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루시엘이 제 얼굴을 만지는 키제프의 손을 슥 떼어 냈다.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
차갑게 가라앉은 루시엘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키제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왜 찾아왔는지 전혀 모르겠어. 접점이라고는 없었거든.”
“아무 상관도 없는 아가씨가 이 밤에 그 먼 곳에서 너를 찾아왔다고?”
루시엘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는 키제프를 의심스럽게 흘겨보았다.
그 와중에도 보랏빛 보석이 또롱 또롱 생겼다.
‘읏, 이럴 때는 가끔 보석을 만드는 힘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어.’
밝은 곳에서 재차 보니 공작가의 보물고에서 보았던 보석이었다.
우아한 보랏빛을 머금은 자수정.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질투의 감정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자수정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는 모르겠어. 내일 물어보면 알겠지만. 어쨌든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들어서 미안해.”
“……쿠란티엘 스승님 밑에서 같이 검을 배운 사이야?”
“쿠란티엘 스승님과의 수업은 일대일 수업이 기본이야. 마주친 적은 거의 없어. 말을 섞어 본 것도 열 마디도 안 될걸. 단둘이 있어 본 적도 없고.”
키제프의 눈이 가늘어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믿지만 그럼에도 약간 서운한 건 사실이었다.
“키제프가 그녀에게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어?”
“쿠란티엘 스승님은 알고 계시니 전해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내가 나쁜 놈이야.”
키제프가 양손을 들고는 금빛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잘못했다는 얼굴로 루시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믿어 줘. 루시엘, 나는 오직 너뿐이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저 눈빛은 외면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솟아오르는 마음.
“그리고 하나 더. 그런 것들 전부 편지에서 이야기해 줬더라면 좋았을 거야. 키제프.”
키제프는 마탑의 마도사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루시엘은 드락카에서 키제프가 누구와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듣지 못했다.
“……나는 키제프가 드락카에서 누구랑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잘 모르는걸.”
“네 이야기 들으면서 반성 중이야.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 각 방 쓰자는 말만 안 하면……. 안 그럴 거지?”
한참 동안 토라져 있던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풀렸다.
“……그만 팔 내려.”
루시엘이 그의 팔을 억지로 끌어 내렸다. 단단한 근육이 붙은 팔은 사실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긴 했다.
“갑자기 네 곁에 내가 모르는 예쁜 여자가 나타나서 놀랐어. 질투가 맞나 봐.”
루시엘의 진홍빛 눈망울이 커지며 말했다. 그 모습조차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키제프는 더 참지 못하고 손목을 당겨 자그만 몸을 끌어안았다.
눈을 감은 그가 루시엘의 향기로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나직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내일 그 사람에게 단단히 주의시킬게.”
“응…….”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로 없을 거야. 맹세해.”
“알았어. 이번엔 용서해 줄게.”
키제프의 품 안에서 루시엘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해명을 전부 듣고 나니까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좀 부끄러웠다.
“근데 별에 내 이름을 붙였어? 그건 알고 있더라. 그래서 내 이야기를 아란티아에게 한 줄 알았어.”
“……다른 동료들에게는 말한 적 있어. 새벽에 뜨는 내 길잡이 별자리가 루시엘이라고. 그리고 난 여자는 동료로 둔 적 없어.”
“아, 기억나! 편지에서는 눈토끼라고 붙였다고 했잖아.”
“나중에 루시엘로 바꾸었어. 더 많이 부르고 싶어서…….”
키제프의 눈이 곱게 휘는 걸 보면서 루시엘의 마음이 챠르르 울렸다.
“이제 많이 부르면 되잖아.”
“맞아. 이제는 곁에서 항상 부를 수 있어. 루시엘.”
키제프가 웃음기를 거두고는 루시엘을 가만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만치 그의 귓불마저 달아올랐다.
루시엘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질투하는 널 보니까 기쁘긴 한데,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야.”
“……기뻐?”
“응. 나를 좋아한다는 증거니까.”
마디가 굵어진 손가락이 루시엘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하지만 내가 다른 여자를 쳐다볼 것 같아? 사람이 좀 예뻐야지. 날 이렇게 정신 못 차리게 홀려 놓고선……. 어림도 없지.”
나른하게 올라간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루시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가 슬쩍 뒤로 물러나며 따뜻해진 귀를 붙잡으면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키제프가 옆으로 다가와 앉자,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체구도 그렇고, 쭉 뻗은 그의 기다란 팔다리는 루시엘의 것과 몹시 차이가 났다.
토끼와 범만큼이나.
“홀린 적 없는데.”
뺨이 새빨개진 루시엘은 자신이 오히려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는 키제프야말로 왜 그렇게 매혹적이냐고.
붉은 눈 위로 길게 드리워진 금발과 상앗빛 피부는 밤에도 빛이 났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바람 내음이 상쾌했다.
키제프의 핏빛 눈이 찬찬히 구르며, 긴 팔을 소파에 걸치곤 더욱 바싹 당겨 앉았다. 그의 너른 어깨 사이로 자연스레 루시엘이 쏙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없기는…….”
그의 핏빛 눈이 구르며 루시엘에게 닿았다. 말갛고 뽀얀 얼굴과 가느다란 몸은 영락없이 눈토끼였다.
어색할 때 머리를 한쪽으로 모아 손으로 빗어 내리는 작은 습관도, 화를 낼 때 콧잔등을 찡그리는 모습도 귀여워.
웃을 때는 왼쪽 보조개가 조금 더 깊어지는데 그것마저도.
‘네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한없이 달콤해진 눈이 이번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루시엘을 보았다.
“……이건 뭔데 그렇게 소중하게 안고 있어?”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유리병을 빼앗듯이 가져간 키제프가 훑어보았다.
“아빠가 주신 거야.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곰 젤리……. 이거 맛있는데 한번 먹어 봐.”
“그래?”
키제프가 젤리를 꺼내서 루시엘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앙, 하고 받아먹은 루시엘이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 그도 하나 입에 물었다.
도톰한 입술로 시선이 저절로 향해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상큼하게 터지는 사과 맛이 입 안을 채웠지만 다른 맛이 궁금했다.
“나는 사과 맛. 네 건?”
“나는 레몬. 왜?”
“……궁금해서.”
“궁금하면 먹으면 되지.”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가 젤리 병을 뒤로 슥 감췄다.
“글쎄…… 젤리 들어 있던 유리병이 안 보이는데?”
“아빠 집무실에 네 병이나 더 있는데 갖다 줄까?”
루시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키제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니. 그……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다음에.”
“그건 그래. 시간이 늦었지…….”
루시엘도 하품이 밀려올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소파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키제프의 해명도 들었겠다, 이제 긴장감이 사라지니 슬슬 고단함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반면에 한 손으로 턱을 괴던 키제프는 더운 건지 셔츠의 단추를 서너 개 가볍게 풀며 손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루시엘도 해명할 차례인데.”
“뭐얼…….”
“네 호위 기사 노아 말이야. 과거 너와 무슨 사연이 있지?”
키제프가 물었지만 루시엘은 이미 갸우뚱 느릿하게 고개를 들면서 중얼거렸다.
“으응. 과거…… 막시무스 노예……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될 거…….”
키제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시엘, 불리해져서 자는 거 아니지?”
“…….”
“진짜 자는군.”
루시엘은 어느새 소파에 완전히 기대서 스르륵 잠들었다.
어쩜 이렇게 몇 초 만에 잠들까.
가느다랗고 기다란 속눈썹이 잘게 떨리며 옅은 숨결을 내뱉었다. 어여쁘게 잠든 루시엘을 한참 눈에 담았다.
키제프의 붉은 눈이 한층 짙어지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분홍빛 입술에 살짝 뽀뽀했다. 새콤한 레몬 맛이 흐릿하게 입 안을 감돌았다.
아쉬움에 그는 젤리 병을 다시 찾아서 노란색 레몬 맛 젤리를 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노아라는 자가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될 거라서 호위로 두었단 거군?’
잔뜩 좁아 든 미간, 불안감에 눈동자가 촛불처럼 일렁였다.
‘그자가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되어서 루시엘이 반해 버리면 어쩌지?’
‘결혼의 계약 기간이 끝났다면서 가 버리면……?’
그자의 눈동자는 가끔 루시엘을 담을 때 유독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가만히 있더라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루시엘을 넘볼지도 모른다.
‘그걸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으득 이를 꽉 물은 키제프의 붉은 눈이 구르면서 제 양손을 깍지끼듯 엮고는 뇌까렸다.
‘아무에게도 못 줘. 루시엘은 내 것이니까…….’
노아뿐만이 아니다. 아르제온이라는 자도 루시엘을 노렸다.
사방에서 루시엘을 원하는 자들이 계속 나타날지도 몰라.
당장이라도 무슨 수를 써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키제프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굴러갔다.
보송한 담요를 가져와 루시엘에게 덮어 준 키제프는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집착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입매를 틀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루시엘이 날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드락카에서 고대 언령 마법 중 하나인 ‘각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 마법을 배울 수 있는 현자는 사라졌고, 각인의 마법을 할 수 있는 물건만이 몇 점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간신히 구했다.
키제프는 품 안에서 무지갯빛의 하얀 오팔 팔찌 한 쌍이 담긴 상자를 잠시 펼쳤다가 다시 닫았다.
보랏빛의 드래곤 마나를 머금은 키제프의 찐득한 시선이 루시엘을 오래도록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