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다음 날 아침.
루시엘은 푹 자고 일어나 여느 때처럼 단장을 마쳤다. 키제프는 이미 별궁을 나섰는지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맑은 날씨에 아침 산책이나 해 둘 요량으로 가볍게 정원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고서적을 옆구리에 잔뜩 끼운 채 걸어가는 키제프의 너른 등이 저 멀리 보였다.
“……!”
루시엘은 그에게 반갑게 다가가 곧장 아는 체를 하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키제프 앞에 나타난 그림자에 얼른 몸을 숨겼다.
아란티아가 키제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루시엘의 심장이 다시금 일렁였다. 다시 자수정을 만들어 낼 것만 같았다.
“키제프…… 오랜만이네. 나야, 아란티아.”
아란티아가 밝게 웃으며 다가가자 키제프의 얼굴이 한겨울 벌판처럼 얼어붙더니 서늘하게 답했다.
“……이름 말고 벨슈타인 공자로 불러.”
“응?”
“나는 당신에게 이름 허락한 적 없는데.”
차갑게 쏘아붙이는 태도에 아란티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왜 그러니? 나, 나는 너를 만나러 드락카에서 여기까지 멀리 왔는데 너무하네.”
“용건이 뭐지?”
“이, 이거 전해 주려고.”
아란티아가 뒤적거리면서 키제프가 두고 간 물건들을 넣은 상자를 건넸다. 대개 잡동사니였다. 중요한 물건은 이미 아공간 포켓에 넣어 두었으니까.
“버리고 온 물건을 일부러 전해 주러 온 건 아닐 테고. 진짜 목적이 뭐야?”
키제프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 그냥 네가 산다는 벨슈타인이 궁금해서 왔는데. 다른 이유는 없어.”
사실은 아버지 몰래 드락카의 다른 드래곤을 졸라서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에게는 벨슈타인 영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소문에는 아주 굉장한 곳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키제프를 다시 한번 만나러 왔다.
“고작 그런 이유로 왔다고? 밤중에 허락도 없이 찾아오는 건 제국 귀족 예법에 어긋난다는 거 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스승 쿠란티엘은 엄격하고 명예를 높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딸이 제국 귀족가를 드나들 것을 생각해서 예법 선생을 따로 붙여 주었다.
“그, 그건 알지만…….”
아란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 예법이 알게 뭔가 싶었다. 다른 마을 남자들처럼 그녀가 관심 한 톨을 주면, 키제프도 저를 봐줄 것 같았다.
예쁘기만 한 귀족가의 영애들보다 검술까지 익힌 뛰어난 여자는 저뿐이었으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키제프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뗐다.
“내 아내의 마음이 상했어. 내가 오해를 받는 건 상관없는데,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용서할 수 없군.”
그러자 아란티아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모, 몰랐어. 아내가 있는 줄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쩐 건 아니잖아? 나는 그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란티아가 입술을 꼭 깨물고 얼굴을 붉혔다.
“……네가 갑자기 떠나고 알았어. 나, 너에게 관심이 있었나 봐. 얼굴 보고 그 말, 하려고 왔는데. 그리고 네가 보고 싶었단 말이야.”
아란티아가 키제프의 허리를 껴안으려고 했지만, 그가 얼른 그녀를 떼어 냈다.
키제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쿠란티엘 스승님의 딸이라고 해서 적당히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말귀를 못 알아듣나? 난 결혼했어.”
키제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여자에게 왜 이런 것을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루시엘을 지키기 위해 드락카에 가서 시련까지 겪고 힘을 얻었으니까.
“겨, 결혼했다고 끝은 아니잖아. 제국 귀족들이 한 정략결혼은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루시엘은 한참 연약하고 어려 보였는데 키제프도 그녀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냥 의무일 뿐인 거 아냐?”
“말 함부로 하지 마. 루시엘은 당신보다 어려도 훨씬 강하고 고결해.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의 전부야.”
자신에게는 영영 기회가 없다는 이야기에 아란티아는 당황스러웠다. 마을 남자들의 숱한 고백을 뒤로한 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온 거였는데.
“너, 너무해.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왔는데.”
“경고하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서늘한 얼굴로 말한 다음, 키제프가 휙 뒤돌아 저벅저벅 가 버렸다.
‘키제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저렇게 무섭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구나.’
아란티아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던 순간 느꼈던 저릿하고 따끔하던 심장의 통증이 멎었다. 자신의 질투는 쓸모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란티아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빨개졌지만 루시엘이 모습을 내밀자, 아란티아가 다시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루, 루시엘? 방금 키제프를 만났는데 이제 드락카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몰래 온 거니,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대신 시내로 가는 마차 좀 내어주겠습니까?”
“…….”
뻔뻔하고 어이가 없는 그녀의 행동에 루시엘이 말했다.
“거절할게요. 당신처럼 이기적이고 예의 없는 사람을 돕고 싶지는 않네요.”
“……네? 무슨 말이에요. 루시엘.”
“공작성의 미래 안살림을 책임지게 될 사람으로 말할게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직접 해결 바랄게요. 안녕히 가세요.”
키제프야 본래 남들에게는 차가웠던 성정이지만, 다정하고 어린 천사 같던 루시엘이 그리 말하자 아란티아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루시엘은 서둘러 먼저 가 버린 키제프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뒤로 다가가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입가에 붉은 미소를 매단 채 뒤를 돌았다.
“……언제 아는 척하나 기다렸어.”
“앗,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방금 날 따라오길래…… 아, 설마 다 들었나?”
“일부러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
루시엘이 볼을 수줍게 물들이며 살랑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긴말 없이 눈빛만으로도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잘됐네’라고 가넷처럼 빛나는 눈이 그리 말했다.
“갈까.”
키제프가 내민 손을 루시엘이 잡았다.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라일락이 핀 정원 사이를 걸었다. 가슴이 몽글몽글 따뜻했다.
그날 오후, 아란티아가 공작성 밖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에바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속이 시원해졌다.
* * *
“끄흑.”
검게 드리운 커튼 덕분에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방, 여자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두개골이 뒤흔들리는 격통에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온몸의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박사! 박사!”
설렁줄을 당기자 곧장 달려온 프리다 박사가 얼른 그녀의 심장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내 프리다는 제 마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제대로 영혼석을 구한 것이 맞나?”
“예, 영혼석이 체내에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과정이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카일라 님.”
영혼석이 자리 잡기 전에는 그저 인형일 뿐이다. 딱딱하고 거친 무생물에 가까운 그것.
진짜 인간의 생명력을 이 껍데기에 불어넣기 위해서는 젊은 인간의 피가 필요했다.
“……피를 가져와!”
날카로운 쇳소리가 가래와 함께 들끓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요구에 이내 목각 인형 시녀들이 눈을 가린 청년 하나를 데려왔다.
“으웁, 읍읍.”
그의 손목을 물어뜯은 카일라가 피를 빨아 마셨다. 피를 마실 때마다 몸을 짓누르던 격통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피가 부족해진 청년이 기절해 버리자 시녀들이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양 프리다 박사는 서성거리며 안경을 들어 올렸다.
“……힐다 볼라디의 영혼석을 해체하다가 기억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거기에 쓸 만한 게 있더냐?”
프리다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라 님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것이 아닙니까. 크리스털 페어리.”
그가 유리병 안에 찰랑이는 액체와 함께 들어 있는 가느다란 초록색 파편을 보여 주었다.
그러곤 파편을 꺼내서 영상 마도구와 연결된 투명한 액체 시험관 안에 파편을 빠뜨렸다.
그러자 영상구가 지지직거리더니 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흐릿한 흑백이었지만 아주 자그만 계집아이의 모습이 잡혔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맨발의 소녀. 흑백임에도 아이의 머리 색이 아주 밝은 색, 혹은 백색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릿한 인상의 사내가 턱짓하며 작게 말했다.
―저것이 힘을 각성하기만 한다면 내 보물이 될 게 틀림없지. 크리스털 페어리! 저 애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감시하도록 해라.
영상은 거기에서 툭 끊겼다. 카일라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한 소녀가 떠올랐다.
맑고 투명한 마나를 가진 은발의 소녀. 벨슈타인 공자비!
과거 문학 살롱에서 제 얼굴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누구야? 그 얼굴로 왜 있는데?’
“하, 그동안 코앞에 두고도 손에 넣지 못하였구나! 그 귀한 크리스털 페어리를…… 몇 년이나 시간을 허비했어!”
까드득, 분노한 카일라가 제 손톱을 거칠게 짓씹었다.
“안 되겠다. 레이놀드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겠구나.”
“……제단으로 갈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그래, 크리스털 페어리를 추적하던 일은 전면 중단하고, 벨슈타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 그리고 크루거 백작을 불러라.”
“예, 카일라 님.”
카일라의 손등에 프리다 박사가 입술을 깊이 묻고는 물러갔다.
‘레이놀드, 조금 늦었지만 우리 모자가 함께할 날이 머지않았어요.’
블루 익스큐션을 소울이터로 만든 다음, 크리스털 페어리의 보석까지 박아 완성시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제 아들, 레이놀드를 이 나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만들 방법이 될 터였다.
진작부터 그 작은 계집애가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걸 알았다면!
그동안 보석들을 줄줄이 뽑아냈을 텐데!
“깜찍하게도…… 맑은 마력까지 감추고 있었지.”
안타까움에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가만…… 아스트리야가 북부의 벨슈타인으로 향한다고 했었지? 오, 우리 황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선물이 되겠구나.’
카일라의 머릿속이 몹시 분주하게 굴러갔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제 몸을 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고 검은색 가운을 걸쳤다.
아직은 군데군데 불완전했으나, 아름다운 껍데기였다.
무엇보다 본래 그녀가 살아 있을 적에 가지고 있던 새카만 흑발과 매끄러운 흰 피부, 육감적인 몸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제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살짝 비틀어진 턱을 돌렸다. 삐걱, 소리가 났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자리를 잡으면 완벽하겠군. 기다리렴, 요정 아가야.”
카일라가 형형한 갈색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