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별궁을 나선 루시엘은 본성의 회랑을 걸어가다가 에바와 사용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에바가 말했다.
“큰 마님께서 각별하게 신경 쓰시는 행사이니 모두 준비에 부족함이 없어야 할 거야.”
“물론이지요. 어서 6월이 되면 좋겠어요. 공작성 사람 모두가 기대하는 축제니까요.”
“……맞아요. 아아, 보고 기뻐하시면 좋겠는데.”
무슨 일인지 자세히 듣지 않아도 루시엘은 알 것 같았다. 가족들뿐 아니라 이 성의 다른 사람들도 기대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준비하는 과정을 다들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 정말 사랑받고 있어.’
그들에게 크게 해 준 것도 없는데 과분할 정도로 말이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지?
그렇기에 루시엘은 더 고민이 되었다. 벨슈타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가 마님이 오신 후로 벨슈타인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 되었지.”
읊조리던 에바가 주변을 두리번거려서 루시엘은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루시엘은 에바와 사용인들이 모두 지나간 다음에야 기둥에서 길로 나왔다.
‘베시도 그렇고 오늘따라 다들 감동을 주는걸.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었어. 항상 고마워요.’
양 볼에 홍조와 함께 미소를 띠면서 루시엘은 에바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도, 가족들도 연회를 기다리고 있다니 취소하자고 하기에는 좀 망설여졌다. 회랑을 나와서 중정의 꽃밭을 조금 걸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풀과 꽃내음이 솔솔 풍겨 왔다.
구두 앞코로 바닥을 콩콩 두드리면서 루시엘이 뒷짐을 지고 서성거리다가 서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땐 키제프랑 상의해야겠지?”
루시엘이 키제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턱을 괴고 앉아 배시시 웃었다.
이내 그녀의 뒤로 키 큰 그림자가 슥 드리워졌다.
“……뭐든 남편이랑 상의해야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의 목에 팔을 둘러서 왼쪽 어깨를 감싸듯 뒤에서 가볍게 안았다.
“……엇, 키제프?”
루시엘은 반가우면서도 살짝 놀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단단한 팔뚝이 닿는 곳에서도 맥이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볼을 붉힌 루시엘이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키제프의 팔이 무거워서 그녀는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다.
그는 말없이 루시엘을 뒤에서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시 쉬러 온 새 같아서 루시엘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키제프가 앓듯이 말했다.
“네 품에 있으니까 기운이 나.”
“……많이 지쳤구나?”
“응. 아버지를 이제부터 존경하기로 했어.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키제프가 고개를 끄덕여서 그의 부드러운 금발이 루시엘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러고 보니 어제와 그제는 그가 별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하느라 날 샌 거였구나.
“힘들어 보이는데 저기에 앉을까?”
루시엘이 의자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상의할 일은 무엇이지?”
“아, 나 황도에 다녀오고 싶어. 제르다 씨와 에리카 언니에게 맡긴 의뢰 결과를 확인하러.”
“인형 말인가.”
“응. 그리고 클로디아 황녀님도 만나려고. 레이놀드 황자가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도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루시엘은 아까 그 기사를 보여 주면서 현상범 베어 그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키제프의 붉은 눈이 구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나랑 같이 가.”
“키제프는 이제 정무를 돌보아야 하잖아. 지금도 그렇게 철야할 정도로 힘들면서.”
“그래도 널 지키는 일이 훨씬 중요한걸.”
“나 이제 그렇게 약하지 않아. 호위 기사들도 있고, 권속도 있는걸.”
루시엘은 권속 이야기를 하면서 키제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르제온과 권속의 계약을 맺은 걸 알면, 뭐라고 할까.
“이제 권속이 둘이나 생겼으니 괜찮나.”
“……앗, 할아버지께 들었구나. 미안, 그치만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래, 머리로는 납득해 보려 노력 중이야…….”
그의 눈빛이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가라앉았다.
“그리고 베시에게 전해 들었는데, 내 생일과 우리 결혼기념일로 연회를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어.”
“……그거야 당연히.”
그러나 루시엘이 고개를 살짝 흔드는 바람에 은발이 살랑 바람에 나부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그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모두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마음도 정말 고맙기는 해.”
루시엘의 말을 전부 들은 키제프도 찬찬히 생각했다.
“그렇군. 루시엘,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황도에 가서 어쩌면 더 빠른 해결 방안을 찾을지도 몰라.”
“그럴까.”
“루시엘, 너에게는 특별한 기적이 곧잘 일어나곤 하니까. 그리고 나도 기대하고 있어. 너의 열다섯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키제프의 눈이 사뭇 진해지며, 루시엘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엮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다른 은빛 팔찌를 보고를 보고는 흠칫 굳었다.
“잠깐. 이 팔찌는 누가 준 거야?”
“아, 그건…… 두 번째 권속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루시엘이 대답하자 키제프가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당장 그 자식 통신구 사 줄 테니까 이건 빼자.”
“…….”
키제프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듯해서 루시엘은 대답을 못 했다.
‘가끔 조금 무섭잖아, 키제프.’
이러다가 키제프가 화염 브레스를 뿜을 것만 같아서 루시엘은 주머니에서 성수와 다이아몬드를 꺼내 보여 주었다.
“남편 쌓인 피로, 내가 다 날려 줄게.”
루시엘이 맑게 웃자 열이 올라 있던 키제프도 이내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고마워.”
“…….”
낯간지러운 호칭을 주고받으니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게졌다. 루시엘이 그에게 말했다.
“빨리 누워. 치유하게.”
“……응.”
키제프가 그녀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누워서 힐긋 바라보았다. 포근함에 금세 그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루시엘의 다이아몬드에 퍼져 나간 빛들이 어느새 키제프의 몸을 감싸며 피로를 말끔히 날려 주었다.
* * *
루시엘의 황도행이 바로 결정되었다. 집안 어른들이나 키제프 없이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빠르게 볼일만 보고 이동포탈을 이용해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대신에 캐서린과 호위 기사들은 동행하기로 했고, 만일에 대비해 루시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족들이 곧장 워프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다.
“길지 않을 거예요.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루시엘. 금방 다녀오려무나. 도착하면 통신하고.”
길리아트가 노심초사하며 말했고, 이벨린은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서 타운하우스까지 결국 따라왔다.
단숨에 길리아트의 생성한 이동포탈을 통해, 모두가 같이 이동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던컨 집사장이 달려와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바로 쉬실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응대해 주었다. 그러나 이벨린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할머니, 저 잘 도착한 거 보셨으니 이제 돌아가서 쉬세요.”
“루시엘, 아무래도 너만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잠깐 이리 와 보렴.”
“네.”
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루시엘을 데리고 단둘이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달칵 닫았다.
“실은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거든.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우고, 뱀이 우글거리는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단다.”
“……아, 꿈은 꿈일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다가오는 네 연회에 필요한 물건도 살 겸 나도 황도에 머물러도 된단다.”
“아…… 할머니. 모두에게 정말 감사하고 또 죄송하지만,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생일 연회를 미루어도 될까요? 홀가분하게 생일을 맞이하고 싶어요.”
루시엘이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이벨린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이런, 우리 어른들이 욕심이 많았구나. 루시엘 네 의견이 정 그렇다면 알았다. 그놈들을 지옥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때까지 기다리마.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왕이면 그 전에 끝났으면 좋겠구나.”
“저도 빨리 일이 해결되길 바라요.”
“그래도 줄 것은 주고 싶구나, 우리 루시엘은 갖고 싶은 것이 있니?”
루시엘은 눈동자를 댕구르르 굴렸다.
“갖고 싶은 건 없어요. 이미 다 가졌으니까요. 대신에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중에 다 같이 섬으로 가족 여행 가서 바다도 보고 배도 타요, 할머니.”
상상만 해도 신이 나는지 루시엘이 이벨린의 양손을 꼭 잡고 말하자 그녀도 사르르 눈을 곱게 휘었다.
“……그거 좋구나. 예쁜 바다가 있는 섬에 네 이름을 붙이고, 별장도 짓고, 배도 타고. 꼭 그러자꾸나. 루시엘.”
루시엘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벨린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때 루시엘의 통신구가 빛났다. 열어 보니 길리아트였다.
“할아버지! 잘 도착했어요.”
―루시엘, 브로치의 기록과 이동포탈을 사용한 흔적이 여럿 잡혔다. 폐지하도에도 영상석을 설치해 두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여자요?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검은 머리에 창백한 하얀 낯을 가진 젊은 여자더구나. 이동포탈의 존재를 아는 자는 없을 텐데.
길리아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혹시 카일라 황비가 아닐까요. 그동안 마계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난 이유, 죽었던 황비가 새로운 몸을 구하기 위해서였던 건지 몰라요. 그렇다면 과거 죽었던 그녀가 제 유모인 힐다 볼라디로 나타났던 것도 설명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건 추측일 뿐. 그 검은 머리 여자를 직접 만나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황도에서 마주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들이 베아트리체에 드나든 흔적이 있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카일라 황비까지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제 정말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