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평화로운 오후였다.
아기 영지의 별장 안 흔들의자에 앉아서 아기 눈토끼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던 루시엘은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한걸.”
루시엘은 토끼를 라탄 바구니에 올려 두고는 사뿐한 걸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보석이 들어 있는 방으로 향해, 마법 서랍을 확인했다.
서랍마다 가득 들어 있는 보석들을 확인하다가 따로 빼 둔 상자를 열었다.
가넷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밤새도록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떠올리며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인형을 연구하는 용도가 아니더라도, 요즘 제 분신과 친해지는 훈련을 하기 위해 가넷이 꽤 필요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제는 분신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몇 초면 사라지곤 했는데, 이제 5분 정도는 유지되었다. 지난번에는 분신을 대신 산책 보낸 적도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에리카 언니는 연락이 없네.”
제르다와 에리카가 만났다는 사실은 전해 들었는데, 이상하게 두 사람 중 어느 쪽에서도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았다.
괜히 재촉하는 것이 될까 봐, 루시엘은 일부러 먼저 통신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리카는 연구에 집중하면, 푹 빠지는 성격인지라 결과가 확실히 나오면 연락하곤 했다.
그래서 차라리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제르다 씨와는 아직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하긴 새로운 마법 인형을 제작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던 루시엘은 별장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마나 영양제가 올 시간인가?”
시클라인의 약제원에서 배달이 이쯤 오곤 했다.
얼른 나가 보니 등에 배달 가방을 둘러맨 갈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있었다.
오뚝하게 세워진 세모꼴의 가지런한 귀와, 장화를 신은 것처럼 하얀 발, 토실토실하고 몽글하게 솟아오른 털들이 귀엽고도 우아한 고양이였다.
목걸이에 비싼 보석이 박힌 걸 보니, 부유한 집의 고양이처럼 보였다.
“귀여운 고양이네. 혹시 그동안 나에게 약을 배달해 준 게 너였니?”
맑고 푸른 하늘색의 갸름한 눈동자를 빛내며 고양이가 냐옹 하고 길게 대답하듯 울었다.
루시엘은 배달 가방에서 마나 영양제가 든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고마워. 잘 가렴.”
루시엘이 대답하고는 별장 문을 열자, 고양이가 가지 않더니 불쑥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에 쿵 가로막히고 말았다.
“앗, 거긴 안 돼…….”
그러더니 퐁, 하고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연기가 가라앉자 이내 베이지색 정장에 하늘색 눈, 달콤한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당신은 낯이 익네요…….”
“구, 구면입니다.”
문학 살롱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 카르한 공작가의 공자 아흰이었다.
그때부터 훌쩍 자란 그는 루시엘 또래처럼 보였다.
따뜻한 남부 쪽 사람답게 온화하고 곱상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루시엘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였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아, 보다시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요.”
그가 싱그레 웃으면서 어물쩍 사라지려고 했다. 루시엘은 지팡이를 소환해, 그의 목을 겨누었다.
“미안하지만 당신 조금 많이 수상한데요. 목적이 뭐죠? 혹시 몰래 접근하려고 했나요?”
이 별장 안에는 루시엘이 만들어 낸 소중하고 강한 마력을 가진 보석들이 잔뜩 있었다. 외부에 알려지면 절대로 안 되는.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봉인석을 심어 놓아서 루시엘과 키제프 외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아, 사실 떠돌면서 찾고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찾고 있는 물건?”
“네, 가보를 하나 잃어버렸습니다. 강한 마력을 지닌 물건인데 저 안에서도 마력이 느껴져 혹시나 해 들어가 보려 했던 겁니다.”
“그럼 저를 의심한 거예요?”
“그, 그건 아니고 조사 차원에서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이 일은 공작가에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형님들 모르게 다시 찾아 놓아야 합니다.”
아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카르한 공작가는 남부인데 왜 북부의 벨슈타인에서 잃어버린 가보를 찾나요?”
“몇 년간 떠돌다가 어떤 상단 짐수레에 고양이로 숨어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부에게 한 가지 단서를 들었거든요.”
“단서?”
“비밀 이동포탈이 잔뜩 숨겨진 곳이 있다고요.”
“……비밀 이동포탈?”
루시엘은 아흰의 입에서 나온 그 이야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캐서린의 정보로 알아낸 폐지하도. 그곳에서도 이동포탈이 잔뜩 발견되었다. 제국의 주요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유용한 이동포탈이.
“네, 특별한 위치를 저장해 여러 개의 포탈을 한 곳에 수십 개씩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잠깐만, 당신이 그걸 어떻게…….”
“공자비도 알고 계십니까?”
“들어 본 적이 있어요. 가보가 정확히 어떤 물건이에요?”
“가호석인 이동포탈 스톤입니다. 고대 해저 왕국에서 구해 온 카르한 공작가의 가보지요.”
아흰의 말을 듣고 루시엘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 잃어버리신 건가요? 혹시 문학 살롱에 참석할 때 그걸 이용했어요?”
“……! 마, 맞습니다. 사실 그날 준비가 늦어져서 사용했는데…… 지각했지만 덕분에 황성에 갈 수 있었지요.”
루시엘의 기억에도 아흰은 그날 가장 늦게 도착했었다.
그렇다면 그때 황비가 아흰이 가지고 있는 가호석을 훔쳐 간 거였나?
“가호석은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 제 바이올린에 숨겨 놓았었습니다.”
“그럼 바이올린이 바꿔치기 당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마법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놓은 건지, 겉보기에는 똑같았지만 연주할 때 소리가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일단 그 이동포탈들은 벨슈타인 영지의 폐지하도에 잔뜩 깔려 있어요. 당신이 찾는 가호석을 발루크 상단에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거기로 저를 안내해 줄 수 있을까요?”
아흰이 간절한 하늘색 눈으로 부탁했다.
“좋아요. 하지만 이 일을 우리들만의 비밀로 할 수는 없어요. 저 역시 벨슈타인가에 이 사실을 밝혀야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카르한 공작가에도 밝혀야 할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아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보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카르한 공자.”
루시엘의 말에 아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공자비라고 계속 부르기엔 어색하군요. 제 이름은 아흰입니다. 이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봄바람이 마구 일렁일 것만 같은 벚꽃색 머리카락과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머리만 길면 여장을 해도 귀여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은 그에게서 어쩐지 다나나 마샤와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제 이름은 루시엘이에요.”
“고맙습니다, 루시엘.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이루어졌군요. 그날 루시엘의 글을 듣는 순간 친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녀 역시 선량해 보이는 아흰을 돕고 싶었다. 아직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니, 경계는 해야겠지만. 루시엘이 배시시 웃고 나서 말했다.
“그건…… 제 남편의 허락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우선 전략적 우호 관계라고 해 둘까요?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합니다.”
“잃어버린 가호석을 꼭 찾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손에 그런 굉장한 물건을 두면 위험하기도 하고요. 발루크 상단은 안 좋은 일을 꾸미고 있거든요.”
“카르한의 소중한 가보가 나쁜 일에 쓰인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크읏.”
아흰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퐁, 하고 고양이로 변신하며 발톱을 세웠다.
갸르릉!
그러고 나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앗, 죄송합니다. 격한 감정을 느끼면 고양이로 종종 변신할 때가 있습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하셔야겠어요. 아흰, 사람일 때 머리 색과 고양이일 때 털 색이 다르네요?”
“분홍색은 염색약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나저나 저렇게 자유자재로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으면……. 아흰도 정보원 하기에 딱이잖아.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그동안은 서로 영역이 달라 관심이 없었다지만, 북부의 벨슈타인과 남부의 카르한이 우호적인 사이가 된다면 서로를 지지하는 큰 힘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아흰, 우리 친구보다 더 발전적이고 좋은 거 할까요?”
“……네?”
“거래라거나, 계약이라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거죠.”
아흰은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그 순수했던 소녀의 얼굴에서 벨슈타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보았다.
무언가 계략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저, 잠깐…… 배달 가방 좀 반납하고 오겠습니다.”
아흰이 어색히 웃더니 퐁, 다시 고양이로 변신해 시클라인의 약제원을 향해서 얼른 달려갔다.
‘나 너무 노골적이었나?’
아흰이 사라진 사이에 루시엘의 통신석이 반짝 빛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