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14)화 (214/282)

<214화>

아란티아를 데리고 본성의 홀에 다다랐을 때였다. 에바와 사용인들은 루시엘과 낯선 얼굴을 보고 분주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가 마님! 아직 얇은 옷차림으로 다니시기엔 춥습니다.”

에바는 시녀에게 손을 뻗더니 가지런한 숄을 펼쳐 루시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아란티아가 멀뚱히 바라보았다.

“에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옆에 계신 여성분은…… 아가 마님의 친구분이신가요?”

“아, 아니요. 정원에서 길을 헤매시기에 같이 왔는데 머무르실 방이 필요할 것 같아요.”

루시엘의 말을 들은 에바는 약간 경계의 빛을 띠고는 아란티아에게 말했다.

“오늘은 손님께서 방문하신다는 보고를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신원이 불분명한 분은 공작성 내부로 들어가실 수가 없답니다.”

“저는 드락카에서 온 아란티아입니다. 벨슈타인 공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드락카는 멀어서 사전에 연락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발음이나 예법, 행색까지 모두 낯선 타지 사람이었다. 아란티아가 다소 눈썹을 늘어뜨리면서 사정을 토로하자, 남관에서 응접실로 들어오던 솔리아페가 이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다.

자줏빛의 고혹적인 드레스를 걸치고 머리를 올린 그녀는 화장기 없는 맑은 낯임에도 요요하게 아름다웠다.

“무슨 일이 있나?”

“아, 마님!”

솔리아페가 주변을 휘 둘러보며 등장하자 모두가 고개를 숙였고, 아란티아도 냉큼 인사했다.

“영애는 드락카에서 왔다고?”

“네, 저는 공자의 친구입니다.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아란티아의 말에 솔리아페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나는 그 애의 어미란다. 여기 이 아이는 아내고.”

“아…… 몰랐습니다. 그가 드락카의 별을 루시엘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을 뿐입니다.”

아란티아가 솔리아페와 루시엘을 번갈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슥한 시간에 남의 남편을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니란다, 드락카의 아가씨. 에바, 우선 이 아가씨에게 손님 방을 내어주고 푹 쉬도록 도와주게.”

“예, 마님.”

“가, 감사합니다.”

아란티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귀족 아가씨가 이렇게 굴었다면 크게 기분이 나빴겠지만 드락카 사람이니 모르고 한 행동일 터였다.

에바를 따라서 아란티아가 손님 방으로 이동하며 루시엘을 힐끔 보곤 멀어졌다.

솔리아페가 루시엘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고는 속삭였다.

“루시엘, ……기분이 상했니?”

“아니에요, 엄마. 그녀가 한 행동이 제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젓자, 보드라운 은발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나는 상했는데. 때론 악의가 없는 사람이 더 골치 아플 때도 있거든.”

솔리아페가 루시엘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그러니 키제프에게 얼른 가서 해명하라고 하렴. 잘 자고.”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루시엘이 배시시 눈을 곱게 휘며, 곰 젤리 병을 끌어안고 별궁으로 다시 총총 걸어가기 시작했다.

솔리아페 덕분에 마음이 풀렸지만, 그럼에도 아까 아란티아가 웃으면서 했던 말이 마음에 콕 박혀 버리고 말았다.

‘공자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포기를 모르는 점이 멋졌습니다.’

자신만 알고 있던 보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 것만 같았다.

‘기분이 좀 이상해.’

루시엘은 별궁에 도착하기 전, 발길을 틀어서 다시 풀숲으로 걸어갔다.

왠지 모를 속상함이 삐죽 솟아 있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무언가로 가로막힌 듯 답답하고 또 일렁였다.

아란티아가 벨슈타인 공자를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부터 그런 것 같았다.

기어이 마나가 모이면서 보석을 만들었다.

파아아. 또롱!

루시엘은 풀숲에 떨어진 제 보석을 주웠다. 어둠 속이라 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뭘까. 옵시디언일까?’

루시엘은 별 감흥 없이 그걸 주머니에 넣고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혼자서 이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 발소리에 뒤돌아보자 키가 훌쩍 큰 노아가 있었다.

칠흑처럼 짧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눈이 루시엘을 담았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냥.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루시엘은 고개를 저으며, 젤리 병을 내밀었다.

“노아, 젤리 먹을래? 손 내밀어.”

그의 손에 젤리를 한 움큼 부어 주고 나니, 벌써 바닥을 보였다. 노아가 삐질 땀을 흘리며 말했다.

“……이만큼은 다 못 먹습니다.”

“맛있는데.”

씹을수록 달콤하고 쫄깃한 식감에 노아도 말없이 먹기 시작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습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루시엘이 헤죽 웃으며 자신도 젤리를 먹었다.

“참, 아가 마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은 전부 다 해 두었습니다.”

“아…….”

그제야 루시엘은 얼음의 제단에 가기 전 일이 생각났다. 노아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제단에 함께 가겠다고 했었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저도 함께 따르겠습니다. 기사의 의무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해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가족들과 함께 가니까 괜찮아. 대신에 내가 없는 동안 우리 프린세스를 잘 보살펴 줘. 부엉이 벨 산책이랑 과수원도 부탁해!’

“전부 꼼꼼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건 정말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매일 프린세스와 부엉이 벨을 돌봐 주고, 과수원에 자란 무성한 잡초를 뽑으니까 시간이 금방이었다.

“……앗, 그랬구나, 잘했어.”

“진짜 잘했는지 확인, 해 보셔도 되는데.”

루시엘의 칭찬 한마디에 노아가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성실한 사람이란 걸 아는걸. 아참…… 훈련은 잘되어 가? 여름이 되면 스콰이어 검투 대회가 열릴 거야. 접수하자.”

“……이번 여름 말입니까?”

“응. 그래야 헤어진 동생도 빨리 만나지.”

“하지만 동생과는 이제 연락이 끊겨서…….”

“정보원에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의뢰해 둘게. 누구보다 소중한 동생이잖아.”

그 말에 마음이 잠시 울컥한 노아가 루시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

“…….”

그럼에도 부동자세인 그를 보며, 루시엘이 웃었다.

“밖에서 생각에 잠기기엔 시간이 늦었습니다. 가십시오. 제가 별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알겠어. 가자.”

노아가 앞장섰고 루시엘이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로 누군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박혔다.

이내 초록빛 포탈과 함께 그는 사라졌다.

* * *

별궁으로 포탈을 타고 이동한 키제프는 순간 자신이 뭘 본 건가 싶었다.

밤늦게까지 업무를 처리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오던 중이었다. 마침 돌아오는 루시엘을 발견하고 기뻐서 다가갔는데 노아와 길게 대화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아무리 호위 기사라지만 퍽 다정해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둘 사이를 파고들어서 루시엘을 데려오고 싶었다.

아니,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하마터면 노아라는 자에게 먼저 싸움을 걸 것 같았다.

‘하…… 심란하다.’

응접실에서 열 번도 넘게 제 금발을 쓸어올리며, 서성거리던 키제프가 테라스로 두 사람이 오는 걸 보고는 얼른 별궁의 입구로 나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삐딱해진 시선으로 노아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던 키제프를 발견한 루시엘은 모른 척 노아에게 말했다.

“노아, 좋은 밤 보내.”

“푹 쉬십시오.”

노아가 고개를 숙이고 키제프에게도 까딱 인사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키제프가 노아에게 짙은 살기를 보냈다.

일종의 경고였다.

‘제 아내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살이 떨리는 차가운 살기에 노아도 목뒤가 서늘해졌지만 무시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루시엘이 말도 안 하고 먼저 별궁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키제프의 표정이 무너지며 따라갔다.

“루시엘?”

“…….”

불러도 들은 체도 안 한 루시엘이 그냥 가 버리자, 키제프가 앞을 가로막았다.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정작 화가 난 건 자신인데, 루시엘이 왜 싸늘하게 구는 걸까?

그럼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왜 나 안 보는데.”

간절함이 담긴 그의 붉은 눈동자가 루시엘에게 고정되었다.

“응? 루시엘,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저 자식이랑 친근하게 웃으면서 들어오고 나한테 이렇게 말도 안 할 거야?”

“…….”

루시엘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했다.

“화내지 마. 내가 먼저 화났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멍청이. 해명을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은 나란 말이야. 너도 본성에서 왔으면 들었을 거잖아.”

“뭘 들었단 거지?”

키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란티아라는 여자가 이 밤에 드락카에서 여기까지 널 찾아왔어. 빨리 해명해.”

“……아란티아? 쿠란티엘 스승님의 딸이 여길 왔다고?”

“그래, 바보야.”

키제프는 무척 의아한 얼굴이었다.

“어라. 그 누나가 왜 왔지?”

“누나아?”

루시엘이 눈이 가느다래지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머릿속으로는 누나, 누나 하면서 다정하게 검을 배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 그려졌다.

“……칫.”

화르륵.

질투의 눈길로 루시엘이 그를 쏘아보았다.

“제법 친했나 보네. 누나라고 부를 정도면.”

“어? 아니, 아니. 절대로.”

키제프가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루시엘은 잔뜩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검술도 잘하는 것 같고…….”

루시엘이 볼을 잔뜩 부풀리면서 종알종알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일렁거리면서 마나가 모아졌다.

파아아, 파앗!

보랏빛 보석 두 개가 허공에 또롱 맺혔다.

“이건 또 뭐야.”

아까까진 잔뜩 화가 나 있던 키제프가 루시엘이 하는 양을 보며 이마를 짚다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형형하던 붉은 눈은 다시 사르르 녹아내렸고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미치겠다. 루시엘, 지금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야?”

“몰라.”

“이건…… 설마 너 질투하는 거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질투는 질투를 해 본 자가 아는 법. 루시엘은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이유도 없이 화가 나고, 온통 신경을 거슬리게 하니까.

게다가 그냥 화가 난 거였다면, 루시엘이 만든 건 루비였을 터.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보석은 영롱한 보랏빛이다.

“질투하는 거 아니야.”

삐죽 나온 입술이 귀엽다. 빵빵해진 루시엘의 부드러운 볼을 키제프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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