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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22)화 (222/282)

<222화>

제르다의 주문으로 루시엘은 인형과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있었다.

화르륵.

제르다가 가넷을 마법 화로 안에 넣자, 불길이 일면서 파스스 흩어진 가루가 인형 루시엘에게 스며들었다.

“루시엘 님, 지금입니다.”

“네.”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파아앗.

푸르게 일렁이는 마나의 물결이 넘치듯 사방을 압도했다.

루시엘의 거대한 마나 덕분일까. 장난감 가게의 모든 장난감이 일시에 허공에 잠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덕분에 가게 전체가 달그락거리고 장난감들이 쏟아지고, 넘어지면서 잠시 소란스러웠다.

제르다와 에리카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루시엘과 인형 루시엘을 지켜보았다.

루시엘의 마나가 인형의 심장 안으로 사르륵 스며들며, 푸른 빛을 뿜었다.

그 순간, 루시엘은 의식이 뿌옇고 몽롱해지는 감각을 잠시 느꼈다. 이내 그것이 인형이 느끼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인형과 루시엘의 정신 일부가 이어진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마음속으로 말을 걸어보았다.

‘안녕. 나는 진짜 루시엘이야. 한 번 눈 떠 볼래?’

그 말에 인형 루시엘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루시엘은 감탄하며 재차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속 말이 들리는구나?’

이번에는 인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려요.”

‘좋아. 그럼 상점 안을 한 바퀴 돌고 강아지 인형을 가지고 와 볼래?’

루시엘의 명령에 인형이 움직여 상점 안을 돌더니, 강아지 인형을 찾아서 가지고 왔다.

기계적인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인형인 걸 모른다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여기요.”

루시엘 인형이 돌아와서 강아지 인형을 내밀었다.

“고마워.”

“……천만에요.”

인형 루시엘이 수줍은 양 웃었다. 기본적인 말하는 법은 어느 정도 하는 것 같았다. 몇 가지는 더 알려 주어야 할 듯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완벽하다.

루시엘은 문득 인형에게서 자신과 다른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인형 루시엘의 눈동자는 예쁜 진홍색이긴 했지만, 루시엘의 것처럼 찬란한 보석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마법이나, 렌즈로 꾸밀 수 있을 듯했다.

이내 인형이 루시엘에게 고개를 숙여 온순한 얼굴로 인사했다.

“진짜 루시엘 님.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르다가 다가왔다.

“루시엘 님의 마나와 연결하니까 인형의 성격이나 지성이 조금 더 뚜렷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무엇보다 제 마음속 말들이 인형에게 전달되는 모양이에요. 근데 기본적인 건 가르쳐 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해요. 식사 같은 것도 할 수 있나요?”

“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인형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그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몇 가지 주의점을 적어서 전달해 드릴게요. 이 아이는 바로 데려가실 건가요?”

잠시 고민하던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게 좋겠어요. 조금 더 친해지려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인형을 멈추게 하려면, 인형 허리띠에 부착된 가넷을 분리하시면 됩니다.”

제르다가 인형의 허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어요, 꼭 필요한 기능이네요. 고마워요.”

루시엘은 인형의 머리 위로 자신이 입고 온 숄을 둘러서, 얼굴을 가려 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인형의 존재를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테니까 일단 숨겨야 했다.

“이리 와. 나랑 가자.”

“네.”

지켜보던 에리카가 말했다.

“잠깐만, 안경도 씌우자.”

그러더니 그녀의 옷깃에 매달려 있던 두터운 뿔테 안경을 인형에게 씌웠다.

“좋아, 이제 됐다. 루시엘, 나중에 네 영지에서 봐.”

“응, 안 그래도 새로운 의뢰가 있어. 급할 건 없지만.”

“오, 그래? 기대되는걸.”

에리카는 새로운 보석이 있다는 소식에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 덕분에 일이 수월해질 것 같아. 아 참, 제르다 씨. 당신 형인 프리다 박사의 솜씨는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나요?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저와 적이 될 것 같아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형과 대적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루시엘의 이야기에 제르다도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과거에는 그렇게 악하진 않았었거든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프리다 박사가 그들과 손잡고 악한 일에 가담했다면, 제르다 씨의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루시엘의 솔직한 뜻을 들은 제르다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랑 갈라선 사이라고 해도, 아직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를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어요. 제르다 씨에게는 둘도 없는 형제니까, 그건 당연해요.”

루시엘이 그를 위로하자, 에리카도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은 이동포탈을 만들어 인형을 아기 영지의 별장으로 곧장 옮겨 놓았다.

이곳은 자신과 키제프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니까 가장 안전하게 인형을 둘 수 있었다.

그러곤 인형의 허리띠에서 가넷을 꺼내 멈추었다. 곧바로 이동하기 위해 포탈을 열려 하는데 문득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로 시선이 닿았다.

‘잠깐 키제프가 일하는 것만 보고 가야지.’

반지가 열어 준 초록색 빛무리 안으로 슈욱 들어가자, 키제프의 집무실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높다란 책장으로 이동해서,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은 키제프의 옆모습이 보였다.

금테 안경을 쓰고 서류를 검토하는 키제프의 얼굴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일에 집중할 때는 저렇게 인상 쓰고 있구나.

그에게 말을 걸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재무관이 서류를 한 뭉치 가져왔다.

“소공작님, 여기 이 부분 다시 검토하셔야 합니다.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은 들쑥날쑥하니, 최근 수익만 보고 짜시면 곤란합니다. 특히, 이브나크는 과거에는 거의 죽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으니 보수적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음, 내 생각은 다르네. 이브나크는 이제 시작이야. 점점 영지 수익이 높아질 거야.”

“예? 대체 무얼 믿으시고 그렇게…….”

미리엄 자작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키제프가 안경을 벗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아내. 무엇보다 나도 유리공예 사업을 유망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장려할 생각이네. 차후 관광과 연계도 할 수 있고 무궁무진하지.”

“허, 유망하다고 해서 예산을 그렇게 책정하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를 볼까 두렵습니다.”

“미리엄 자작이라고 했던가. 자네가 재무관을 맡은 지 몇 년이 되었나?”

“이, 이제 5년 차입니다.”

미리엄 자작이 뜬금없다는 듯 묻자, 키제프가 답했다.

“자네야말로 시황을 다시 살펴보고 말하면 좋겠군.”

키제프가 최근의 영지 수익을 예측한 자료가 담긴 상자를 끌고 왔다,

“어떻게 일에 손을 댄 지, 며칠밖에 안 된 나보다 전망을 못 보나? 자네야말로 이걸 검토하고 다시 논의하지. 나가 보게.”

키제프의 붉은 눈이 구르며 냉담하게 말했다. 몇 권 펼쳐 보니 키제프의 말대로였다.

“……아, 알겠습니다.”

미리엄 자작은 얼굴이 벌게져서는 상자를 힘겹게 끌고 나갔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루시엘은 조용히 그를 구경하며 생각했다.

‘키제프, 제법인데. 멋있어.’

짧은 시간에도 벌써 잘 적응하고 있구나.

한 발 한 발 성장하는 키제프를 보고 있노라니, 루시엘도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를 응원해 주고 싶은 만큼, 자신도 그의 곁에서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키제프가 서류를 덮고는 책장이 있는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왔다.

“이제 나와도 돼. 루시엘.”

“앗……. 알고 있었구나.”

조금 전의 차갑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루시엘이 잘 아는 표정이었다.

“잠깐, 아기 영지에 인형을 두러 왔다가 남편 얼굴 보고 갈까 해서 들렀어.”

“그랬군. 인형은 어떻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해. 나중에 보여 줄게.”

“기대하지. 그리고 루시엘. 앞으로 매일 들러 줘. 짜증 나는 순간에도, 널 보면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키제프가 눈을 곱게 접으며 책장에 비스듬히 기댔다.

“생각나면 올게. 근데 아까 그거 정말이야? 나를 믿고 유리공예를 장려하겠다는 말?”

“당연하지. 그거에 대한 계획도 고민하는 중이야. 다음에 네 의견을 구할지도 몰라.”

“그런 거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루시엘, 너와 함께 걸어갈 미래. 기대하고 있어.”

“나도 그래. 앗, 나 이제 다시 돌아가야겠어. 마차랑 기사들이 장난감 상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정말로 얼굴만 보러 온 거야.”

“와 줘서 고마워. 루시엘. 힘이 나는군. 노아에게 너무 눈길 주지 말고.”

파앗.

그의 말에 미소를 머금은 루시엘이 이동포탈을 생성했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전, 루시엘이 손을 흔들자 키제프도 웃으며 손을 들고는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 가.”

“키제프.”

그대로 가려던 루시엘이 키제프를 부르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시엘이 까치발로 발돋움하면서 그의 뺨에 뽀뽀하고는 이동포탈 안으로 쏙 사라졌다.

혼자 남은 키제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 뺨을 어루만졌다. 이동포탈로 뻗은 손이 무색하게도 루시엘은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따라갈 뻔했군.”

잠시 후, 똑똑 문을 두드린 엘링턴이 들어와서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소공작님. 아가 마님 없다고 책장이랑 대화 나누고 계신 겁니까? 얼굴은 또, 왜 발그레해지신…….”

“아,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가.”

키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엘링턴에게로 다가갔다.

“여기 누락된 건이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 주시죠.”

“그러지. 근데 아버지는 언제 귀환하시는 거지?”

서류를 재차 확인한 키제프가 슬쩍 시계를 보며 물었다.

“……아, 각하께 못 들으셨습니까. 레오니 도련님의 학술원 입학 설명회에 참관하신다고, 오늘은 휴직하신답니다.”

“아, 그게 오늘이었다고? 그런데 가주도 휴직이 있나?”

“……. 그거에 대해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야근 확정이십니다.”

아무래도 일부러 제게 말씀을 안 하시고 간 듯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아닌 동생 레오니의 일 때문이니까 참기로 했다.

루시엘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에 버금가도록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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