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다음 날 루시엘은 다시 황성을 찾았다. 황성 감찰대를 만나 진술서를 작성하고, 아만다가 베어 그린스와 통신을 나누는 걸 녹음해 증거로 넘겨주는 등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내 몫은 끝났어. 돌아가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사건이 잘 해결되길 바라면서 루시엘은 벨슈타인의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숲길로 들어가기 위해 정원을 지날 무렵, 문득 수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제국을 떠나실 때도 되지 않으신가요?”
갈색 머리에 녹색 드레스를 입은 클로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엘은 반가운 마음에 귀를 종긋 세우고는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대놓고 쫓아내시는 겁니까. 여행의 꽃인 연회가 열리는 걸 보고 돌아갈 겁니다.”
그녀를 뒤따라가는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함께 비췄다.
‘앗, 클로디아 황녀님. 혼자 계신 게 아니었구나. 그러고 보니 요즘 외교 손님을 응대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가 주는 게 좋겠지?’
그리 결론을 내린 루시엘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는 살금살금 우거진 숲길로 다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
옆으로 삐죽 나온 나뭇가지에 하필이면 드레스 자락이 걸리고 말았다. 나무에 걸린 옷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풀리지 않았다.
곤란에 빠진 루시엘의 모습을 먼저 발견한 클로디아가 놀라면서 말했다.
“공자비! 왜 거기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거예요.”
“……아, 황녀님.”
클로디아가 얼른 와서 도와주었지만 뾰족한 나뭇가지에 단단히 걸렸는지 옷이 잘 풀리지 않았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른 루시엘을 보고, 문제의 외교 손님도 성큼 다가섰다.
“신사라면 곤경에 빠진 레이디를 외면할 수야 없으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낯선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가지에 얽힌 옷자락을 금방 풀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루시엘이 꾸벅 인사하자, 요하네스가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머릿속에 이내 작고 보송한 소녀와의 짧은 인연이 떠올랐다.
요하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만날 때마다 그대는 작은 곤경에 처해 있군요.”
“……네?”
이 유들거리는 말투는…… 지난번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적이 있던 그 안하무인?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첫인상이 별로였던 건 기억나는데…….’
그의 정체는 가물거렸다. 이웃 나라 왕자였던가?
“아아, 그때 그 레스토랑……?”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는 루시엘에게 그가 먼저 고개를 주억이며 제 정체를 밝혔다.
“루트리히 공국의 요하네스 루트리히. 장소는 기억하면서 내가 누군지는 그새 잊었습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요하네스가 시선을 내리깔며 다소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일이 좀 많아서요…….”
“내가 어디를 가도 잊어버릴 만한 존재감은 아닌데……흠흠.”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요하네스가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두 분이 아는 사이인가요?”
“아뇨, 잘 모릅니다. 황녀님.”
루시엘이 선을 그었지만 요하네스는 괘념치 않고 말했다.
“알아 가는 사이라고 해 둡시다. 정식으로 인사를 부탁드리지요.”
“…….”
‘왠지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 사람인데…….’
루시엘은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마주쳤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제국의 외교 손님이니 루시엘도 예를 갖춰 대해야 했다. 루시엘은 스커트 자락을 사뿐 붙잡고는 예를 차렸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 공자비입니다.”
“잠깐, 공자비라면…….”
요하네스의 미간이 잠시 좁혀지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클로디아가 냉큼 부채로 입을 가리며 헛생각 말라는 듯 말했다.
“우리 공자비께는 늠름한 부군이 있으시답니다, 대공자님.”
“……아, 어린 나이에 일찍도 하셨군.”
“결혼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루시엘이 남 이사라고 솔직히 대답하려다가 클로디아 앞이라 돌려 말했다.
“루시엘이 오늘도 방문하는 줄 알았으면 시간을 따로 빼 두었을 텐데요.”
“아니에요. 바쁘신 황녀님의 시간을 제가 빼앗을 수는……. 용건만 보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루시엘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클로디아에게 말했다.
“실은 옆에 계신 이분께서 적적할 때마다 찾아오시는 바람에 제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답니다.”
그런 솔직한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오히려 친남매인 레이놀드 황자보다 친근해 보여서 의외였다.
“커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티타임이나 함께…….”
“공자비, 넘어가시면 안 된답니다. 공자비의 예쁜 친구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시커먼 속내를 드러낼 게 틀림없으세요.”
“……그건 미리 거절해 둘게요.”
“후, 너무하십니다.”
이미 요하네스의 이미지는 그쪽으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그의 제안대로 야외 정원에 다과 테이블이 차려졌다.
새하얀 커스터드 푸딩 크림이 흠뻑 묻은 별 모양의 빵 팡도르와 보라색 꽃잎이 장식으로 올라간 얼그레이 케이크. 폭신폭신 부드러운 에그 타르트에 곁들인 세 종류의 차와 오렌지 주스까지.
살짝 출출하던 차였던지라, 루시엘은 디저트에 집중하느라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고 이내 빵빵해진 볼을 갖게 되었다.
“귀엽기도 하지. 저는 루시엘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것 같아요.”
차만 홀짝이던 요하네스가 문득 물었다.
“공자비께선 우리 루트리히 공국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요?”
“아…….”
얼른 냅킨으로 입가를 꾹꾹 눌러 닦은 루시엘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 책에서 루트비히 공국에 대해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공국은 하늘을 나는 배, 천공선을 가진 나라라고 알고 있어요. 신성지구 아스트리야보다 더 높이 비행한다지요?”
“오호. 알고 계시군요. 맞습니다. 천공 기사단도 있죠. 하늘에서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척했다.
“맞아요. 그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당신 말고, 천공선하고 천공 기사단 말이에요.’
뒷말을 조용히 삼키면서 루시엘은 큼지막한 눈을 깜빡이며,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언젠가 실제로 한번 보고 싶긴 해. 어떨지 상상이 안 가는걸.’
하늘을 난다면 지상의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마음만 먹으면 아스트리야까지 탐색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벨린 할머니도 드래곤이니, 탐색은 가능하겠지만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천공선은 관광용으로 각국의 허가를 받아, 정해진 하늘길로 이동한다고 했다.
군사적 보안을 위해 타국의 영토를 파악하는 것은 안 되지만, 아스트리야를 탐색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언젠가 타 보고 싶네요.”
“공자비께서 관심이 있으시오? 그럼 내가 특별히 관광용 천공선을 예약해 드리지요. 분명 멋진 추억이 될 거요.”
“아,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니 정말인가요?”
“그대에게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이 뭔지 가르쳐 드리지. 훗.”
요하네스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자니, 루시엘은 이 사람이랑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 * *
며칠 후, 제국의 신문에는 드디어 현상범 베어 그린스와 그를 숨겨 주던 그의 연인이 시내의 여관에서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브랑카르 학술원에 대한 내용은 실리지 않았고, 귀족 아이의 납치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레오니가 오늘 무사히 학원에 입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듯했다.
테이블에 신문을 내려놓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가 열린 방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누나아.”
빳빳하게 깃을 세운 아이보리색 셔츠에 단정한 하늘색 교복 재킷을 입은 레오니가 우다다 다가오더니, 루시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레오니. 벌써 준비 다 마친 거야? 멋지다. 가면 친구들에게 인기 최고겠는걸.”
“…….”
루시엘의 칭찬에 살짝 볼을 발그레 붉혔지만 레오니는 곧 고개를 푹 숙였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였고 입술이 또 살짝 뾰로통해져 있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자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어깨 위로 은발이 사르르 쏟아졌다.
왠지 서운한 것이 있는 표정이라 루시엘이 레오니의 통통한 팔을 흔들었다.
“누나한테 다 말해 봐.”
“왜 입학 취소했어?”
“……아, 그건 말이지. 진짜 다니려고 한 게 아니라.”
“그럼 가짜야?”
“으응. 미안해. 처음부터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적당히 핑계가 필요해서…….”
‘현상범을 잡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레오니.’
“우우, 나 이제부터 루시엘 누나랑 같이 학원 다니는 줄 알았는데……!”
시선은 땅만 보고, 뺨은 단단히 부푼 채였지만 레오니의 따뜻한 손은 루시엘을 꼭 붙들고 있었다.
석류알 같은 눈동자는 울망거렸다.
“조금 기대했는데…….”
꾹 다문 입술 아래로 호두알 같은 턱 주름이 생겼다.
학원에 같이 다니면 이것저것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듯했는데 자신만 덩그러니 입학하게 되었다니…….
“미안해. 널 실망시키려던 건 아니지만……. 학술원에서 위험한 일이 생길 뻔했거든.”
루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려고 입학한 척했던 거야. 누나는 사실 마탑에 다녀와서 학원에 다시 갈 필요는 없기도 해.”
레오니도 그건 알고 있었다.
“알아. 누나는 이미 똑똑해서 학원에 더 다니면서 배울 필요가 없는 거지?”
“음,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비슷하달까.”
레오니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그러면 나도 똑똑해질 거야! 누나랑 형처럼!”
“좋은 생각이야. 레오니가 학원에 가면 누나가 전서구 많이 보내 줄게. 내 부엉이 벨 알지?”
“……누가 요즘 그런 걸 보내. 바보 누나. 난 통신구 할래.”
레오니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루시엘이 보슬보슬한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래그래. 기다릴게. 아 참, 레오니.”
“응?”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누나가 좋은 친구 소개해 줄게.”
“여자친구 필요 없어.”
“아니 여자친구 아니고, 동물 친구인데…….”
“……그래? 몰라. 봐서.”
루시엘은 경매소에 두고 온 와이번 ‘버블’을 떠올렸다. 말은 저렇게 무심한 척 굴어도 레오니는 와이번을 보면 무척 좋아할 것 같았다.
“다들 기다리시겠다. 이제 갈까?”
“응.”
가족들을 모두 태운 벨슈타인 공작가의 검은 마차는 이내 브랑카르 학술원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