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루시엘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직원을 살폈다. 성별은 여자이고, 나이는 20대 후반. 귀족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베어 그린스의 추정 나이는 30대~40대.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였을까?
‘베어 그린스는 강제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한 흉악범,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그런 자의 범죄를 학술원의 관리인이 돕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동료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사각의 공간 안을 정돈한 직원이 손으로 입구를 짚으면서 나왔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직원의 손가락에는 알이 굵은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봉급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귀족이나 부호가 아니라면 평민에게는 턱턱 사기 어려울 물건이었다.
‘누군가의 선물이라면 다를 테지.’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 사이였다면 범죄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귀여운 아가씨, 이제 안으로 들어가셔서 검사를 진행해 보시겠어요?”
루시엘은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확인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아만다.”
루시엘이 사각 공간 안으로 들어가 마나석과 연결하자 영상구에는 준비된 화면이 흘러나왔다. 화면을 톡 터치하면 선택이 되는 모양이었다. 적성 검사를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며 빠르게 진행했다.
온 신경이 아만다에게 쏠려 있던지라 제대로 진행하긴 어려웠다.
결과는 예술형과 학자형이었다.
아만다가 루시엘의 검사 결과에 따른 추천 선생님들과 과목, 장래 희망 등을 안내해 주었다.
다음 레오니까지 검사를 모두 마치자 그녀가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 벨슈타인 도련님께서는 마법 강화형과 탐험형이 나오셨네요. 과연 벨슈타인이라 대마법사가 될 자질을 타고나셨나 봅니다. 호기심도 아주 많으시고요.”
“탐험형이 뭐예요?”
“탐험형은 자연에 많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데, 여러 신비한 지역이나 유적, 생물을 찾기 위해 직접 탐험하는 수업을 하게 되실 거예요.”
레오니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그럼 동물도 있어요?”
“네, 학원에는 동물들과 마수를 기르는 동물원도 있답니다.”
이어서 추천 과목과 선생님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자, 레오니가 귀를 쫑긋 세우고 아만다의 말을 경청했다.
“부모님과 함께 선생님들과 학업 상담이나 수업 체험을 받아 보실 수도 있고, 학원을 견학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얼 하시겠어요?”
루시엘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그럼 아만다를 조금 더 관찰할 수 있겠어.’
루시엘이 해맑은 소녀처럼 말했다.
“저는 학원을 견학하고 싶어요. 아만다가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에요. 아가씨. 저희 브랑카르 학술원은 학생 여러분의 쾌적한 학습은 물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다양한 시설과 공간을 조성해 두었답니다.”
아만다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수업 체험 받을래! 마수 보러.”
레오니와도 이 학원이 잘 맞는 듯해서 루시엘은 어서 일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니를 위해서라도 단서를 뭔가 찾아내야 해.’
아만다는 루시엘에게 학원의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었다.
“저희 브랑카르는 학원생들의 지적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미술관을 갖추고 있답니다. 둘러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미술관 앞에서 루시엘이 그림을 잠시 둘러보는 동안, 아만다는 슬쩍 복도에 서 있었다.
루시엘은 그림을 보는 척하면서 잠시 그녀를 관찰했다. 아만다가 이내 미술관 입구에서 멀어지면서 주변을 살피더니 비상구로 들어가며 통신석을 꺼냈다.
루시엘은 얼른 그녀가 들어간 비상구의 문에 귀를 대고 엿듣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만다는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을 빨리 착수하게 될지도 몰라. 이번에 엄청난 고위 귀족가 자제들이 들어왔어. 무려 벨슈타인 공작가라고……! 당신도 알지? 며느리를 아주 끔찍하게 아낀다던데, 어쩌면 우리 어마어마한 돈이 생길지 몰라.”
이어서 내용을 더 들어 보니 내 사랑이라는 둥, 보고 싶다는 둥 아만다가 낯뜨거운 말들을 꺼냈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맞았다고 결론 내린 루시엘은 입학 수속을 진행하겠다고 말해 두고 귀환했다.
‘어서 클로디아 황녀님에게 전달해야지.’
실제 학술원 수업의 신학기는 보름 후부터 시작이니 그 전까지는 취소 가능했다.
그날 저녁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루시엘은 가족들에게 현상범 베어 그린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말했다.
“그러니 레오니의 입학은 안전을 위해 보류하는 게 어떨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공작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루시엘 너도 안 된다.”
“그래, 루시엘. 우리 새아가에게 그런 흉측한 일을 겪게 할 수는 없단다. 차라리 이 어미가 대신 위장해서 입학하마! 날 납치하면 그놈을 제압할 테니까.”
솔리아페가 그리 반대했고, 레오니도 의지를 다졌다.
“나도 벨슈타인이야. 호랑이를 잡으러 굴러 들어가랬어!”
“굴러가는 게 아니라, 굴로 들어가는 거겠지.”
“아, 맞다.”
루시엘이 레오니의 말랑한 볼을 꼬집자, 석류알 같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웃, 애 취급 하지 마.”
레오니, 이렇게 보드랍고 귀여운 볼을 가지고 있으면서 애 취급 하지 말라니……. 루시엘은 살짝 웃어넘겼다.
* * *
다음 날, 노이슈반 황제는 벨슈타인가의 알현 요청에 반가운 마음으로 접견실에 다다랐다.
안 그래도 의논하고 싶은 사안이 여럿이었다. 벨슈타인 공작은 좀처럼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위인이었고, 제국의 많은 귀족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나마 지난번 문학 살롱 이후로 우호적인 교류가 몇 번 오갔으나, 대부분 클로디아 황녀와 벨슈타인 공자비. 두 소녀를 통한 것이었기에 황제는 소극적으로만 뒤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솔직히, 노이슈반에게 벨슈타인 공작은 두려운 동시에 꼭 곁에 두고 싶은 상대였다.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서늘한 붉은 눈에는 그가 타고난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 주듯, 언제나 짙은 살기가 흘렀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공작이 반쯤 미쳐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 제국도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그러니 공작과는 절대로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언제나 박혀 있었다.
노이슈반의 보랏빛 눈동자가 침잠했다.
‘어쩌면 클로디아, 그 아이가 나는 이루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벨슈타인의 막대한 부와 군사력, 마정석의 자원과 마탑의 북부 지부까지, 보다 긴밀하고 확실한 조력을 요청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기대감을 안은 황제의 눈이 번들거렸다.
“폐하, 벨슈타인 공작가의 대부인께서 드셨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현 상대는 공작도, 공자비도 아닌 벨슈타인의 대부인인, 선대 공작 부인 이벨린이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단정한 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이벨린이 우아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아, 벨슈타인 대부인께서 알현 요청을 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후후, 기대한 이가 아니라 자못 섭섭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게 벨슈타인은 언제나 오랜 태산 같은 존재입니다.”
노이슈반 황제가 턱가에 난 수염을 문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 반겨 주시니 흐뭇합니다. 오늘은 제가 간단히 할 말도 있고, 보여 드릴 것이 있어서 왔지요.”
이벨린의 의도가 무엇일까 호기심이 동한 황제가 얼른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호, 어서 듣고 싶습니다.”
이벨린이 황성의 시종과 시녀들을 둘러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긴히 할 말인지라.”
“아아, 그러지요. 모두 물러가라.”
이윽고 너른 접견실 안이 고요해지자 이벨린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형형한 빛을 머금으며 말했다.
“내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았지요. 이제는 세상이 바뀔 때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가지에서 난 열매 중에서 가장 크고 실한 열매가 쓰임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지요. 썩어 버린 쭉정이는 꺾어 버려야 하고요. 그래야 남은 열매도 살고, 가지도, 나무도 삽니다.”
이벨린은 빙빙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직역하자면 그것이었다. 제국과 부모가 가지나 나무라면, 그 열매는 자손을 뜻한다.
곧 황위를 계승할 황가의 자손들 중 쓸 만한 아이를 점찍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크고 실한 열매는 클로디아를, 썩어 버린 쭉정이는 레이놀드를 뜻했다.
“커흠.”
비록 돌려 말하긴 했으나, 그것은 퍽 노골적인 뜻을 담고 있었기에 노이슈반 황제가 불편하다는 듯 기침을 했다.
“아무리 벨슈타인 대부인이라지만 이것은 황실 내부의 문제입니다.”
황제가 불편함을 드러내자 이벨린이 사근사근 말했다.
“우리 벨슈타인과 우호적인 관계로 더 발전하고 싶다면, 선택해 주세요. 어떤 열매를 고를지 말입니다. 부디 황제 폐하와 우리 벨슈타인의 뜻이 같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웃으면서 자그만 파우치에서 무언가를 꺼내, 황제 쪽으로 스윽 밀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본 황제는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벨린이 내민 것은 검은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때맞춰 이벨린의 푸른 눈이 형형히 빛났고, 그녀는 잠시 드래곤 마나를 방출했다.
노이슈반 황제가 놀라서 되물었다.
“서, 서, 설마……. 드래곤이십니까?”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던 황제에게 이벨린이 온화한 미소를 보냈다.
“폐하께만 보여 드리는 제 비밀이랍니다. 소문이 퍼지면 온전히 폐하 책임이십니다. 후후, 이 늙은이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우리 손주 며늘아기가 클로디아 황녀님을 뵙고 있다고 하니 그리 가 보려고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 저, 저는 정무가 있어서. 허허허.”
황제의 낯이 희멀게져선 혼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