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제단의 최고 층은 야외였다.
하얀 기둥을 지나 쭉 뻗어 있는 바닥을 따라가자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새하얀 눈과 얼음들이 실처럼 마구 엉겨 붙은 푸른색의 심장.
얼음의 심장이었다.
그것은 쿵쿵 약동하면서 시푸른 마나를 내뿜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꽁꽁 언 채 푸른색의 마법 족쇄로 묶여 있는 아르제온과 반질반질한 은거울이 있었다.
길리아트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저것이 아르제온의 힘이 봉인된 얼음의 심장인 것 같군.”
“파괴하면 되는 겁니까?”
“파괴하면 아르제온은 죽을지도 모른다.”
“…….”
“……!”
루이비드와 키제프의 두 눈은 하등 상관없다는 듯 잠시 빛났다.
“귀찮은 자들이 또 왔구나.”
그 순간 전신 거울 안에서 드라슈엘이 걸어 나오더니 양손을 위로 들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솨아아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냉기 섞인 안개가 훅 주변으로 깔렸다. 호흡이 힘들 정도로 차가운 공기에 다들 인상이 구겨졌다.
촤악.
눈을 부릅뜬 공작이 지팡이로 광역화된 실드 마법인 휴즈 실드(Huge shield)를 펼쳤다.
공작이 건조하게 말했다.
“저것인가. 그 미친 마녀가.”
그의 실드는 무척이나 단단해서 더는 냉기가 세 사람을 괴롭힐 수 없었다. 세 남자가 각자 지팡이와 검을 들고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드라슈엘은 목을 뻣뻣하게 들면서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호기심에 가까운 눈동자는 이채를 머금었다.
“……당신은 얼음의 힘을 가졌군? 강하고 아름다워.”
“…….”
공작의 무감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라슈엘이 공작의 주위를 빙빙 맴돌면서 얼음 결정으로 칼날을 만들어 냈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저 마녀가 관심 대상을 바꾼 것 같아 공작이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공작의 뺨으로 냉기를 후우 내뿜던 드라슈엘이 미소 지으며, 또다시 블리자드를 사용했다. 그러나 공작의 실드 덕분에 마녀의 눈보라는 피해를 끼칠 수 없었다.
“난 강한 남자가 마음에 들어.”
“……내 아내에게 목이 달아나고 싶은 모양이지.”
공작이 장갑을 단단히 끼더니, 지팡이에 자신의 마나를 재차 연결하며 펼쳤다. 일렁이는 마나와 바닥에는 여덟 개의 푸른 마법진들이 동시에 펼쳐졌다.
“그걸 쓸 생각인가. 키제프, 일단 피하자꾸나.”
길리아트가 알아채고는 곧장 나무를 소환했다. 나무줄기에 두 사람이 매달리자, 덩굴이 미친 듯이 자라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이내 마법진이 빛나면서 드라슈엘을 향해 냉기의 폭풍이 덮쳤다. 주변으로 엄청난 냉기가 몰아쳤다.
마녀의 블리자드보다 한 서클 높은 단계의 마법인 프로즌 템페스트(Frozen tempest). 그것을 만들어 낸 공작은 폭풍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모습을 지루하게 지켜보았다.
쿠구구.
제단의 건물 전체가 뒤흔들렸다.
폭풍에 휘말린 마녀의 몸이 얼어붙었지만, 같은 얼음 속성이기에 한계가 있었다.
마녀를 얼마나 오랫동안 얼어붙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잠시 시간은 벌 수 있다. 길리아트가 소환한 나무가 마녀의 온몸을 꽁꽁 묶어 두었다.
공작이 키제프와 시선을 교환하고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두 개의 검이 교차하듯, 얼어붙은 마녀의 몸을 뚫었다…… 고 생각한 순간, 눈과 얼음이 흩날리더니 이내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녀가 후후 웃었다.
“쿡, 재밌구나.”
“제길. 언제부터 풀렸던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속임수였나?”
공작이 낮게 뇌까렸다.
이내 지진과도 같은 흔들림이 멎자 루시엘과 솔리아페가 커다래진 눈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아빠!”
“저 마녀가 얼음과 눈을 이용해 분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사이에 마녀가 다시 거울 속으로 슥 모습을 감췄다. 은빛 거울에서 제법 많은 마력이 느껴졌다.
“아까도 저 거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거울을 깨 버려야 한다.”
쩌저적.
길리아트의 말에 키제프가 거울을 검으로 깨부수는 동안 루시엘은 근처를 살피면서 머리를 굴렸다.
매끄러운 얼음 바닥은 반지르르 투명하게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마녀의 거울처럼.
‘잠깐만…… 마녀가 거울에 숨었던 건 속임수고, 진짜는 이 밑에 있는 게 아닐까?’
그때 유독 은빛으로 챠르르 빛나는 바닥 돌이 몇 개 있었다. 루시엘이 그걸 밟자, 빛은 다른 곳으로 계속 옮겨 갔다.
루시엘의 행동을 지켜보던 키제프와 공작도 이내 그것이 마녀의 흔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콰과광!
루시엘이 얼른 마법의 창을 사용해 바닥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 얼음 바닥을 파괴해야 해요.”
“루시엘, 잠깐 뒤로 물러나라.”
공작의 어스 브레이크(Earth brake)가 바닥을 뒤흔들었다.
쿠구구궁, 쩌저적.
이내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며 얼음 바닥이 뒤집어지듯 갈아엎어지자 마녀가 바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악……!”
루시엘이 지팡이를 겨누고는 옵시디언을 그녀에게 던졌다. 이내 마녀의 주변이 암흑탄을 뿌린 듯 어두워졌다.
“……내가 여깄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거울처럼 얼음 바닥도 당신을 비추니까,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루시엘이 싱그레 웃었고, 곧 사방에서 무기가 마녀의 목에 들이밀어졌다.
키제프의 이터널이 곧장 마녀의 몸을 갈랐다.
이번에야말로 마녀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육체가 눈이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공작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입매를 올렸다.
“대단하군. 저것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루시엘. 피닉스의 불 마법으로 마지막을 부탁한다.”
“앗, 네.”
눈과 얼음의 잔해로 천천히 변하고 있는 마녀 앞으로 다가선 루시엘이 피닉스를 소환했다.
피닉스는 얼음 마녀를 태워 버렸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졌던 마녀의 몸은 불에 녹아서 모두 사라졌다.
아르제온도 얼었던 몸이 녹아, 정신을 차렸지만 마법 족쇄는 아직도 그의 몸을 속박한 채였다.
길리아트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일으켜 부축해 주었다. 루시엘이 다가가 물었다.
“아르제온, 마녀가 죽었는데 왜 봉인이 풀리지 않아?”
그는 가까스로 숨을 토하며 말했다.
“아직 네 힘이 필요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봉인을 풀 수 있어?”
아르제온이 애처로운 얼굴로 루시엘에게 손을 뻗었다.
“순수한 요정의 마나를 저 얼음 심장에 채우면, 저주의 봉인이 풀릴 것이다.”
“알겠어. 해 볼게.”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얼음 심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에선 아직도 저주받은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앗.
루시엘은 마나를 가득 끌어모아 마나 방울을 만든 다음 얼음 심장으로 보냈다.
투명하고 맑은 마나 방울이 닿자, 심장에 엉겨 붙은 눈과 얼음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나갔다.
꽤 많은 마나가 드는 일이었지만, 쉼 없이 마나를 모아 전달했다.
하얗던 표면에 점차 균열이 가더니, 이내 눈들이 전부 녹아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 안에는 처음보다 작은 크기가 된 푸른빛의 심장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내 아르제온의 가슴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르제온의 동공이 더욱 새파랗게 빛났고,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그가 힘을 되찾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믿기지 않는지, 제 몸을 훑어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아르제온의 미소였다.
“드디어 힘을 되찾았군. 고맙다, 루시엘. 내 은인이다.”
“잘됐어, 축하해. 아르제온.”
아르제온이 루시엘의 손을 잡으려 하자, 키제프가 둘을 떨어뜨려 놓으며 서느런 시선을 보냈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루시엘은 그만 괴롭혀.”
“네놈은 이제 이제 마탑으로 돌아가 할 일을 하는 건 어떠냐…….”
길리아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아르제온에게 다가왔다.
“……싫다.”
“싫어도 해라. 나도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그 자리는 나보다는 당신이 제격이다. 나는 들어가고 싶은 자리가 따로 있다.”
아르제온이 루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했고, 바로 키제프와 길리아트에게 멱살이 붙잡혔다.
“……어디서 수작을. 이 새끼 죽일까요.”
“이제 보니 이 제단이 이놈 묘지가 되겠구나.”
공작이 하찮다는 시선으로 아이스 애로우를 날렸지만 아르제온은 텔레포트로 멀찌감치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벨슈타인 가족들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날카로웠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르제온에게 욕설을 날렸다.
루시엘은 조용히 가방 안에서 아르제온이 주었던 은빛 팔찌를 찰그락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르제온, 얼른 도망가.”
“아니, 잠깐만. 뭔가 오해가 있다. 네 옆자리를 탐내는 게 아니라 나도 권속이 되고 싶다는 뜻인데.”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인간인데 내 권속이 될 수 있어?”
“힘을 되찾은 순간부터는 가능하다. 네게 언제든 빙결의 힘을 빌려줄 수 있다.”
아르제온이 기세등등해진 얼굴로 자신의 뒤로 얼음덩이들을 마구 소환해 내며 힘을 보여 주었다.
“루시엘, 그놈 말 믿지 말아라.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놈이다.”
“다른 남자를 권속으로 들인다고?”
특히 키제프의 얼굴이 더욱 서늘하게 굳었다.
얼음 속성인 그를 권속으로 두는 일이라면, 루시엘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키제프와 가족들이 반대하는 일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제온, 보다시피 가족들이 원치 않아서 안 되겠는걸.”
루시엘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겠다. 나중에 둘이서 다시 상의하자.”
그는 순간이동해 팔찌를 챙긴 다음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들 지쳤으니 우리도 이만 귀환하지.”
공작의 말마따나 장시간 제단을 돌파하느라,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길리아트가 초록빛 이동포탈을 열자 모두 그걸 타고 공작성의 정원으로 이동했다.
안전하게 도착하자 길리아트가 로브 자락을 털어 내며 가족들을 응시하고 말했다.
“모두 고생 많았다. 다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군.”
솔리아페도 가족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맞아요, 아버님. 모두가 무사한 게 가장 감사한 일이에요.”
“가족들이 없었더라면 블루 익스큐션을 얻어 내지 못했을 거예요.”
루시엘도 고개를 주억이며 가족들 한 명 한 명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길리아트는 루시엘과 키제프, 두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누구보다 너희 둘이 용감히 잘 대처해 주었다. 아직 의논할 게 많지만 우선 푹 쉬고 내일부터 다시 머리를 맞대 보자꾸나.”
인사를 끝으로 가족들은 각자의 궁으로 흩어졌다.
별궁에 돌아오자마자 키제프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모두가 잠든 밤, 루시엘은 몸은 지쳤어도 잠이 오지 않아 조용히 테라스로 나왔다.
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이번 일로 블루 익스큐션을 손에 넣었으니 카일라 황비와 레이놀드 황자의 계획이 제대로 금이 가게 되었다.
‘이제 이것으로 벨슈타인이 무너질 가능성은 더 줄어들었어. 레이놀드 황자가 힘을 얻고 카일라 황비가 부활할 방법은 사라진 셈이야.’
루시엘은 그 사실이 기뻐 힘들지만 웃을 수 있었다. 가족들이 없었더라면 정말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지만 그래도 한시름은 덜었다.
끔찍한 피와 희생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생각하면, 감사하다고 신에게 기도할 정도로 말이다.
처음이었다.
과거에는 언제나 신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으니까.
세상을 원망하고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이 가혹하다 생각했었다. 그런 삶을 살았었다.
과거의 자신은 전혀 몰랐을 거다.
이 두 번째 삶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여기서 끝이 아니야. 황자와 카일라 황비가 몰락하기까지 멈추지 않겠어.’
다짐하는 루시엘의 눈이 달빛을 받아 더 밝게 빛났다.