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황궁의 후원에는 봄꽃들이 한가득 예쁘게 피어 있었다. 개중 유달리 눈길이 가는 꽃이 있었다.
오렌지 셔벗처럼 달콤한 색에 여러 겹의 꽃잎들이 층을 이루어서 드레스를 입은 것만 같은 꽃이었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루시엘이 진홍빛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너무 예쁜 꽃이에요, 황녀님.”
“후후, 그렇지요? 튜베니아라는 장미의 먼 사촌쯤 되는 꽃이랍니다. 공자비, 아니 루시엘이 황성에 오면 꼭 보여 주고 싶었어요.”
클로디아가 루시엘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너무 좋아요.”
“나 역시 그렇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주 바삐 지내고 있어요. 배움에는 참으로 끝이 없는 듯해요, 루시엘.”
뒤에서 두 사람을 따라오던 황궁의 시녀장 라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제왕학과 정치학, 어학 스승님들께서 더 배울 것이 없다 하셔도 계속 배우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신답니다. 황녀님 좀 말려 주시어요.”
“시녀장도 참. 부끄럽게 왜 그러시나.”
시녀장의 자랑에 클로디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말투도 그렇고, 몸가짐이나 시선, 얼굴에 짓는 표정까지도 학식과 덕, 기품이 배여 있었다. 과거 스스럼없이 장난치던 소녀 시절과는 달리 무척 차분하고 점잖아졌지만, 지금의 클로디아도 좋아 보였다.
루시엘이 클로디아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면서 저를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루시엘이 보이자, 클로디아가 의아한 듯 보랏빛 눈동자를 굴렸다.
“우리 귀여운 공자비께서 저를 아주 기특하단 눈으로 보고 있는 건 무슨 까닭인가요?”
“클로디아 황녀님, 멋지고 우아하게 성장하셨어요.”
루시엘이 동경과 선망을 느끼면서 클로디아를 바라보는 순간, 심장이 일렁였다.
보석을 만들어 낼 듯한 강렬한 감정이 일어났지만 참았다.
‘읏…… 지금은 안 돼.’
“실례지만 잠시 자리 좀 비우고 올게요.”
“편히 다녀오도록 하세요.”
클로디아의 허락을 받은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후원 뒤로 가서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별장으로 이동했다.
파앗.
또로롱, 또롱!
별장의 보석 방으로 이동하자마자 루시엘이 보라색의 보석들을 쏟아 냈다.
“이건…… 자수정이네.”
아란티아를 향한 질투의 감정으로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방금 클로디아에게 느낀 것은 닮고 싶고 부러운 동경의 감정이었으니까.
루시엘은 자수정을 마법 서랍에 정리해서 넣어 두고는, 얼른 다시 후원으로 되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기 전 시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클로디아를 멀찍이서 지켜본 루시엘이 생각했다.
‘클로디아 황녀님, 부디 훌륭한 황제가 되어 주시면 좋겠어요.’
루시엘은 자리로 다시 돌아간 다음 말했다.
“황녀님, 긴히 논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에 눈치껏 라라 부인이 물러가 주었다.
“무엇인가요. 공자비?”
“클로디아 황녀님께서는 민심에 항상 귀 기울여 주고 계시지요?”
“흠흠, 부끄럽지만 그러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그럼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어요. 제국의 민심을 흩트리는 현상범 베어 그린스를 잡아 주세요. 내통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허, 그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착취해 간 돈이 무척 거액에 이른답니다. 공자비가 알려 준다면, 나야말로 고마운 일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클로디아가 루시엘의 손을 맞잡고 간절하게 물었다. 루시엘이 아만다의 신상 정보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확인한 클로디아가 갈색 눈썹을 찌푸렸다.
“브랑카르 학술원이라. 최근 세간에서 떠오르는 곳이군요. 이런 곳에 어떻게 범죄자와 내통하는 사람이 숨어 있던 건지…….”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학술원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거예요. 학술원이 아니라, 개인 관리인의 잘못이니 몰래 처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러자 클로디아가 루시엘의 자그만 어깨를 두드렸다.
“상냥한 사람. 황성 감찰대를 통해 은밀하게 이 아만다라는 사람을 추적해, 베어 그린스를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어요. 고마워요, 루시엘.”
“천만에요, 클로디아 황녀님.”
루시엘은 스커트 자락을 붙잡고 인사를 올렸다. 클로디아 역시 제 여동생을 보듯, 루시엘을 꼭 끌어안으면서 잠시 속내를 밝혔다.
“루시엘, 사실은 내내 두려웠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갈고닦아도, 레이놀드 그 아이에게 질까 봐서요. 이 모든 것들이 허투루 돌아갈까 봐서.”
그 순간만큼은 클로디아 황녀가 예전처럼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시엘도 그녀를 폭 끌어안고는 다독였다.
“누구보다 잘하고 계신 거예요, 클로디아 황녀님. 불안감은 이제 접으셔도 좋아요.”
무엇보다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루시엘의 자그만 품 안에서 클로디아가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친구의 존재에 클로디아는 마음 깊이 위안을 받는 것만 같았다.
“루시엘이 없었더라면 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 아까부터 클로디아 황녀님처럼 훌륭한 레이디가 되고 싶다고 생각 중이니까요. 제 선망의 대상이에요.”
“……루시엘.”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울게요. 황녀님 곁에는 제가 있고, 벨슈타인이 있어요. 그럼 어디 끝까지 해 보도록 할까요. 과연 누가 웃는 싸움일지 말이에요.”
루시엘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석보다 빛났다.
* * *
“페넬로페, 페넬로페! 이제 정신이 드느냐?”
톡톡.
제 뺨을 두드리는 손길에 페넬로페는 흐릿해진 정신을 추어올렸다.
“세상에…… 페넬로페! 이제 괜찮니?”
그동안 잊고 있던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간 서신 한 통을 보낸 것이 다였으니, 얼굴을 보는 것은 무려 오 년 만이었다.
그녀는 베아트리체 직원의 신고로 동사 직전에 구해져, 카빌 후작가로 실려 온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그동안 왜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페넬로페, 응?”
수척해진 카빌 후작 부인이 딸의 차가운 몸을 녹여 주기 위해 더욱 안으며 물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딸아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누워 있던 페넬로페는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페넬로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낡아 빠진 집이었다. 천정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침대도 삐그덕거려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집 꼬락서니가 이게 뭐예요? 저택은 어쨌어요? 날 왜 여기 데려온 거야!”
아무리 카빌 후작가가 사정이 좋지 않아도 이딴 쓰러져 가는 집구석에 살지는 않았는데.
“네 오라비 때문에 집을 담보로 투자를 했는데, 이자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바람에……. 망할 막시무스 자식!”
카빌 후작이 벽을 쿵 치면서 제 아들 막시무스를 욕했다. 그러나 페넬로페를 보는 그의 눈도 곱지는 않았다.
“그런데 넌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그거냐, 페넬로페? 애비, 애미 얼굴은 보이지도 않느냔 말이야!”
“아이, 여보. 오랜만에 돌아온 딸한테 왜 그래요?”
성난 카빌 후작을 부인이 뜯어말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두 사람을 바라보는 페넬로페에게는 정이라고는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페넬로페가 제 붉은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듯이 넘기더니 부모를 노려보았다.
“하…… 진짜 돌겠네. 누가 날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어요? 난 돌아올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아니 이딴 집이었으면 절대로 안 돌아왔지. 그 멍청한 막시무스가 집을 담보로 도박을 한 모양인데…… 내게 손 벌릴 생각은 마세요. 우린 이제부터 남이니까. 아셨죠?”
“……뭐, 뭐, 뭐가 어째? 아아악!”
카빌 후작이 목뒤를 붙잡고 쓰러졌고, 후작 부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한 명 남은 시종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을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던 페넬로페는 숄을 걸치고는 층계를 걸어서 나왔다.
“얘, 페넬로페! 어디 가는 것이니, 제발 돌아오렴.”
자신에게 달라붙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페넬로페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낡은 저택의 문을 잠근 다음, 흑주술로 녹슬게 만든 페넬로페는 통신구를 꺼냈다.
“마차라도 보내서 나 좀 빨리 구해 주세요.”
통신을 마친 페넬로페는 열이 올랐다.
“루시엘, 그 빌어먹을 계집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였을까?”
분명히 제 손으로 직접 루시엘을 사로잡았는데, 뿌연 안개가 깔린 다음부터 일이 꼬여 버렸다. 흑주술으로 소환한 뱀도 힘을 쓰지 못했고, 자신은 얼어붙었다.
가장 이상한 일은 제 뱀이 루시엘을 붙잡아 물었는데,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마법을 쓰면서 루시엘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동 마법이었나?”
페넬로페는 손톱을 잘근 깨물며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까닭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추운 화장실에서 얼어붙은 상태로 오래 있다 보니 온몸의 체력이 쪽 빠졌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곧 붉은 마차 한 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완벽한 육체를 얻은 카일라가 페넬로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어머니! 저 얼어 죽을 뻔했어요.”
“페넬로페, 우리 아기. 무서웠겠구나. 괜찮은 거니?”
“네, 이젠 괜찮아요……. 그런데 저 루시엘, 그년을 사로잡는 일은 실패했어요. 아무래도 더 강한 힘이 필요해요.”
페넬로페가 분하다는 듯 씨근덕거리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카일라가 일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래, 일단 돌아가자. 나도 다른 볼일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