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현상범 베어 그린스가 그동안 갈취한 제국민들의 피땀 배인 돈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네.”
황도의 광장에 모인 제국민들에게 공표한 후, 클로디아는 베어 그린스에게 피해 입은 백성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고, 그들을 위로했다.
“클로디아 황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님께서 나서 주신 덕분에 제국이 평화로워지겠습니다.”
“익명의 제보자에게 도움을 받고 실행에 옮긴 것뿐이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네.”
클로디아가 너그러운 얼굴로 그리 말했다. 사실이었다. 루시엘의 제보가 없었더라면 잡지 못했을 테니까.
제보자가 누군지 밝히지 말아 달라 청했기에 루시엘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럴수록 루시엘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못내 든든하기만 했다.
항상 도움을 받기만 했으니 언젠가는 자신이 루시엘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이놀드의 죄가 낱낱이 까발려져야 한다.
클로디아는 드레스 자락을 콱 움켜쥐며 마차에 오르는 대신 말 위에 올랐다. 그러곤 제 호위 기사 중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제 아버지가 붙여 둔 기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보란 듯이 더 백성들을 향해 더욱 손을 흔들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클로디아 황녀님 만세!”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클로디아가 밝게 웃으며, 한 소녀가 가져다준 꽃다발을 받아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버지, 지켜보고 계시지요?’
* * *
챙챙!
마차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들을 용병 인형들로 교란시켜 따돌린 다음, 프리다 박사가 언덕 위 먼발치에서 마차를 지켜보았다.
까아악.
이내 프리다 박사의 어깨 위로 까마귀가 날아와 앉자, 그는 품 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 까마귀의 부리에 물려 주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훨훨 날아가더니 마차 쪽으로 가서 스크롤을 떨어뜨렸다.
쿠구구구, 쩌저적!
이내 그것이 지면에 닿자마자 사방이 진동했다.
갈라진 땅들이 비틀어지고 솟아올라 울퉁불퉁해졌다. 마차의 말들이 놀라면서 앞발을 들었고, 마부는 놀라 도망쳤다.
히히힝!
잘 내달리던 벨슈타인의 마차가 공격으로 인해 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차체는 부서져 내렸다.
이 정도면 충격으로 기절하거나, 부상을 당했거나. 혹은 안에서 도망치려고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해진 프리다는 천천히 마차로 접근했다.
쿠우웅.
프리다 박사는 반쯤 박살이 난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은발의 계집아이라고 했지.’
그 아이만 데려다가 바치면 된다고. 그러나 마차 안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텅 빈 마차를 확인한 프리다 박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어쩐지 처음부터 벨슈타인치고 마차 호위가 느슨하다 싶더라니.
“속임수였나!”
그렇다면…… 벨슈타인이 얼음의 제단도 주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카일라 님과 모두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이 사실을 빨리 보고하기 위해 통신석을 꺼내려는데 뒷목이 서늘했다.
따돌린 줄 알았던 벨슈타인의 기사들이 되돌아와서 프리다 박사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어느 틈에!”
프리다 박사가 재빨리 목각 인형을 부르려는 순간.
빠악!
노아가 검 손잡이로 그를 기절시켰다. 쓰러져 미동도 없는 프리다의 모습에 그가 검은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주, 죽은 건 아니겠죠?”
“설마……. 잘했다. 신입.”
“제법인데.”
이네스와 챈들러가 칭찬해 주자 노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아가 마님께 보고한 다음, 이자를 심문실로 데려가면 되겠지요?”
두 기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용병 인형들과 상대하던 다른 검은 날개들도 그곳으로 다가와 합류하고 공작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 * *
얼음의 제단에 들어온 지 체감으로는 두 시간이 훌쩍 넘은 듯했다. 그들의 체온은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카일라가 소환한 화염 골렘 덕분에 제단의 마물을 처리하고 나아가고 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 뻗쳐 있는 얼어붙은 나무 덤불도 아무리 헤쳐도 끝이 없었다.
“제단 안에 식물이 자라다니 기이하군.”
카일라가 그리 중얼거렸으나, 마법의 제단이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프리다 박사가 말하기를 제단은 매번 구조와 마물이 새롭게 바뀌니, 그때그때 독파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원형의 얼음 기둥이 있는 이 길은 아까도 지나간 길 같았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크루거 백작의 말에 페넬로페도 망토를 여미면서 말했다.
“맞아요. 저 얼음 기둥 아까 지나간 게 분명해요!”
아무래도 같은 길을 빙빙 맴도는 듯했다.
“안 되겠구나. 흩어져서 기사 석상이 있는 방을 찾아!”
카일라의 명령에 크루거 백작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일꾼들에게 말했다.
“들었느냐. 흩어져서 기사 석상이 있는 방을 찾아라. 빛나는 푸른 검을 차고 있을 것이다.”
겁먹은 일꾼들이 삼삼오오 흩어졌고, 크루거 백작도 홀로 나섰다. 페넬로페는 카일라의 팔에 바짝 붙었다. 그러나 그런 페넬로페가 거슬렸는지 카일라가 말했다.
“페넬로페, 너도 뱀을 풀어서 나를 도와주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윽, 여기는 너무 추워요.”
“나약한 소리 말고, 어서 움직이렴.”
“……네.”
평소보다 싸늘해진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에 페넬로페는 하는 수 없이, 움직였다.
이내 통신구를 통해 제단 안을 지켜보던 벨슈타인의 회의실에서는 길리아트가 핏빛 눈을 굴리면서 말했다.
“……걸려들었구나, 이놈들. 자, 이제 어쩔까.”
제단 곳곳에 거미줄처럼 쳐 놓은 길리아트의 투명 미로 마법은 덤불을 건드리면 발동했다.
길을 헤매게 만드는 환상 마법으로, 적의 발목을 붙들어 두는 나무 속성의 마법이었다.
본래 나무가 없으면 발동하기 어려웠으나, 덤불의 씨앗에 루시엘의 페리도트를 이용해서 자라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미로에 걸린 걸 눈치채고 흩어졌네요. 이제 저들이 석상이 있는 방을 찾기 전까지 두 가지를 해내야 해요.”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공작이 느른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 새아기의 계획대로 되고 있군.”
“다음은 이제 어떻게 할까, 루시엘?”
키제프의 물음에 루시엘이 말했다.
“이제 제단에 들어가야지. 아빠와 키제프는 카일라를 상대해 주세요. 그녀를 해치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일단 우리의 목적은 이동포탈 가호석이에요.”
그것을 빼앗아야 레이놀드 황자를 위기에 몰아넣을 이동포탈을 설치할 수 있고, 그간 자유롭게 이동했던 카일라와 발루크 상단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묶어 둘 수 있을 테니까.
카르한 공자인 아흰에게도 약속했다.
“그래, 그건 반드시 되찾아야지.”
“할아버지는 아르제온과 함께 제단의 일꾼들을 밖으로 구출해 주세요.”
“……그럼 크루거 백작 그자는 내가 상대하마.”
“네, 부탁드려요, 엄마. 저는 가서 페넬로페를 상대할게요.”
그러자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다.
“안 된다. 루시엘.”
“그래, 우리들만으로 충분해. 넌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어. 네가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원래 지휘관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다, 루시엘.”
솔리아페가 루시엘을 의자에 앉혔고, 이벨린이 손을 잡았다.
“그래, 루시엘. 여기서 나랑 있자꾸나. 네가 가진 패를 끝까지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하긴 남아서 전체 상황을 지켜 보고, 혹시 모를 일에 방비할 사람도 필요했다.
가족들의 의견을 듣던 루시엘은 망설이다가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요. 할머니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설치된 영상구 속의 카일라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당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야. 당신과 레이놀드 때문에 내가 받았던 고통,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고통. 모두 되갚아 줄 테니까. 기다려.’
마음 깊이 결심한 루시엘은 가족들에게 응원의 말과 시선을 보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다녀오마, 루시엘.”
길리아트가 지팡이를 꺼내, 얼음의 제단 앞으로 이동하는 이동포탈을 열었다.
파아앗.
초록빛 물결 속으로 가족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가족들과 함께 가려던 키제프가 루시엘에게 와 손을 붙잡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붉고 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긴 기다림이었어, 루시엘. 네 복수를 드디어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네. ……다녀올게.”
“키제프, 조심해. 카일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 거야.”
루시엘이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자신의 보석들이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혹시 내 보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몰라. 이것도 가져가.”
“고마워.”
루시엘의 보석을 받아서 포켓에 소중하게 넣은 그가 이동포탈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가족들과 키제프를 얼음의 제단으로 보내고 나니 루시엘도 심장이 세차게 쿵쿵거렸다.
그런 루시엘의 곁으로 다가와서 이벨린이 어깨를 감쌌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꾸나. 루시엘.”
이벨린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루시엘이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다가 스피넬을 꺼냈다.
‘할머니 말씀대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자.’
루시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스피넬에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악한 자들은 파멸의 끝을 보게 해 주세요.’
분홍빛 스피넬이 반짝이며 부드러운 바람이 퍼졌다.
이내, 그녀의 통신구가 울렸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이 비쳤다.
―아가 마님, 프리다 박사는 검은 날개의 심문 담당관에게 넘겼습니다. 다만 결과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제가 그를 너무 강한 힘으로 기절시키는 바람에…….
“응……? 힘 조절이 안 되었구나, 노아. 모두 고생했다고 전해 줘. 아무래도 제르다 씨는 조금 더 있다가 불러야겠는걸.”
제르다의 부탁이 있었다. 혹시 형을 마주치면 자신과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그러나 프리다 박사는 카일라를 돕고 있는 인물이니, 그의 머릿속 정보나 가지고 있는 기술부터 면밀하게 조사하고 심문하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