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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13)화 (213/282)

<213화>

루시엘이 가족들과 성으로 귀환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가족들과 주요 가신들이 회의장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마검 블루 익스큐션을 어떻게 할지 논의가 계속되었다.

위험하고도 강력한 힘을 지닌 마검이니 파괴할지, 아니면 아무도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을 해 두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파괴해 버리기엔 아까운 검임에는 사실이었다.

그 어떤 결론도 쉬이 나질 않아서 결국 류프델에게 강력한 봉인을 해 달라고 의뢰한 다음 벨슈타인의 보물 창고에 보관해 두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카일라 황비와 레이놀드 황자가 곧 그 검이 사라진 걸 알게 될 터였다.

‘그것에 대해서도 대비를 하는 게 좋은데…….’

마음이 무거워진 루시엘은 공작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무실의 마법 랜턴은 환히 밝혀 있었다.

루시엘을 본 한 보좌관이 안으로 바로 안내해 주었다.

“아가 마님 오셨습니까.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요 며칠 자주 드나든 탓일까.

자신이 찾아오면, 따로 보고할 필요 없이 곧장 들어와도 된다고 일러두신 모양이었다.

섬세한 배려가 고마워 루시엘은 미소를 살짝 머금으면서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벽에 세워 둔 마법이 걸린 바이올린에서 웅장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뜻밖에도 공작은 편한 베스트 차림으로 창가에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쉬고 계셨구나.’

왠지 그의 휴식을 방해한 게 아닐까 싶어 루시엘은 사뿐사뿐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어.’

다시 뒷걸음질로 나가려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왔으면 얼굴은 보고 가지.”

루시엘이 고개를 들자 공작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었음에도,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 보고 있었다.

“아빠. 쉬시는 데 혹 방해가 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움직이는 바이올린의 활을 멈추게 한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네 방문이야말로 아비에겐 휴식이지. 차를 줄까?”

“음…… 아뇨.”

“편한 곳에 앉아라.”

루시엘은 그의 집무실을 휘 둘러본 다음, 소파 대신에 그가 했듯 창가로 가서 기댔다.

그러고 나서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들을 보았다.

“제단에 다녀오신 뒤로 정무가 더 밀렸나요?”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영지에서는 언제나 불시에 일들이 쏟아지곤 하니까.”

그는 약간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안색이 나빠 수척해 보이기도 했다. 루시엘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남은 성수가 있나 살폈다.

마침 아주 조금 찰랑거릴 정도로 성수가 남아 있었다. 그걸 다이아몬드에 붓자, 화아 하고 밝은 빛이 뿜어졌다.

“한숨도 못 주무신 얼굴이에요. 아빠, 손 내밀어 보세요.”

루시엘이 다이아몬드를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한숨은 잤는데. ……이런, 고맙구나.”

다이아몬드가 닿은 손으로부터 그의 몸 곳곳에 치유의 기운이 퍼졌다. 말끔하게 피로감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지끈거리던 두통도 없어졌다.

다이아몬드의 힘에 놀란 그의 붉은 눈이 잠시 커졌다.

“네 보석은 정말 대단하군. 보드카보다 낫구나. 병도 없는데 더 쓰기 아깝다.”

공작이 얼른 루시엘에게 다시 다이아몬드를 돌려주려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다이아몬드는 얼마든지 잔뜩 만들 수 있어요. 이제는 받아 주세요.”

루시엘이 배시시 웃자,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한데 무슨 일이지? 이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고?”

“음…… 최근에 이 일로 신경을 많이 쓰셨겠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마검 이야긴가. 말해 보아라.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바로 알아듣는 그였다. 루시엘이 말했다.

“그들이 블루 익스큐션이 사라졌다는 걸, 최대한 늦게 알게끔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 놓거나, 함정을 파 두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요?”

루시엘의 말에 공작이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군. 그것들이 곧 눈치채겠지……. 게다가 안 좋은 소식도 하나 기다리고 있다.”

“……안 좋은 소식이요?”

루시엘의 눈이 커졌다. 공작이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스트리야 신성 지구가 나아가는 궤도가 북부로 바뀌었다는구나.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벨슈타인 영지와 맞닿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전에서는 맞닿는 영지에 여러 가지 지원이나 요청을 할 권리가 있고 제국의 모든 영지는 신성보호법에 의해, 그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 신의 이름을 빗대 구걸하는 아주 귀찮은 법이지.”

그의 눈이 더욱 가라앉았다.

“혹시 그들이 과한 요구를 하나요?”

“그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지금 거기에는 망할 황자 놈이 있으니까. 혹 그놈과 네가 다시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하고 싶어서 말이지…….”

“아, 황자와는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치게 되리란 거 알고 있어요. 저는 괜찮아요. 이제 두렵지 않아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내가 싫어서 그렇다. 과거 그놈에게 받은 고통을 떠올릴 널 생각하면 마음이 갈가리 찢겨……. 당장에라도 그것들을…….”

루시엘 앞이라 차마 더 심한 말을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일렁이는 분노가 느껴졌다.

“아빠…….‘

루시엘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토파즈가 떨어졌다. 이토록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가 있어서 감사하고, 또 기뻤다.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뭉클함과 안도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었다.

루시엘이 그동안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

루시엘은 눈물방울을 이내 떨쳐 내고는 주먹을 꼭 쥐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오히려 황자든, 황비든 마주친다면 더 좋겠어요. 그들이 어떤 패를 쥐고 있는지 보고 싶거든요. 적에 대해 알아내는 건 기본이잖아요.”

루시엘의 은발을 쓰다듬은 공작의 눈이 휘어졌다.

“우리 딸이 벨슈타인답게 성장했군.”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맞군.”

몸을 일으킨 그가 서랍장을 열어 루시엘에게 보여 주었다. 곰 모양 젤리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다섯 병이나 있었다.

“이제 이런 건 안 먹나?”

“아뇨, 여전히 좋아해요. 아빠를 좋아하는 만큼. 그치만 다섯 병은 너무 많아요.”

“한 번에 하나씩만 가져가. 네 번 더 오면 되겠군.”

“알겠어요, 아빠. 또 올게요.”

가볍게 포옹을 한 다음 루시엘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얼굴로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한시름 덜었어. 이제 슬슬 다음은 뭘 해야 할까?’

루시엘은 젤리 하나를 입 안에 쏙 넣고는 오물거리면서 회랑을 지나 중정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젤리를 여섯 개쯤 더 먹고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원 앞에 처음 보는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듯한 초록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아가씨였다.

‘누구지? 손님일까? 예쁜 사람이야.’

늘씬한 키에, 건강해 보이는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 특유의 활달하고 밝아 보이는 인상이 보는 이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게다가 가벼운 갑옷 가죽과 튜닉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일반 귀족 영애들 같지 않았다. 등에는 두 자루의 검까지 매고 있었다.

‘편한 옷차림도 아닌 것 같은데. 손님 방을 아직 배정받지 못한 걸까?’

자신이 아는 에바라면, 손님을 이렇게 두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루시엘은 가볍게 미소 지고는 다가갔다. 길을 잃었다면 안내를 해 주려던 차였다.

“실례할게요, 레이디. 혹시 누구와 함께 오셨나요? 도움을 드릴 일이 필요하실까요? 아니면 제가 집사장님께 데려다줄게요.”

“이곳에 사는 분인가요?”

“네, 맞아요.”

“아, 고맙습니다. 그럼 길 좀 묻겠습니다. 벨슈타인 공자의 방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네?”

그녀가 꾸벅 인사하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루시엘의 눈이 잔뜩 커졌다.

키제프에게 아는 여자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해서일까. 루시엘은 괜스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동료가 있다고 했었지. 루시엘의 눈동자가 다소 흔들렸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음, 벨슈타인 공자를 찾아오셨다고요?”

“네. 무작정 여기로 오긴 왔는데 벨슈타인 공작 성이 너무 넓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곤란한 듯 말하자, 루시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길을 잃으신 모양이에요. 마차를 타고 도착하셨는데 에바 집사장에게 안내를 받지 못하신 걸까요?”

“아뇨, 마차를 타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이동포탈을?”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드락카에서 드래곤을 타고 왔습니다. 근데 저만 내려놓고 갔습니다.”

“……네?! 아, 우선은 저쪽으로 같이 갈까요?”

드락카에서 드래곤을 타고 온 거라면 이해는 되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아, 저는 쿠란티엘의 딸인 아란티아라고 합니다. 키제프, 아니 벨슈타인 공자와는 아버지 밑에서 함께 검을 배웠습니다.”

“……아, 그랬군요. 저는 루시엘이라고 해요.”

“헛. 당신의 이름이 루시엘이라고요?”

아란티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네, 왜 그러시나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시엘.”

“나도 반가워요.”

아란티아가 씩씩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루시엘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키가 컸다.

‘키제프가 아란티아에게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을까?’

바로 묻고 싶었지만 우선은 참았다.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물어볼 것이 많을 듯했다.

드락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가서 따져 묻고 싶었다. 루시엘은 왠지 신경이 자꾸 쓰여 심장이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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