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분홍색 통신구를 얼른 펼치자 반가운 에리카의 얼굴이 비쳤다.
“에리카 언니, 기다렸어.”
―루시엘. 통신이 조금 늦었지? ……작은 일이 하나 생겨서 말이야.
에리카는 어쩐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작은 일? 근데 언니 지금 어디야? 제르다 씨랑 연구는 잘해 가고 있는 거지?”
-으응, 그게.
루시엘의 물음에 머리를 짧게 자른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영상에 비쳤다. 그 역시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루시엘 님, 에리카 씨는 저와 함께 있습니다.
“……누구세요. 어? 잠깐만. 제가 아는 그 인형사 제르다 씨인가요?”
―예, 저 맞습니다.
아직 어색한 듯 제 머리를 매만지던 제르다가 웃었다. 말끔하게 머리를 잘라서 그런지, 그동안 답답해 보이던 인상이 확 달라 보였다.
“훨씬 보기 좋아요. 미남이셨구나.”
루시엘이 칭찬하자 에리카가 끼어들었다.
―그렇지? 거봐요. 자르길 잘했다니까.
에리카가 제르다를 보면서 친근하게 말하자, 눈치 없는 루시엘도 두 사람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
게다가 에리카가 제르다의 상점을 찾아간다고 했던 건 며칠 전 일이었는데 지금 함께 있다는 건…… 역시?!
“에리카 언니, 제르다 씨. 솔직히 말해 봐요. 두 사람 무슨 일 있는 거지요?”
그러자 두 사람 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더니 제르다 씨가 수줍은 기색으로 곰 인형 윌슨을 들어서 에리카의 뺨에 뽀뽀했다.
“……그렇게 됐어. 루시엘. 아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두 사람. 일하라고 연결해 줬더니 연애 사업을? 하지만 축하해.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이에요.”
루시엘은 진심으로 기뻤다. 두 사람이 잘 통하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못 했기에 더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게.”
에리카가 속닥거렸다.
“그건 그렇고, 인형 연구는 어때요?”
“아, 루시엘. 그건 황도에 와서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 직접 보여 주고 싶어!”
“네, 그게 좋겠습니다. 결과가 긍정적이라는 것은 미리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두 사람. 그럼 나도 이쪽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찾아갈게요. 에리카 언니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 수 있어?”
“……나 지난번 다녀간 후로 이번 주에 또 휴가 내고 왔어. 이번 주 내내! 그 전에 오면 좋겠다.”
에리카의 얼굴이 연구나 인형이 아닌 다른 이유로 저렇게 밝아졌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통신을 마친 루시엘도 두 사람이 함께 연구한 인형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사이에 아흰이 아기 영지로 돌아왔고, 루시엘은 그를 데리고 본성으로 들어갔다.
* * *
루시엘과 아흰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어른들도 카르한 공작가의 가보를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흰이 꾸벅 인사를 올리자, 길리아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귀한 가보를 혼자서 찾으러 다니다니, 그건 놈들에게 시간을 더 벌어다 주는 꼴이었다. 이제 같이 찾도록 하지.”
“막막했는데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기이한 이동포탈의 비밀이 이제야 풀렸군.”
“오히려 다행이지 뭐냐.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으면 분명 상대하기 성가셨을 터다.”
공작과 길리아트의 추측에 루시엘도 동의하는 바였다.
“맞아요, 할아버지.”
“카르한 공자는, 일단 가보를 찾을 때까지 공작성에 잠시 머물러도 좋다.”
“벨슈타인의 친절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잘됐어요, 아흰.”
폐지하도를 아흰에게 안내하는 몫은 검은 날개의 자르가 단장이 맡기로 했다.
자리가 파하고 아흰이 공손히 인사하고는 루시엘과 에바를 따라서 나가려 할 때였다.
공작의 서늘한 목소리가 아흰의 발목을 잠시 붙잡았다.
“카르한 공자. 잠깐 나 좀 보지.”
“옛.”
“일에 협력하는 대신 조건이 있다. 내가 원하는 걸, 구해 주면 좋겠군.”
“어, 어떤 걸 원하시는지요?”
공작은 쪽지에 적어 그것을 슬쩍 내밀었다. 아흰은 혹여나 공작이 엄청난 요구를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남부 카라비 해역의 일부 소유권이라거나, 여러 개의 보물섬 중 하나 혹은 커다란 항해선이라거나.
그러나 쪽지에 적힌 것은 뜻밖에도 매우 소소한 것이었다.
「노래하는 조개.」
남부 카라비 해역의 인어 섬 아래 깊은 바다에 자생하는 조개인데, 바다 깊은 곳의 아름다운 소리를 머금었다가 들려주어서 로맨틱한 선물로 유명했다.
“……구해 줄 수 있나?”
“예? 아,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아흰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이게 그렇게 유명하다길래. 부탁한다.”
루시엘과 솔리아페에게 선물할 생각에 공작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밤 류프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마검 블루 익스큐션의 봉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예상대로 위험한 물건이니 가장 높은 단계로 봉인을 해 두었다. 해제가 필요하면 다시 나를 불러야 할 거다.”
“고생했다, 류프델. 어서 이것부터 창고로 옮겨야겠군.”
길리아트가 봉인된 상자 안에 든 블루 익스큐션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류프델이 역시 최고예요.”
“미스릴 제련도 다 끝냈다.”
“앗, 정말이에요?”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던 미스릴 제련이 일찍 완료되었다니 그것도 잘된 일이었다.
“제련은 내가 완벽히 해 두었으니, 저 까다로운 광물도 다루기 쉬워졌을 거다. 다른 갑옷 제작자가 만들어도 충분할 테니, 이제 날 귀찮게 하지 말아라.”
“아, 알겠어요. 갑옷 제작은 따로 맡길 곳이 있다고 해요.”
길렌 백작이 알아 놓은 갑옷 장인이 있다고 해서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류프델, 저 좀 살리는 셈 치고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나 루시엘이 다른 일을 새롭게 맡기려 하니 펄쩍 뛰었다.
“망할. 늙은이를 왜 이렇게 부려먹어! 도대체 벨슈타인에서 의뢰하는 일들만 몇 개인지 모르겠군. 이 몸을 독점하려는 심산이냐!”
짜증을 부리는 그를 달래기 위해 루시엘이 보석을 한 움큼 내밀었다.
“류프델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잖아요.”
“커흠. 이 녀석아, 이거 하고 나면 나는 이제 쉴 거야. 안식년을 가질 거란 말이다.”
“하나만 더 하시고 푸욱 쉬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모종의 의뢰를 마친 루시엘은 길리아트와 함께 공작성으로 귀환했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별궁으로 데려다주고는 말했다. 별궁 응접실 내부는 왠지 공기에 냉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루시엘, 가짜 마검은 의뢰를 맡겼고, 무너진 제단을 복원하고 제단 내부의 마물과 처형자도 마법으로 비슷하게 꾸밀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어렵겠구나. 얼음의 마녀 말이다.”
길리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하자, 루시엘이 말했다.
“그건 얼음 속성을 지닌 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루시엘은 제 방으로 폴짝 들어온 아기 눈토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지, 아르제온?”
눈토끼가 귀를 쫑긋 세웠다가 앞발을 파르르 떨었다. 이내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스르륵, 변신을 푼 아르제온이 물빛 머리카락을 슥 넘기며 말했다.
“젠장. 루시엘, 어떻게 알아챘나…….”
“첫째로 여기 들어오자마자 너무 추웠고, 둘째로 내 진짜 눈토끼는 지금 아기 영지에 있거든. 노아가 데려다 놓았어. 그 뒤로는 여기로 데려온 기억도, 보고도 없었어. 그러니 동물로 변신 가능한 아르제온을 떠올릴 수밖에.”
루시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아르제온은 너무 빨리 들켜 버려서 시무룩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놈, 눈사슴 말고 눈토끼로도 가능했던 거냐!”
“……같은 눈이니까.”
길리아트가 도끼 눈을 하자, 아르제온이 해맑게 대답했다.
“아르제온, 아무튼 잘 만났어. 얼음의 마녀인 척 얼음의 제단을 지키고 있어 줘. 카일라 황비와 레이놀드 황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부탁해.”
“……가짜라는 걸 계속 숨길 수는 없을 텐데.”
“물론 그렇겠지만 눈속임이라도 좋아.”
“……그럼 나더러 지금부터 계속 거기에서 있으라는 건가. 나 혼자 외롭게 거기에서 썩으라고?”
아르제온은 마뜩잖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오랜 세월 힘을 잃고 있다가 되찾아서 나도 요양이 필요하다. 너의 맑은 마나를 마시면서 말이지. 그러기 위해선 네 권속이 되어야겠지. 넌 내 얼음의 힘을 쓸 수 있을 테고.”
“그러니까 요는 계약하잔 뜻이야?”
“그렇다.”
아르제온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루시엘은 길리아트를 쳐다보았다. 그간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에 루시엘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할아버지, 어쩌지요?”
“……책임은 내가 지마. 권속인지 뭔지 빨리 맺어라.”
“고맙다. 영원히 루시엘을 행복하게 해 주겠…… 우악.”
길리아트가 아르제온을 노려보며, 등을 걷어찼다.
“입조심해라. 내 아들과 손주가 언젠가는 널 죽일지도 모르겠다.”
길리아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르제온이 로브 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이날만을 기다렸다.”
아르제온이 제 심장에서 끌어모은 마나를 방출하자 삽시간에 주위가 얼어붙었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파앗.
그의 발밑으로 푸른빛의 마법진이 반짝이며 생성되었다.
아르제온이 루시엘의 손을 마주 잡자 이내 차가운 냉기와 함께 얼음의 감각이 루시엘의 마나와 맞닿아 이어졌다.
파아아!
순식간에 빛이 퍼지면서 루시엘도 찌릿한 냉기의 마나를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제 심장 어딘가에 차가운 인이 새겨진 것처럼,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르제온, 당신도 내 지팡이 안 보석에 들어갈 거야?”
“그게 가장 편하겠군.”
“알겠어, 피닉스랑 부딪치지 않기를.”
“보석이 따로라 상관없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피닉스가 그러했듯, 아르제온은 루시엘의 이노센트 지팡이에 박힌 사파이어에 깃들었다.
루시엘은 보다 강력해진 심장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피닉스와 권속의 계약을 맺었을 때처럼, 강력하고 차가운 얼음의 힘이 마나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두 번째 권속까지 얻었네.’
예전에는 아무 속성도 없다고 걱정했었는데, 루시엘은 뿌듯함을 느끼면서 사파이어에 깃든 아르제온의 강력한 얼음의 힘을 느꼈다.
그는 루시엘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