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길리아트와의 통신을 마친 루시엘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카일라가 왜 갑자기 움직였을까요.”
고민하는 루시엘의 어깨를 붙잡은 이벨린이 추측했다.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 무언가 정보를 얻지 않았을까 싶구나.”
“맞아요.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에요. 크리스털 페어리. 어쩌면 저에 대해 알아차린 게 아닐까 싶어요.”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녀에게 정보를 줄 사람이라면 둘로 좁혀졌다.
크루거 백작, 혹은 프리다 박사.
그들이 황도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 쪽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동태를 살피는 게 좋을 터.
“그럼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지.”
“맞아요.”
루시엘이 이벨린과 눈을 맞추고는 캐서린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아가 마님?”
조급해진 루시엘과는 다르게 그녀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캐서린, 베아트리체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하셨지요? 혹시 잠깐 다시 그곳에 들어가실 수도 있나요? 페넬로페와 흑발을 한 여자가 드나드는 흔적이 잡혔다고 해요.”
캐서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다시 단기로 잠시 근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좋아, 잘됐어요. 그러면 베아트리체로 잠입하셔서 페넬로페나 그쪽 일행이 나타나면, 통신구로 알려 주시겠어요? 제가 언제든 순간이동으로 갈 수 있도록이요.”
“알겠어요. 아, 이동하시는 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황금 열쇠가 있으니까요.”
캐서린이 눈을 곱게 휘며 답하자, 루시엘은 안심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벨린이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나도 베아트리체에서 풀코스로 관리를 받으러 가야겠구나. 들를 곳이 좀 있거든.”
이벨린은 몇 개의 파티 초청장들을 주르륵 펼쳤다.
“허영심 많은 페넬로페라면, 이런 파티에도 오지 않을까? 그쪽 파티들을 쭉 돌면서 나도 정보나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보마. 루시엘.”
“우와! 아무래도 사교 시즌이니 그것도 좋겠어요. 할머니.”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자, 캐서린도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완벽하게 단장해서 모시겠습니다. 대부인.”
“그럴까. 하기야 자네만 한 이가 없다니까. 그럼 다들 움직이자꾸나. 루시엘은 어디부터 갈 거니?”
나긋하게 웃은 그녀가 루시엘에게 물었다.
“저는 제르다 씨의 장난감 상점부터 가야겠어요.”
“그래, 가장 시급한 것부터 다녀오렴. 차근차근히.”
이벨린이 루시엘에게 드래곤의 가호를 걸어 주고는 볼 키스를 했다.
“아 참, 내일은 황성에 입궁 요청을 넣어 두었으니 같이 가자꾸나.”
“좋아요. 저도 황녀님을 만나러 가야 해요. 할머니.”
루시엘은 대답한 다음, 캐서린에게 부탁해서 빠르게 마법 매거진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벨슈타인에서 입었던 드레스보다 한결 가벼워진 소재라 소매와 스커트 자락이 나풀거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루시엘은 캐서린과 이벨린이 마차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제 우리도 출발할까요.”
“예, 아가 마님.”
루시엘이 호위 기사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고,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노아가 마차 문을 열고 루시엘을 에스코트해 주었다.
“고마워, 노아. 세 사람은 잠시만 어디 다녀오셔도 좋아요.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루시엘이 말했지만 챈들러와 이네스, 노아까지도 고개를 흔들었다.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저희 걱정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십시오.”
루시엘은 마지못해 웃으면서 장난감 가게의 입구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제르다 대신에 에리카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꺄악! 왔구나, 루시엘.”
“에리카 언니! 연애하더니 예뻐졌네.”
“히힛, 그런가? 우리 루시엘이야말로 오늘도 눈이 부시구나. 얼른 들어와.”
두 사람은 반가워서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에리카의 어깨에는 윌슨이 올라앉아 있었다. 언제나 제르다 씨의 곁에 있던 인형이 그녀에게 있는 걸 보니, 두 사람의 가까운 사이가 실감이 났다.
“어서 오세요, 루시엘 님. 인형은 여기 있습니다.”
안에서 제르다가 걸어 나오면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소녀를 루시엘에게 소개했다.
“제르다 씨, 안녕하세요. 와…….”
거울을 보는 듯 저와 똑같은 존재에 루시엘은 잠시 숨을 멈췄다.
머리카락, 진홍색의 맑은 눈동자, 키와 체구까지도 너무나 사람과 똑같았다.
“인형이 아니라, 진짜 저 같잖아요.”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루시엘과 눈이 마주친 인형이 그녀를 보았다. 그러곤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쥔 채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루시엘이에요.”
“……!”
인형의 말에 진짜 루시엘은 깜짝 놀라서 눈을 댕그랗게 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워.’
“안녕…… 루시엘?”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인형에게 다가가 인사하고는, 그녀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가넷으로 만든 분신과는 다르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제, 제르다 씨……. 이건 정말 저 같아요. 너무 완벽해서 믿을 수가 없어요.”
“아직 완벽한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보석에 깃든 마나를 사용했지만, 인형의 마나 심장에 아직 마나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루시엘 님의 마나를 직접 연결하면 더 좋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혹시 가넷이 조금 더 있을까요?”
인형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가방에서 가넷이 든 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다.
“네, 여기요.”
에리카도 인형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루시엘, 진짜 굉장하지?”
“응…… 이건 정말 말도 안 되게 대단한 솜씨야. 기대 이상이야! 잃어버린 내 쌍둥이 같아. 두 사람, 정말로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
이 인형과 제 분신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루시엘은 심장이 쿵쿵 울렸다.
* * *
“갈리우스 백작, 협조해 주어 고맙군.”
“보수를 많이 주신다니, 움직인 것뿐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갈리우스 백작은 엘링턴을 통해서 할 일이 있는지를 종종 물어 오곤 했다.
그만큼 벨슈타인과의 유대가 깊어졌다는 것을 뜻했기에 공작은 보수를 아끼지 않았다.
돈보다는 재능 있는 자를 곁에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이익이었다.
얼음의 제단을 복원하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갈리우스를 불러 일부 무너진 제단의 설계도를 다시 파악해, 공작을 비롯한 벨슈타인의 인력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얼음의 제단 앞에 펼쳐 놓은 천막 아래에서 대기하던 아르제온이 불만을 내뱉었다. 얼음의 마녀가 입었던 것과 흡사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는 제법 여자 같았다.
뾰족한 유리구두를 바닥에 내팽개친 그는 에라 모르겠다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르제온의 단장을 맡은 시녀가 기겁했다.
“마님의 드레스를 빌려 온 것이니 조심해 주세요.”
“……그래서 난 언제 들어가면 되는 거지?”
얼음의 제단에 붙잡혀 있던 걸 생각하면, 아주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아르제온에게 공작의 서늘한 시선이 슥 닿았다.
“지금 들어가도 좋다.”
“……딱 봐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들어가라는 건 그냥 죽으란 건가.”
아르제온이 꿍얼거렸다.
여장한 아르제온을 슥 훑어 내린 길리아트는 웃음을 참으며 그 모습을 영상구로 담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르제온. 마탑 사람들이 이걸 못 보는 게 한이로군.”
제 놀림에도 아르제온이 별 반응을 안 보이자, 길리아트는 공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얼음의 제단 전체를 둘러보며 가늠하는 중이었다.
복원 마법은 아주 강력했기에 그와 길리아트, 마도사들이 함께 구현해야만 해서 여기 온 것이었다.
“루이비드, 제단 복원 작업은 거의 마무리되고 있으니, 너는 그만 돌아가도 되겠구나. 가주의 일에 다시 집중해라. 최근 성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니.”
길리아트가 노파심에 말했다.
“가주 대행인 키제프가 있잖습니까. 그 녀석, 드락카에 다녀온 후로 확실히 어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작은 최근의 키제프를 떠올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일에 매진하는 꼴을 보면서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고집불통이라 어차피 듣지 않을 거다.
제 아들놈이 자신을 몹시 닮았다는 걸 깨달은 터였다.
“그건 반드시 지킬 대상이 생겼기 때문이겠지.”
“루시엘의 안위가 곧 벨슈타인의 평화가 될 겁니다.”
“그 점은 나도 동감한다.”
공작과 길리아트 두 부자가 입매를 틀며 웃었다.
“나는 폐지하도 쪽으로 이동해 보아야겠군. 카르한 대공자가 무언가를 알아냈을지도 모르니까.”
“저도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레오니가 진학할 예정인 학술원에 학부모 참관 설명회가 갑자기 잡혀서. 오늘은 꼭 가야 합니다.”
솔리아페는 키제프의 마법 아카데미 생활이 어두웠다는 걸 뒤늦게 알고, 죄책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무늬만 명문이 아닌 제대로 된 학교를 알아보겠다면서 수소문해서 찾아낸 것이, 브랑카르 학술원이었다.
마법뿐 아니라 검술, 역사, 지리, 경제, 등 전반적인 교양을 두루 쌓을 수 있고 학식 있는 선생들이 모인 곳이라 새롭게 떠오르는 학원이라고 했다.
더욱이 레오니는 루시엘이 오기 전까지는 선생들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었다.
요즘에는 얌전해졌지만 그렇다고, 학습에 아주 집중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차라리 여러 아이와 어울리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나을성싶었다.
“오냐. 바빠도 아비 노릇은 해야지.”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공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가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공작이 정색하며 말했고 둘은 또 한바탕 말다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