곧 녹아내렸다.
“하하, 하하하. 드디어 처형의 의식을 할 수 있겠구나.”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카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기사 석상의 방과 제물들을 번갈아 가면서 노려보았다.
그러곤 겨우 기운을 쥐어짜 일꾼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안으로 질질질 끌고 갔다.
비틀거리면서도 광기에 찬 눈으로.
“드디어…… 블루 익스큐션을…… 얻을 수…… 있겠구나! 내 계획대로 되었어!”
방 안의 키제프와 공작 역시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포탈 가호석을 얻어 내기 전까지는, 아직 카일라를 해칠 수 없었다.
‘……정말 여기서 사람들을 제물로 쓰는 의식을 하려는 거였군. 저런 괴물에게서 자랐으니 황자 역시 그리 자란 걸 테지. 이번엔 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다. 전생의 루시엘을 괴롭게 했던 복수를 이번 생에서 마칠 테니까.’
키제프는 루시엘의 과거를 떠올리며 단단히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