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24)화 (224/282)

<224화>

“저희 브랑카르 학술원은 다각화, 다변화된 교육을 추구합니다. 희망 교과 선택은 물론이고, 학습 시간과 진도 등의 모든 계획을 직접 짜면서 아이들에게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길러 줍니다.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 주고 개발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학술원장의 긴 홍보 인사로 시작된 참관 설명회는 학부모들의 열의에 찬 질의응답으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강당 내부의 좌석을 살피던 루시엘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용을 듣고 있는 공작 내외와 레오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가족들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는 복도로 다시 빠져나왔다.

때마침 여러 곳에서 연락이 속속들이 도착했던 터였다.

아르제온은 얼음의 제단 복원이 마무리되어 내부로 잠입한다는 전언을 팔찌로 전해 왔다.

길리아트는 아흰과 만나 폐지하도를 확인했다고 했다. 그는 그곳의 이동포탈이 카르한 가문의 가보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해 주었지만 그밖에 딱히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캐서린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학술원 B동의 비품 관리 창고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복도 저편에서 통신구를 확인하면서 공작이 루시엘에게 걸어왔다. 그 역시 통신구로 여러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우리 새아기, 어서 들어오지 않고.”

루시엘을 발견한 그가 반갑게 다가왔다.

“앗, 아빠도 절 보셨군요. 캐서린이 잠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요.”

“그렇군. 볼일 보고 아까 우리 자리로 와라.”

“네!”

그녀의 말대로 비품 창고를 찾아가자 캐서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 마님, 페넬로페가 영애들을 이용해 다과회를 열려는 모양입니다. 마법 매거진을 경험시켜 주니, 아가 마님 예상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술술 말하더군요. 역시 아가 마님을 꾀어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역시…… 그렇다면 페넬로페도 이제 내 정체를 알고 있겠구나.’

루시엘이 눈동자를 굴리자 눈치 빠른 캐서린이 말했다.

“예, 다음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음, 그렇다면 페넬로페의 전담 테일러가 되어서 움직임을 계속 파악해 주실 수 있나요? 조금 더 깊숙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게 많은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우선 페넬로페가 절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요. 저를 베아트리체로 데려다주세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 빛내며, 캐서린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캐서린이 황금 열쇠를 꺼내 비품 창고의 닫힌 문에 열쇠를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그럭. 소리와 함께 이윽고 문을 열었을 때는 베아트리체의 직원 휴게실 안이었다.

“아가 마님, 저는 의심받지 않도록 다시 가 볼게요. 페넬로페의 방은 왼쪽 끝에 있는 방이에요.”

캐서린이 그걸 알려 주고는 직원실을 나갔다.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넷을 하나 꺼내어 자그만 불씨를 소환했다.

파스스.

가넷에 불이 붙자 루시엘의 분신이 퐁 하고 나타났다.

차후를 위해 제르다의 루시엘 인형은 아껴 두고 싶었으니 가넷으로 만든 분신을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여러 번의 훈련으로 소환 시간을 늘려 온 덕이었다.

루시엘은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고는 기다렸다.

‘3분 정도 가게 안을 돌아다니다가 페넬로페가 발견하고 따라오면 화장실로 가 줘.’

루시엘의 분신이 말간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루시엘은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 색을 바꾸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다녔다.

“어머, 손님. 혹시 찾으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직원이 다가오자 루시엘이 얼른 둘러댔다.

“제 전담 직원은 따로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혹시 직원 이름이…….”

“캐서린이요.”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직원이 물러갔고, 루시엘은 그사이에 놓쳐 버린 제 분신을 찾으러 갔다.

‘이런. 어디로 갔지?’

이내 어렵지 않게 다시 분신을 찾을 수 있었다. 루시엘은 제 마나가 은은히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어느새 루시엘의 분신을 보고 페넬로페가 뒤따라 가고 있었다.

오 년 동안 페넬로페도 훌쩍 성장한 모양이었다. 성인에 가까울 만치 큰 키와 체구, 타오를 듯 붉은 머리와 초록 눈동자는 겉으로는 참 예쁜 아이였다.

그러나 제 분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면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조차 적의를 숨기지 않다니, 곧 화장실로 향한다면 한 대 치기라도 할 태세였다.

‘역시 페넬로페, 넌 변함이 없구나.’

루시엘은 그걸 뒤에서 지켜보며 입꼬릴 올렸다. 예상한 바였다.

루시엘은 미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내 루시엘의 분신이 화장실로 들어오자 페넬로페도 얼른 뒤따라오더니 문을 쿵 닫았다.

“루시엘, 널 찾아다녔는데 이제야 다 만나네. 그동안 나를 감쪽같이 속였더라? 나 네 비밀을 알고 있어. 내 어머니가 알려 주셨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페넬로페가 말했다. 루시엘은 문틈 사이로 페넬로페와 분신을 지켜보았다.

“네 힘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요정은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낸다지? 어디 한번 진짜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고통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지 말이야.”

사악하게 웃은 페넬로페가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다음 허공에 흩뿌렸다.

사아아.

쌔애액.

그러자 똬리를 틀은 검은 뱀이 나타났다. 자신의 피를 대가로 뱀을 소환하는 건 흑주술의 일종이었다.

‘……페넬로페가 흑주술을 익힌 건가? 카일라 황비에게 배운 모양이야.’

생각보다 카일라의 신뢰를 산 모양이었다. 카일라 황비가 루시엘의 정체를 알고, 납치해 오라고 시킨 듯하고.

파스스.

검은 뱀이 루시엘의 분신을 칭칭 감고는 다리를 콱 물었다.

“드디어 널 사로잡는구나. 걱정 마.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살살 다루어 줄 테니까.”

하지만 표독하게 웃음 짓는 페넬로페의 주변으로 이내 짙고 차가운 안개가 쫙 깔렸다.

루시엘이 아이스 포그(Ice fog)를 발동시킨 터였다. 곧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에서 분신이 퐁 사라졌다.

“……루시엘? 뭐야. 어디로 갔지? 이, 이 못된 계집애 같으니.”

틀림없이 손에 넣을 거라 생각했던 루시엘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다니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내 낭랑한 영창 소리가 울렸다.

“프로즌 패더(Frozen fetter).”

사아아아!

화장실 내부의 온도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얇은 봄 드레스 차림이던 페넬로페가 달달 떨면서 제 팔뚝을 감쌌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페넬로페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내 그녀의 발부터 하체를 타고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루…… 루시엘? 네 짓이야? 흑…… 추, 추워.”

페넬로페가 소환한 뱀도 이내 힘을 쓰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내 뱀이…… 마, 말도 안 돼……!”

어느새 입술이 파랗게 질린 페넬로페가 겨우 말을 이었다.

“비, 비겁하게! 모습을…… 드러내! 후우…….”

이내 창고의 문을 거칠게 탁 열고 나오면서 루시엘이 선글라스를 낀 채 말했다.

“페넬로페…… 카일라 황비는 너를 이용하는 것뿐이야.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넌 내 말을 듣지 않겠지. 늘 그래 왔으니까.”

그사이 입술까지 얼어붙은 페넬로페가 말을 잇지 못해 윽윽, 입 안으로 비명이 갇혔다.

어느새 페넬로페는 그대로 차가운 얼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 와서 그녀의 몸을 녹여 주기 전까지는, 계속 이대로 있을 터였다.

“안타깝지만 너는 나를 붙잡을 수도, 따라올 수도 없을 거야. 영원히.”

루시엘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화장실을 떠났다.

* * *

캐서린의 도움으로 학술원의 비품 창고로 다시 돌아온 루시엘은 가족들과 합류했다. 질의 시간이 끝나고 마음을 결정한 아이들의 적성 검사 및 입학 수속이 진행되고 있었다.

레오니는 아직 입학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공작과 솔리아페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학원 교육진이나 운영 방식은 괜찮아 보이는군. 폴리체와 달리 후원은 거의 받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그만큼 재단이 튼튼하다는 뜻이겠죠. 레오니도 적성 검사라도 한번 받아 보렴. 꼭 입학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네에.”

레오니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루시엘이 보기에도 학원 자체는 좋아 보였다.

다만 문제의 그 ‘현상범’과 내통한 관리자가 있다는 점은 역시 걸렸다.

‘그 관리자를 찾아내야 해.’

루시엘은 강당에 나온 관리자들을 한 명 한 명 눈여겨보았지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사람이 관리자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캐서린에게 브랑카르 학술원의 명단이라도 부탁할까?’

루시엘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솔리아페가 레오니에게 적성 검사를 받아 보러 가자고 말했다. 레오니는 미적지근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고요.”

“레오니, 그럼 나랑 같이 받으러 갈까?”

루시엘이 레오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랑?”

“응. 나도 내 적성이 궁금해.”

“그래. 그렇게까지 같이 가고 싶으면 가 주지, 뭐.”

레오니의 통통한 볼이 붉게 물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은 적성 검사를 도와주는 한 직원 앞으로 가서 말했다.

“저랑 이 아이, 검사를 받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적성 검사는 이곳이 아닌 마법 강당에서 따로 진행될 거예요.”

“네, 안내 부탁드려요.”

이내 직원을 따라서 다다른 마법 강당에는, 신기하게도 네모난 작은 공간이 여러 개 있었다.

그 공간 안에 들어가서 검사를 받는 모양이었다. 이미 많은 아이가 줄을 서 있었다.

루시엘과 레오니도 나란히 줄을 섰다. 약간 긴장한 듯한 레오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루시엘이 물었다.

“레오니는 뭘 배우고 싶어?”

“그냥 제일 강해지고 싶어. 아버지나 형처럼.”

“그럼 화염 마법을 더 배워 보는 게 어때? 뛰어난 마법을 타고났으니까.”

“그치만 검이 멋있는데……. 다들 검을 잘 쓴단 말이야. ……누나의 기사님 하려면 검도 써야 되는데!”

“레오니는 뭘 하든 멋진 사람이 될 거야.”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보슬보슬한 아이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 적성 검사를 진행하던 직원이 유달리 레오니와 루시엘의 행색을 살피듯 눈초리가 바빠지며 반색했다.

“어서 오세요. 아, 벨슈타인 공작가에서 오신 도련님 아가씨시군요? 저 공간 안으로 들어가 마나석과 연결하면, 영상구를 통해 검사가 진행이 될 거랍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마치 원하던 물건을 찾은 것 같은 얼굴이네. 아까와는 결이 다른 과한 친절함.’

루시엘은 드디어 의심 대상을 찾은 것 같았다. 내통하는 직원이 베어 그린스의 범죄 대상을 찾아 주었을 테니까.

즉, 돈이 많아 보이는 부유한 귀족의 아이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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