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23)화 (223/282)

<223화>

“제가 드리는 작은 선물이니, 영애들 마음에 드는 옷들을 하나씩 골라 보시겠어요? 제 정성이니 사양하지 마시고요.”

베아트리체의 vip들에게만 보여 준다는 의상 진열대 앞에서 페넬로페가 영애들을 둘러보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드레스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기에 영애들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예? 카빌 영애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비싼 선물을 어떻게…….”

카빌 후작가의 재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영애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품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드레스 속으로 펌프스의 굽을 거칠게 쿵 굴렀다.

“아이참, 카빌이 아니라 이제 발루크 영애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후후. 발루크 상단의 거래 규모를 알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하나씩 골라요.”

초록 눈동자에는 약간의 역정이 묻어 있었지만, 활짝 웃는 미소에 그 눈빛이 가려졌다.

“그, 그래도 이런 걸 덥석 받아도 되나 모르겠어요.”

“사양 마세요. 제 마음은 더한 것도 드리고 싶으니까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렇지요? 이제 페넬로페라고 불러 주세요.”

“페넬로페, 너무 고마워요. 베아트리체를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선물까지 주다니.”

“맞아요. 페넬로페처럼 상냥한 친구는 없을 거예요.”

페넬로페와 영애들이 나란히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었다. 이윽고 지금까지는 얌전을 빼던 두 영애가 소맷자락을 걷고는 진열대로 달려가 정신없이 드레스를 골랐다.

똑같은 드레스를 고르고는 서로 양보하라고 싸우기까지 하는 그녀들을 보며 페넬로페가 비웃었다.

‘멍청한 것들. 친구는 무슨. 너희들은 그저 내 꼭두각시가 될 뿐인걸.’

최근에 카일라 황비가 그토록 바라던 일을 해 주었다. 바로 베아트리체의 vip고객으로 등록시켜 주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vvip라는 벨슈타인보다는 낮은 등급이지만 그래도 페넬로페에게는 퍽 기쁜 일이었다.

‘페넬로페. 이 어미가 한 가지 부탁이 있단다. 벨슈타인 공자비를 내게 데려다줄 수 있겠니?’

‘루시엘 그 계집애를요? 혼내 주시려고요? 안 그래도 그 애와 마주치면 가만두지 않으려고 해요.’

‘후후, 그래. 널 화나게 만든 아이였지? 데리고 오렴. 내가 아주 크게 혼을 내 줄 작정이니까. 그 애에게서 빼앗아 줄 것이 아주 많단다.’

‘빼앗아요? 무엇을요? 저도 할래요. 재밌겠어요.’

‘음…… 루시엘, 그 애는 크리스털 페어리란다.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요정이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원하던 것이란다. 꼭 얻어서 내 아들에게 쥐여 주고 싶구나.’

크리스털 페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페넬로페는 가장 먼저 제 아버지 카빌 후작이 떠올랐다.

전에도 카빌 후작은 루시엘을 의심하고, 눈동자가 빛나는지 확인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페넬로페가 확인한 루시엘의 눈동자는 빛나지 않아 간과했었는데. 속임수라도 쓴 모양이었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분노에 찬 페넬로페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자, 툭 부러지고 말았다.

이내 드레스를 선물 받은 영애들이 헤벌쭉 웃고 있자 페넬로페가 슬그머니 제안했다.

“영애들, 혹시 저 대신에 다과회를 열 생각 없으신가요?”

“어머, 다과회라면 직접 여시지 않고요?”

“아뇨, 저는 주인이 되기보다는 객이 되고 싶어서요. 그리고 꼭 초대하고 싶은 이가 있는데, 그녀는 제 초청에 응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부탁이에요.”

그때였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흑발, 신비로운 푸른빛을 머금은 귀부인이 다른 통로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페넬로페가 대기하던 직원에게 물었다.

“저쪽은 다른 길인가요?”

“그곳은 vvip를 모시는 곳입니다.”

눈이 커다래진 페넬로페가 물었다.

“저 귀부인은 누구신가요?”

“죄송합니다만, 고객분의 사적인 정보는 그냥 드릴 수 없답니다.”

캐서린이 완곡하게 말하자, 페넬로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대신에 테일러의 마법 매거진 서비스를 체험해 보시겠어요?”

“그게 뭔데요?”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는 개인 테일러를 두는 경우가 많답니다. 받아 보시겠어요?”

“좋아요.”

페넬로페가 말하자, 캐서린은 가느다란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 * *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장난감 가게의 입구에서 나온 루시엘은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챈들러가 물었다.

“아가 마님, 다음 일정은 어디로 가십니까?”

“오후에는 일정이 없어요. 모처럼 시간이 비는데 다들 근처 디저트 가게에 가실래요? 맛있는 타르트 집을 알고 있거든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기사들을 보고 제안했다.

그때였다.

탁탁탁!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누군가에 쫓기듯 골목길로 들어서며 루시엘이 있는 곳으로 내달려 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노아가 민첩하게 그녀를 보호하며 안쪽으로 밀었다.

“아가 마님, 위험합…….”

대신에 노아가 남자의 우락부락한 어깨와 크게 부딪혀서 퍽 소리가 났다. 남자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는 사과도 없이 그대로 달아났다. 찰나의 순간 잠시 놀란 루시엘과 시선이 얽혔다.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위화감이 드는 자였다. 남자의 오른쪽 눈에선 미미한 살기가 느껴졌고 왼쪽 눈은 긴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어…… 이 사람.’

루시엘은 과거 제국의 신문 기사에 실렸던 베어 그린스가 불현듯 떠올랐다. 붙잡힌 그는 애꾸눈에 머리카락이 없었다. 드러난 눈은 칠흑처럼 검은색.

눈동자 색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락부락하게 커다란 몸을 가진 점은 확실히 일치했다.

머리카락은 가발을 썼을 가능성이 있고, 일부러 머리로 눈을 가린 것도 수상했다.

“뭐 저런 예의 없는 자가 다 있는지. 아가 마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노아가 남자를 노려보면서 루시엘을 살폈다.

“난 괜찮아. 노아야말로 부딪혔는데 안 아파?”

“네, 아프지 않습니다.”

곁에 있던 챈들러도 노아를 칭찬했다.

“아가 마님을 빠르게 지키다니 잘했다. 노아.”

“당연한 일인걸요, 선배.”

노아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뒤늦게 제국 방범대가 다가와 말했다.

“방금 수상한 남자 못 보셨습니까?”

“저쪽입니다. 같이 가시죠.”

그사이 이네스는 마침 나타난 제국 방범대와 함께 사라진 남자를 뒤쫓았다. 그러나 이내 혼자 돌아왔다.

“놓쳤습니다. 아가 마님, 최근 황도의 치안이 안 좋아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디저트는 타운하우스로 귀가해서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최근 유명한 현상범도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아, 혹시 이 사람인가요?”

루시엘이 현상범 베어 그린스가 실린 제국 기사를 보여 주었다.

“예, 맞습니다.”

챈들러와 이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지만 현상범을 잡으려면, 오히려 그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에요.’

루시엘은 속마음을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말했다.

“알겠어요. 일단은 돌아가요.”

마차에 오른 루시엘은 다시금 베어 그린스가 검거된 당시의 신문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덜컹거림 없는 마차의 좌석은 등을 푹 기댄 채 생각하기에 그만이었다.

「희대의 범죄자. 베어 그린스는 도주 끝에 브랑카르 학술원에서 한 귀족 아이를 납치해 고액의 돈을 요구하다가 붙잡혔다. 알고 보니 학술원 내부의 관리인과 내통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그때 루시엘의 통신구가 빛이 났다.

―레오니, 루시엘 누나는 지금 중요한 일 때문에 바쁘단다.

조그맣게 속삭이는 솔리아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레오니의 얼굴이 불쑥 비쳤다.

통통하게 부푼 뺨이 발그레한 레오니는 무척 반가운 눈치였다.

―누나, 안녕. 진짜 바빠? 나도 황도에 있는데.

“앗, 레오니, 안녕. 근데 네가 황도에 있다구?”

어린 레오니가 황도라니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솔리아페가 레오니의 학술원을 알아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응. 다 같이 학술원 입학 설명회 왔어. 아버지, 어머니랑. ……끝나고 맛있는 거 먹을래? 나 영지 수익 이따만큼 났거든. 밥 사 줄게.

레오니가 머리 위로 둥글게 있는 힘껏 팔을 펼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니야. 누나가 더 부자니까 사 줄게.”

―좋아. 빨리 와.

웃고 있는 레오니의 뒤로 솔리아페가 얼굴을 비췄다.

―루시엘, 중요한 일로 정신없을 텐데 레오니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네가 신경 쓸까 봐 미리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다들 황도에서 일정이 있는 줄은 몰라서 약간 놀랐다.

“엄마, 레오니도 제게는 소중한 가족이에요. 다음부터는 사소한 일도 다 알려 주셔도 돼요. 마침 저도 볼일 마치고 여유가 있어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황도의 명문 교육 기관은 폴리체 아카데미와 함께 몇 군데가 더 떠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잘 몰랐다.

―브랑카르 학술원이란다.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데, 루시엘은 차라리 끝나고 오는 게 낫지 않겠니?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네? 브랑…… 카르 학술원이라고요?”

루시엘은 놀라서 진홍빛 눈망울을 끔벅거렸다.

―그렇단다. 왜 그러니, 루시엘?

“아…… 아니에요. 지금 곧장 갈게요.”

루시엘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통신을 마치고, 다시 생각했다.

브랑카르 학술원으로 가 내통하는 관리인을 먼저 찾으면 아이가 납치되기 전에 그를 잡는 것이 한결 쉬울 것이다.

루시엘은 마차의 창문을 열고, 기사들과 마부에게 전달했다.

“목적지가 생겼어요. 브랑카르 학술원으로 가 주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