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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19)화 (219/282)

<219화>

“일이 귀찮게 되었군.”

레이놀드는 가지런하게 빗어넘긴 흑발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면서,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여자는 추종자 중 하나로 그저 그런 마력을 가진 신관이었다.

갈수록 나약해지는 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녀의 것이라도 흡수해 보려고 했으나 저 계집은 다른 뜻을 가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동안 제게 매달린 여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몇 달 후, 황성으로 귀환하면 더 많아질 터였다. 수가 많아져 봐야 소용이 없다.

전설 속의 요정, 살아 있는 보석과 마나의 원천. 크리스털 페어리. 그것만 구하면 자신은 제국을 손에 넣을 막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저를 얕보는 벨슈타인 공작의 성부터 쳐부순 다음, 그 건방진 공자 놈의 아내부터 빼앗아야겠다.

아니, 그놈이 보는 앞에서 그 아이를 괴롭혀 주면 어떤 반응일까.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광기 서린 보랏빛 눈을 휘면서 레이놀드가 미소를 가득 베어 물다가 이내 서늘하게 여자를 내려다보며 밖에 있는 다른 신관들을 불렀다.

조금 전까지 광기 어린 모습이었던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선량한 표정을 꾸며 내며 레이놀드가 말했다.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카리나 신관이 술에 취해 제 방을 찾아오더니, 나가지 않고 저렇게 쓰러져 곤란합니다. 그녀를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카리나 신관이 술까지 먹고, 그런 짓을. 맙소사,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겠습니다.”

신관들이 카리나를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아무리 신전에서 유폐 중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황자였다. 카리나는 그런 이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신관으로서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여자다. 윗선에 보고되면 재판으로 넘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레이놀드는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그녀는 그동안 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딱히 문제가 될 이야기를 흘린 적은 없었지만, 만일을 대비하는 게 좋을지 몰랐다.

레이놀드가 금화를 슥 내밀며 말했다.

“평소에 사연을 듣자 하니 가여운 여자더군요. 이걸 줄 테니 그녀의 죄는 사하여 주시지요. 주신 레트라논께 감히 청하건대 저의 평안한 밤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런. 레이놀드 황자께선 너무 자애로우십니다.”

“어서 그녀를 데려가 쉬게 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신관들이 그녀를 데려가자, 레이놀드는 한숨 돌리며 동그랗고 푸른 마도구에서 나오는 미량의 마나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효과가 너무도 미미해서 마시나 마나였다.

‘그때 약제사가 발명했다는 마나 영양제라도 구하면 좋겠는데…….’

그건 지상으로 내려가야만 구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지상에 가고 싶은 갈망만 더해졌다.

그때, 침대에 누운 레이놀드의 방 창문으로 새까만 종이학 하나가 들이닥쳤다.

“어머니!”

검은 종이학을 펼치고 불을 붙이자, 붉은 글씨가 허공에 천천히 나타났다.

「우리 아드님의 귀환 선물이 생겼군요. 우리가 찾던 크리스털 페어리가 바로 그 벨슈타인 공자비였답니다. 곧 북부에 천공섬 아스트리야가 닿지요? 신전의 이름을 빌려, 벨슈타인이 거절할 수 없는 명목도 있으니 그야말로 좋은 기회지요. 환영회에서 그 계집아이를 사로잡으세요. 그동안 지나간 세월이야 아깝지만, 이제부터 잘해 나가면 된답니다. 곧 우리의 세상이에요.」

레이놀드가 서신을 다 읽어 내리자, 검은 종이는 활활 타올라 재가 되었다.

“하…… 잠깐. 그 자그맣고 하얀 공자비가 크리스털 페어리였단 말이지?”

레이놀드의 자안이 촛불처럼 마구 일렁였다. 어쩐지 그것을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계속 눈이 가더라니. 제 촉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벨슈타인 공자비, 루시엘이 크리스털 페어리였어.”

하도 충격적인지라,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던 레이놀드가 이제는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재밌군그래, 차라리 잘되었군. 벨슈타인 공자, 네놈을 짓밟고 네 아내는 내가 반드시 차지하겠다.”

레이놀드는 제 손에 크리스털 페어리가 들어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퍽 달콤해졌다.

* * *

“……이제 맘껏 마신 거지?”

“아직 부족하다. 그때 얼음 심장 크기 봤잖느냐. 내 마나를 담는 그릇이 그만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르제온이 마나를 충분히 주면, 얼음의 제단으로 떠나겠다고 해서 루시엘은 그에게 붙들려 제 마나를 나누어 주는 중이었다.

권속이 하나일 때는 괜찮았는데, 둘이나 되니까 마나가 두 배 이상 소모되었다.

아까 마나 영양제를 먹어 두지 않았더라면, 숨이 가빴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마나가 쪽쪽 빨리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에 루시엘은 아르제온에게 제안했다.

“저기, 오늘은 이거 줄 테니까 그만 마시는 게 어때?”

루시엘이 내민 것은 그녀의 마나가 잔뜩 머금어진 보석들이었다. 그러나 아르제온이 잠시 머뭇거리며 미안해했다.

“내가 귀중한 보석을 받아도 되는 건가. 마나를 주는 거로도 충분한데…….”

“……내 마나도 귀중하거든? 보석에도 마나가 잔뜩 있으니까, 가지고 있음 도움이 될 거야.”

“알았다. 고맙다. 루시엘.”

“그럼 잘 부탁해. 무슨 일이 생기면 근데 어떻게 연락하지?”

루시엘의 물음에 아르제온이 은빛의 팔찌를 다시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채웠다.

“내가 너의 권속이 되었으니, 이걸 통해 전언이 가능하다. 아니면 나도 통신구 하나 만들어 주면 좋은데.”

내심 통신구가 부러웠던 모양인지, 아르제온이 루시엘의 통신구를 힐끗거렸다.

“이번 일 잘하고 오면 선물로 해 줄게.”

그러자 아르제온이 싱그레 웃으면서 창문을 열고 별궁의 테라스로 나가더니 이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말…… 가끔 보면 애를 상대하는 것 같아.”

루시엘은 별궁 응접실의 소파로 들어가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베시에게 차를 요청했다.

푸른색 그러데이션이 바다처럼 새겨진 예쁜 유리 포트와 유리 찻잔이었다.

베시가 찻잔 위로 하얀색 꽃을 몇 송이 넣고는 포트를 들어 찻물을 쪼로록 부었다.

투명한 분홍빛 찻물이 닿자 꽃망울들이 하나둘씩 피어났다.

“예뻐라.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차를 여유롭게 즐기는 거 같아. 고마워, 베시.”

“아가 마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루시엘은 코끝에 퍼지는 꽃향기와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젖었다.

몸은 느긋하게 앉아 있지만, 머릿속은 이리저리 빠르게 굴렀다.

‘얼음의 제단과 블루 익스큐션의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황도로 가야겠어.’

루시엘이 황도로 향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르다의 마법 장난감 상점으로 가서 인형의 연구 상황을 보는 것, 그리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클로디아를 만나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황자의 귀환이 확정된 상황이라면, 현재 클로디아 황녀의 입지를 마지막으로 더 각인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신문을 뒤적거리던 루시엘은 한 현상범의 기사를 발견하고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제국의 치안을 위협하는 강도, 베어 그린즈가 그동안 각 마을을 돌며 불법 통행료로 착취한 돈을 들고 3년째 도주 중이다.」

‘아, 이 사람. 나중에 어디서 붙잡히는지 알고 있어. 클로디아 황녀님이 이자를 잡아서 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 제국민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굴리면서 부지런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베시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 마님, 에바 집사장님과 솔리아페 마님, 큰마님께서 다가올 연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시는데요. 알고 계시지요?”

“……응? 갑자기 무슨 연회?”

루시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는 눈을 깜빡이자 베시가 말했다.

“아가 마님 생일이 돌아오잖아요. 그리고 두 분이 오랜만에 결혼기념일을 함께 맞이한 날이기도 하고요. 결혼 5주년인가요? 아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요. 결혼하실 적에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하세요?”

어느새 베시는 5년 전 루시엘의 결혼식을 회상하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이벨린 큰마님도, 솔리아페 마님도, 모두 기대가 크세요. 이번 연회를 얼마나 아름답게 꾸미실 계획인지 저도 기대가 되네요.”

“아……. 생일과 결혼기념일.”

둘 다 중요하고 기쁜 날이지.

맞아, 좋은 날이야.

하지만 지금의 루시엘에게는 당장 레이놀드 황자의 귀환 소식에 대처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이건 내가 모두에게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는걸. 사정을 알고 계시니 이해해 주실 거야.’

어느새 루시엘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베시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안아 주었다.

“아가 마님께 중요하고 커다란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마음에 부담을 가지면 좋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도요. 저는 언제나 조용히 응원할 테니까, 아가 마님 뜻대로 하시면 좋겠어요. 무엇이든요.”

누구보다 가족처럼 루시엘을 곁에서 돌봐 준 그녀였다. 그러니 루시엘의 마음도,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도, 무슨 일을 바쁘게 준비한다는 것도 전부 눈치챘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항상 믿고 보듬어 줘서 고마워.”

루시엘이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심장 한편이 따스해서 감동으로 토파즈를 만들어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아가 마님, 오랜만에 이렇게 아기처럼 우시네요. 코가 새빨개졌어요.”

베시가 그녀의 옷에서 나듯 은은한 비누 향이 나는 손수건으로 루시엘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베시 말대로 나는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 그래서 그게 다 끝나면 그때 정말 마음 편하게 행복해할래. 베시도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 줘.”

‘그때는 전부 말할게.’

루시엘은 그녀에게 받은 감동에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 내며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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